심리전(心理戰)의 시작, 안골포해전
국정호㈜한화 종합연구소 책임연구원
손자병법에서 가장 상책의 용병(用兵, 군사를 부림)은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것(벌모)이고, 그 차선은 적의 외교관계를 공격하는 것(벌교)이며, 그다음은 적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벌병), 그 아래는 성을 공격하는 것(공성)이다. 이와 같은 공격의 우선순위는 밑으로 내려갈수록 희생만 커지고 성과가 없어진다. 싸워야 하는 것이 전쟁의 속성인데, 손자는 싸우지 않고[非戰], 공격하지 않고[非攻], 오래 끌지 않는[非久] 것을 견지하라고 했으니, 병법은 기본적으로 심리전(心理戰)인 셈이다(김원중, <손자병법>, 94~95쪽).
바다에서의 벌병(伐兵)으로 왜적을 벌벌 떨게 하다.
나는 앞서 두 차례에 걸쳐 한산해전(임진년 07/08)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번 글에서는 한산대첩의 한 자락인 안골포해전(임진년07/10~11)에 대해서 살펴본다. 한산해전에서 바다 싸움의 중심에 있었던 이순신이 견내량 북쪽의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협판안치)를 한산도 근해로 유인하여 거의 몰살시켰다. 그는 왜 전투의 승리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날 곧장 함대를 가덕도 방향으로 동북진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적의 대규모 함선단을 보고 일망타진의 격전을 펼쳤을까?
위 손자병법의 공격 우선순위로 따지면, 안골포해전은 적의 군대를 공격하는 벌병(伐兵)이다. 특히 아군의 희생이 따를 수도 있는 해상에서의 벌병인데, 이순신은 과연 무엇을 위해서 죽기를 각오하고 이 전투를 감행했을까?
먼저, 백사 이항복의“고 통제사 이공 유사”에서 말하는 안골포해전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한산해전 후)제군(諸軍,수군 전체)이 다시 진군하여(진해)안골포(安骨浦) 앞바다에 이르니 또 적선 40여 척이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3척의 배에는 위에 층루(層樓)를 설치하였고, 기타 여러 배들은 차례로 열을 지어 정박해 있었다. 그런데 적들이 이미 누차 패한 나머지, 아군이 곧바로 돌격해올까 두려워하여, 앞으로는 얕은 항구를 점거하고 뒤로는 험고함을 의지해 있으면서 감히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공이 제군을 독책(督責, 서두르도록 독촉)하여 번(番,차례)을 쉬어가면서 교대로 진격하게 했는데, 날이 저물어 바다 안개가 사방에 가득 끼자, 남은 적 20여 척은 밤을 틈타서 닻줄을 끊고 도망쳐 버렸다. 이 싸움에서는 적의 목 250여 급을 베었고, 물에 빠져 죽은 적은 또 그 숫자를 헤아릴 수도 없었으므로, 군성(軍聲, 군대의 소란스런 함성)이 크게 떨치었다.
이 안골포해전에서 적선 2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순신은 학익진으로 기동하다가 거북선을 포함하여 함선의 순번을 바꿔가며 좁은 안골포에 접근하여 근거리에서 함포사격을 가하였고, 적들은 함선을 후퇴시킬 곳이 없고, 죽거나 부상당한 병사들을 배 밖으로 내보내면서 새로운 조총수들이 배 안으로 들어와 이순신의 연합함대를 대응했는데, 사거리 제한 등으로 우리에게는 거의 손상을 줄 수 없었다.
영화 한산
한산대첩 속 거북선의 맹활약, 안골포해전
한편 적들에게 거북선의 출현(용의 출현)은 바다에서 귀신을 본 듯하였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후기까지도 일본인들은 거북선을 ‘사람을 잡는 기계’라고 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 측 기록인<고려선전기(高麗船戰記)>에는 ‘1592년(임진년) 7월 10일, 안골포해전에서 거북선이 일본 배에 3~5칸(5.4~9m)까지 접근한 상태에서 총통으로 대형 화살형 발사체(대장군전)를 쏘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큰 배 중에 3척은 메꾸라부네(盲船,장님배,거북선)인데, 철로 요해하고 있었다. 석화시·봉화시·안고식 화살촉 등을 쏘며, 오후6시까지 번갈아 달려들어 공격을 걸어와 망루로부터 복도, 방패까지 모조리 격파되고 말았다. ‘석화시’라고 하는 것은 길이가 5척 6촌에 달하는 견고한 나무기둥이며, ‘봉화시’의 끝은 철로 둥글게 든든히 붙인 것이다. 이와 같은 화살로 5칸, 혹은3칸 이내까지 접근해서 쏘았다.”
