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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음날 Aug 09. 2023

30. 당신이라는 지독한 최면에서 벗어나라.

우리는 살아간다. 

아침에 눈을 뜨고 화장실을 가고 일과를 시작한다. 

오늘같이 평범한 수요일의 경우 보통은 생계를 위해 각자의 일터로 걸음을 옮긴다.

세수를 하고 눈곱을 뗀다.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거울을 한번 쓱 봐주고 어디선가 옷을 꺼내 입는다. 

구겨져 있던, 옷걸이에 걸려있던 인간다운 행색을 갖출 수 있는 최소한의 범주 안에서 패션을 선택한다.

오늘이 수요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지독히 평범한)하는 모양새를 가진 신발을 꺼내 신는다. 

오늘 하루 신발 위에 탑승한 채 무사히 종점으로 회귀하기만을 온전히 돌아오기만을 고대한다. 


'삐리릭'


요즘 문은 경첩의 마찰음이 아닌 전자식 기계음으로 대체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며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가?

스마트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 어디선가 올 메시지를 확인했는가. 

이렇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을 심각한 문제라도 되는 양 지적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당신의 아침이 단지 그것만으로 희망차지 못할 거라는 악담으로 마음에 상처를 더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에 앞서 아침을 깨우는 알람도 그랬다. 

단지 시간을 알려주었을 뿐이고 단지 메시지를 확인했을 뿐이다. 

그것이 다다.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에 몸을 싣거나 승용차를 이용해 일터로 향한다. 

아침 회의와 커피 한잔이 기다리리는가. 혹은 시끄러운 기계가 돌아가는 현장에 도착했는가. 

주어진 일, 성과, 반드시 해야 할 일, 점심시간이 다가온다.

꼴 보기 싫은 동료와 상사 파벌과 정치질에 시간 가는 줄 모를 다이내믹한 직장생활이 펼쳐지는가. 

아슬아슬 살얼음판을 걸으며 제발 오늘도 무사히 지나가길 염원하며 시간을 보내는가. 


'오늘일은 내일 걱정하자.'


대승적인 차원에서 통 크게 오늘의 과업을 미루며 퇴근을 감행한다. 

나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여유시간을 알차고 보내고 싶은 열망과는 다르게 몸은 어디를 향하는가. 

축구로 치면 인저리 타임 같지 않은가. 

분명 하루가 90분 밖에 되지는 않을 텐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5분 남짓으로 느껴지지 않는가. 

퇴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하릴없이 게임을 돌리며 심연 속의 심연으로 버려진 건 아닌가 하는 조바심을 느끼긴 했다. 

오늘도 장렬하고 비범하게 평범했다. 


"휴우우우우"


깊은 한숨이 들려온다. 

땅이 꺼져라 깊은 심호흡을 한번 갈겨주고 현관을 들어선다. 

이곳은 나의 꿈이 존재하지 않는 곳.

단지 잠을 자고 생활을 이어주는 곳인가. 나의 가족이 기다리는 아늑한 안식처인가. 

나의 결정과는 무관하게 이 집은 나에게 어떤 의미로 지금의 나를 맞이하는가. 

나는 내 집에 먹히러 가는가. 

내 집을 헤집으러 입장하는 것인가. 

나는 내일 아침 어떤 모습으로 뱉어내질 것인가. 


우리 삶은 어찌 보면 '다중 트랜스' 상태이다. 


어떤 일에 집중할 때 경험하는 현상으로, 변형된 의식상태 또는 초월적 의식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어,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거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바로 트랜스상태에 빠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 운전을 할 때, 무엇을 깊이 생각할 때 트랜스상태로 쉽게 몰입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몽환상태라고도 하며, 최면치료를 위한 필수조건이기도 하다. 트랜스상태에서는 무의식과의 접근이 상대적으로 용이하여 NLP 치료와 최면치료에서 변화와 치료적 효과를 위해 활용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트랜스 [trance] (상담학 사전, 2016. 01. 15., 김춘경, 이수연, 이윤주, 정종진, 최웅용)


위는 일반적인 일상 속에서 초월적인 의식상태로 진입했음을 '트랜스'라고 부르는 사전적 의미이다. 

가장 흔한 게 딴생각을 하면서 운전을 했는데 왔던 길이 전혀 기억나지 않고 신호를 지키며 온 것이다. 

빨간 신호등에 기가 막히게 섰지만 당신의 의지와 지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운전을 하며 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동 항법장치를 공짜로 내 몸과 뇌에 이식해 놓은 수준의 기능적 행태이다. 


'다중 트랜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심연 속의 심연

트랜스 속의 트랜스

인셉션의 꿈속의 꿈과 같은 경우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신의 삶은 트랜스 속에 이미 깊이 빠져있다. 

당신의 내면은 아노미 상태이지만 사회의 규범에 따라 아무런 저항 없이 하루를 살아간다.

이것은 내면의 본질적인 자아가 필연적으로 자신을 망각했을 때 발현되는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이며 대중적인 현상이다. 

의지를 놓아버린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고 자각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 당연한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당신이 의도하지 않는 습관적인 행동은 당신의 몸에 둘러진 강력한 사슬과도 같다. 

