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매사에 감사만 하며 살 것인가?
인간이라면 당연지사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도 나온다. 하느님은 선한 사람 욥을 사탄으로 하여금 그를 시험에 들게 했다.
얼핏 보면 신의 노릇이 비열하기 짝이 없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또한 뜻이 있음에, 후대에 좋은 사례로 쓰기 위함이었다면 뭐 딱히 할 말은 없지 않은가.
인생사 새옹지마 참 쉽게도 쓰이는 사자성어 아니던가.
나 또한 자주 쓰는 말이 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고 나쁜 게 나쁜 게 아니더라.'
하물며 암도 어느 때에 따라서는 좋은 일이 될 거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희소한 일이며 암환우와 가족들을 욕보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말이 도망가고 재산이 날아가고 자식이 죽고 죽을병에 걸려 큰 고통에 시달리는 일이 과연 감사할 일이기는 할까.
시한부의 인생은 어떻고 불치병은 어떠한가.
이러한 일을 종교의 힘으로 감사의 대상으로 전환시키는 사람들을 보면 절로 경외감이 든다.
질병에 걸려 필멸의 상태에 갇힌 자신을 초월하는 행위는 기도로 고통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감사를 갖는 행위가 유일하다. 터진 입으로, 말로는 이러한 이론을 그럴듯하게 내놓을 수 있지만 진정한 환우의 입장이 아니기에 고개 숙여 송구하다. (제발 이러한 유형의 불행이 인생에 닥치지 않길 기도 하는 수 밖에는 없는 현실이 두렵기도 하다.)
너무나 극단적인 사례 같지만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작은 불평들을 예시로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명확하다.
라면을 끓이고 난 후 김치가 없어서 계란이 없어서 짜증을 부리거나 실망스러운 감정이 들 때가 있었는가?
라는 정도의 사례에서 핵심을 찾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칫 장난스러운 뉘앙스로 비칠까 그렇다.
우선은 라면을 끓일 물과 그릇, 연료가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라면이 있음에 구입할 돈이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오늘도 건강하게 팔다리를 움직여 라면을 자유롭게 끓일 수 있는 신체와 건강에 감사해야 한다.
라면을 먹을 수 있는 보통의 위장상태와 젊음에 감사해야 한다.
나이가 들면 인스턴트나 갑각류, 튀김류, 고기등을 잘 소화하지 못하거나 알레르기가 생기는 경우가 있다.
(나는 서른 후반 어느 날 갑자기 새우 알레르기가 생겼다.)
누군가는 점심을 라면으로 때웠다며 자신의 신세를 처량하게 여길지 모른다.
타인과의 비교는 불행을 부를 뿐이라지만 감사를 위해 비교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러한 비교는 권장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는 쌀이 없어 끼니를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고 제대로 된 주거환경에 거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다. 동네마다 있는 목욕탕은 공중위생을 위해 탄생했으며 1주 1회 목욕의 꿈을 이루기 위해 탄생한 것을 아는가. 목욕탕의 개수가 2003년이 최대치였다는 사실을 알면 상당히 의아할지도 모른다.
집집마다 샤워기가 있고 욕조가 있다 해도 목욕탕만의 커뮤니티성과 공중위생을 위한 공공성은 관성적으로 목욕탕의 개업을 부추겼다. (코로나로 인해 목욕탕은 급감한다.)
씻을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씻지 못하는 세대가 2023년에도 있다면 믿을 수 없다는 사람도 있다.
2022년의 기준이지만 약 28만 명의 아동이 돈이 없어 점심을 먹지 못한다.
복지의 사각지대와 노인 빈공층을 포함한다면 그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여름마다 쪽방촌의 수해와 무더위에 대해 보도한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푹신한 소파 위에서 인생을 비관하는 것은 사치스러운 유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감사에 대한 선택은 본인의 몫이다.
감사할 것인가. 불평할 것인가.
모든 것을 감사의 시각으로 전환하는 것은 숭고한 습관이요 상당한 저력이다.
감사하는 마음을 그 순간 기도와 동일한 상태로 우리를 만든다.
기도를 하는 순간 가장 큰 이득을 챙겨가는 것은 우리 본인 스스로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명상보다 기도보다 일상의 감사한 생각을 자주 하는 것은 우리를 선하게 만들고 정배열하게 한다.
감사는 나 스스로를 제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준다.
각성하고 스스로를 환기, 정화시키려는 사람은 매사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여라.
당신의 운명과 운은 감사함으로 인해 끌어당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