적들이 눈앞에 보이는 지근거리(5~9m)에서 적에게 총통을 통해 철전과 대장군전(봉화시)을 쏘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적을 궤멸시키는 거북선의 활약은 아군에게는 통쾌함을, 적군에게는 공포감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군성을 크게 떨치면서 수군의 사기가 충천해졌다.
다음으로“이순신의<장계(견내량파왜병장)>”에 나타난 안골포해전의 양상을 살펴보자.
(전략) 10일은 새벽에 배를 띄워<본도 우수사(이억기)는 안골포 바깥 바다의 가덕 변두리에 진(陣)치고 있다가, 우리가 만일 접전하면 복병을 남겨두고 급히 달려오라>고 약속하고, 신(이순신)은 함대를 거느리고 “학익진”을 형성하여 먼저 진격하고, 경상우수사(원균)는 신의 뒤를 따르게 하여 안골포에 이르러 선창을 바라본 즉, 왜 대선 21척, 중선 15척, 소선 6척(모두42척)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중에 3층으로 방이 마련된 대선 1척과 2층으로 된 대선 2척이 포구에서 밖을 향하여 떠 있었으며 ,그 나머지 배들은 물고기 비늘처럼 줄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포구의 지세가 좁고 앝아서 조수가 물러나면 육지가 드러날 것이므로 판옥선과 같은 대선은 용이하게 출입할 수 없어 여러 번이나 끌어내려고 하였습니다만 그들의 선운선 59척(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전선)을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남김없이 불태우고 목 베었기 때문에 형세가 궁해지면 육지로 오르려는 계획으로 험한 곳에 의거하여 배를 매어 둔 채 두렵게 여기며 겁내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지자·현자총통과 여러 가지 총통뿐 아니라 장·편전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히고 있을 무렵에 본도 우수사가 장수를 정하여 복병시켜 둔 뒤 급히 달려와서 합공하니, 군세가 더욱 강해져서 방이 있는 대선과 2층 대선을 타고 있던 왜적들은 거의 다 사상하였습니다.
병사들의 얘기를 적은 ‘이항복의 유사’와 비슷한 해전 양상의 전개이다. 하지만 이순신의 <장계>에는 디테일이 숨어있다. 안골포에 이르기 전 학익진(鶴翼陣) 진형을 형성하여 해상에서 장대한 군세의 위엄을 보이고, 적진 상황을 보고 타격을 위해 진입할 때는 차례를 나누어 긴 뱀처럼 장사진(長蛇陣)으로 쳐들어가서 함포 사정권에서 무차별 일제사격 후 복귀하는 전투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 또 싸움터의 형세와 적의 상황을 파악하고 작전을 변경하는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이순신을 본다. 옛날에 전쟁을 잘한다고 일컫는 자는 승리하되 쉽게 승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자가 승리를 한다는 것은 지혜롭다는 명성도 없고 용맹한 공적이라는 말도 따라붙지 않지만, 싸워서 승리하는 데는 어긋남이 없다. 곧 승리하는 군대는 먼저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갖추고 나서 싸움을 걸고[先勝求戰, 선승구전],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우고 난 이후에 승리를 구한다(김원중, ‘손자병법’, 124쪽).
7월 10일, 이순신의 안골포해전은 반나절 이상의 일방적인 공세를 취한 해전이었다. 이것은 적을 코너에 몰아놓고 일방적으로 난타를 하는 권투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이미 적은 그로기 상태인데도 이순신의 싸움은 그칠 줄 모른다.
그런데, 왜적들은 사상한 자를 낱낱이 끌어내어 소선으로 실어내고 다른 배의 왜적들을 소선에 옮겨 실어 층각대선으로 모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종일토록 하여 그 배들을 거의 다 깨뜨리자, 살아남은 왜적들은 모두 육지로 올라갔는데, 이 왜적을 다 사로잡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곳 백성들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자가 매우 많은데, 그 배들을 모조리 불살라서 궁지에 빠진 도적들이 되게 한다면 잠복해 있는 백성들이 비참한 살육을 면치 못할 것이므로 잠깐 1리쯤 물러나와 밤을 지냈습니다.