좀 더 잔인하게 이야기하자면 새끼 강아지로 태어난 당신의 목에 눈떠보니 걸려있는 목줄과 같은 것이다. 

그 목줄은 신체가 커짐에 따라 한 칸 한 칸 죽지 않을 만큼의 간격으로 커질 뿐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평생 당신의 몸을 뒷마당의 개집에서 반경 2미터 내외를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은 그 강아지가 세계여행을 가야 한다는 강박을 주장하려 함이 아니다. 

단지 그 강아지는 그 목줄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그 줄은 신체의 일부이다.'

'그 줄은 신의 계시이자 규율이다.'

'그 줄은 신체이며 하나이다. 불편함이라고는 전혀 없다.'


그 강아지와 그 목줄은 하나의 일체화된 의식이며 강아지의 영혼을 그려보아도 '목줄'이 함께 그려질 것이다. 

우리는 그 강아지의 목줄과 같은 일상의 습관들을 얼마나 인식하는가?

'전혀 인식하지 못하며 인식해야 한다는 이유 따위를 찾을 이유 혹은 자그마한 실마리도 찾지 못하고 죽을게 뻔하다.'

이것은 비의식적인 습관이 한 개인을 잠식하는 아주 온당한 결과이다. 

우리는 이렇게 상태 속의 상태를 찾아야만 하는 무한의 굴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만든 '최면의 상태'에 아주 강력하게 속박되어 있다. 

이것은 단지 알아챈다고 해결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내 목줄을 내가 발견했다고 해서 내가 내 목줄을 원하는 대로 이끈다고 목줄이 사라지지 않는다. 

상태 속의 상태, 심연 속의 심연, 꿈속의 꿈, 트랜스 속의 트랜스이다. 

지독한 최면 상태의 당신을 알아차리는 일은 단지 알아차림으로 진일보할 수 있지만 사실은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사실의 발견만으로 이미 도착했다는 것과 다름없는 발견도 있지만 아닌 경우도 간혹 있다. 

이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당신은 당신의 삶을 운행한다. 

운전하는 중이다. 하지만 인식하지 않고 위험을 회피하거나 빨간불에 멈춘다. 이것을 운명이나 운이라 칭하며 아무런 저항 감 없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 도로를 누비는 것이다. 


'운전을 하면서 동시에 핸들에 올려둔 스마트폰으로 레이싱 게임을 할 수 있을까?'


핸들은 하나인데 당신이 가야 할 '실제의 목적지'와 게임 속의 '가상의 목적지'를 동시에 컨트롤할 수는 없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결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 나아가야 하는 도로와 게임 속의 도로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으면 실제와 게임 속의 목적지에 동시 도착하지 못한다. 트랜스 상태는 게임 속의 길을 무의식 중에 현실과 동일하게 만들어주는 일이다. 이 방법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아주 특별한 꿈을 이루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불가능한 일을 이루는 방법 같겠지만 이는 불가능의 영역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살아가고 있는 삶과 매우 동일하며 실상은 우리의 삶 자체가 게임이라는 역행된 현실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핸들에 박힌 스마트폰 게임의 목적지가 현실이고 당신 자동차의 운전대가 게임이라면?)


'사는 대로 살아가면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게임 속의 목적지대로 핸들을 돌리면 사고가 날 것이다.'


의식적인 습관은 당신이라는 최면을 깨어나게 해주는 선택이다. 

거듭 강조한다. 

의식+습관이다. 

그동안의 트랜스 상태인 비의식의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 

당신의 비의식적인 트랜스 상태에서의 트랜스 상태로의 몰입은 당신에게 진귀한 경험이 될지는 몰라도 진정한 '방향성의 일치감'을 가져다 주진 못한다. 


당신의 인생이 그대로 흘러가는 것을 두 손 놓고 멍하니 바라보지 말라. 

폭우가 내린 이후 방류한 댐의 물줄기 같은 강렬한 물보라 속에 떠내려 가는 당신의 삶을 그냥 발만 동동 구르며 내버려 두지 말라는 것이다. 

하물며 당신은 발마저 구르지 않고 있다. 

평온하게 관조하는 것은 그 자리의 당신을 관조하라는 것이지 떠내려 가는 당신을 관조하라는 것이 아니라. 


행동은 사상을 부른다. 

우리가 의식 없이 이불을 개는 것과 의식과 목적을 가지고 이불을 개는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사상은 우리를 깨어나게 한다. 

깨우침은 배움으로 인한 지식의 취득과 합성이 아니다. 

나 스스로를 깨어내는 것이다. 

목줄을 깨어내는 것이며 나의 표피, 허상, 외면의 나약한 이끌림을 탈피하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행동을 유발하지만 실상 가장 작고 가벼운 행동들의 취합으로 이루어내는 것이다. 

물 한잔에도 감사하고 형편없는 식사에도 오늘 생명을 유지함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한 깨움의 상태로 진입하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주체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목줄을 없앨 수 있는 건 나 스스로 뿐이다. 


당신이 최면에 걸린 채 트랜스 상태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려야 한다. 

습관 하나하나를 의식과 결합하여 최면을 깨부수는 작업에 수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당신 인생의 주체성은 마음먹었다고 하루아침에 획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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