다음 날인 11일 새벽에 다시 돌아와 포위해 보았습니다만, 위의 왜적들이 허둥지둥 당황하여 닻줄을 끊고 밤을 이용하여 도망하였으므로 전에 싸움하던 곳을 탐색해보니, 위의 전사한 왜적들을 12곳에 모아 쌓고 불태웠는데, 거의 타다 남은 뼈다귀와 손발들이 흩어져 있고 그 포구 안팎에는 흘린 피가 땅에 가득하여 곳곳이 붉게 물들고 있었습니다. 도적들의 사상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후략)
한편, 이순신은 도적들이 함선을 포기하고 뭍으로 오르자 도적들을 피해 산골에 잠복해 있는 우리 백성들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그리하여 안골포에서 400m쯤 물러나와 독 안에 든 적들에게 도망갈 길을 터 준 것이다. (“용기가 있으면 밤을 틈타 도망가 봐라, 이놈들아.”) 이때까지도 이순신의 인식에는 왜군이 정예 수군들이 아닌 노략질하는 도적떼로 보였나보다. 임진년 이 시기는 초전 일본군의 육상에서의 승리를 바탕으로 왜구들이 해안지방에서 점차 서진하며 왕성하게 노략질을 하고 있었으니, 왜 수군이 아닌 도적(盜賊)이라는 이순신의 판단이 충분히 수긍이 간다.
전투가 끝난 다음날(7월 11일), 적들이 도주한 뒤에 안골포에 접근하여 그 해안을 살피니 송장을 태운 무덤이 12개나 발견되었다. 왜구들의 피해가 상당히 컸다. 이후 이순신은 외해로 나와 함선을 넓게 펼쳐서 마치 부산을 향해 진격할 듯한 위엄을 보이다가(허장성세) 밤이 되어서 함대를 뒤로 물렸다.
영화 한산
안골포해전, 왜적들은 귀신 같은 이순신과 거북선의 출현에 공포를 느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병법에 능한 이순신은 안골포해전에서 거북선과 판옥선의 장사진을 유지하며 좁은 수로를 따라 적선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하였으며, 각종 총통을 발사하여 화력을 집중시킴으로써 벌병을 통해 적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뛰어난 이순신의 용병술은 마치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에서 주된 받침돌을 빼는 것과 같았다. 적재적소를 노려서 힘들이지 않고 적을 제압하고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또 거북선은 귀신같았다. 혼자 있으면 도망치기 일쑤지만 한 곳에서 같이 힘을 모으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리를 절묘하게 응용한 ‘심리전선(心理戰船)’이었고, 적에게는 괴물체로 보이게 하여 공포심을 심어주는 심리전의 요체이자 최고의 용병술인 ‘벌모(伐謨)의 상징’이었다. 이렇듯 거북선의 운용은 왜적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고 아군의 적개심과 충천한 사기로 연결하는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이틀 전 한산해전에서 살아남은 적들(대장 와키자카)은 전선 대열의 후미에 있다가 꽁무니를 뺐기 때문에 우리 수군의 판옥선과 거북선의 전투 전술을 제대로 살펴볼 새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안골포해전을 통해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 등당고호) 등 일본 정예 수군들은 거북선의 실체와 천자·지자·현자총통 등 화포의 위력을 처음으로 느꼈을 것이고, 또 육지나 해상을 통해 살아 돌아간 자들은 귀신같은 거북선의 모습에 놀라고, 그 엄청난 파괴력과 전투력을 체감하며 또 죽어나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심각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영화 한산
끝으로, 이번 제3차 출전에서 한산해전이 해상전투의 압도적 승리를 통해 왜적들의 기세를 꺾었다면, 이틀 후의 안골포해전을 통해서 이순신은 빠져나오는 길이 없는 막다른 포구에서 도적들을 일방적으로 타격함으로써 손자병법의 ‘벌병(伐兵)’을 통해 그 상위의 용병, 곧 ‘벌모(伐謀)’를 달성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왜군들에게 조선 수군의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그리하여 이순신과 거북선의 출현(出現)은 적들의 지휘부에게는 “과연 조선 수군의 주장(主將)은 누구이기에 이러한 막강한 위력을 펼쳐 보이는가” 하면서 궁금증을 남겼을 것이다.
제3차 출전을 통해 ‘조선 수군의 리더십, 이순신’은 임기응변의 유인작전과 학익진, 그리고 귀신같은 거북선을 전선의 선두에 배치하여 신출귀몰하게 운용함으로써 적과의 해상전투뿐만 아니라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심리전(벌모)에서 승리하여 해전사에 빛나는 한산대첩(閑山大捷)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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