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은 후 아들과 가끔 산책을 나가곤 한다.
1만 보 걷기가 목표라며 스마트 워치를 차고 따라나서는 아들과의 산책은 그 자체로 굉장한 행복을 가져다준다.
어제는 평소처럼 아들과 아파트 후문 길을 나섰다.
첫 번째 사거리 신호등에서 아들이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인도와 아스팔트 경계에서 굴렀는데 만약 차라도 지나갔다면 하는 아찔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경미하게 무릎과 팔꿈치에 상처가 났다.
일으켜 세워 상태를 확인하고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집에 가 간단하게 소독을 하고 다시 집을 나섰다.
피가 나거나 하는 정도의 큰 상처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가지 못해 팔꿈치가 아프다며 산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나도 저녁 먹은 게 잘못된 것인지 배가 살살 아팠다.
우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상처에 붙일 밴드를 사고 토요일에 놀 물총을 사서 들어왔다.
나는 운동을 하지 못한 아쉬움에 쉽사리 하루를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 늦었지만 나 혼자라도 운동을 다녀오리라 다짐하고 다시금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서고 첫 번째 신호등을 건널 때였다.
좌회전 차량이 신호위반과 역주행을 하며 나의 앞을 스쳐 지나가듯 주행해 지나갔다.
너무 놀라면 생각회로가 멈추고 비명도 나오지 않지 않는가.
가던 길을 가다가 되돌아와 그 차량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가서 드잡이라도 하고 소리를 한껏 질러볼까 생각도 들었지만 참기로 했다.
요즘 같이 험한 세상에 해가 진 후 분쟁이 발생하는 것은 안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부글대는 속을 억누르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 한바탕 아내에게 일진이 사나웠음을 이야기하고는 샤워를 하고 책을 읽다가 쉬이 피곤해져 자리에 누웠다.
자리에 누워 나는 나의 행동이 꽤나 괜찮은 선택이었다는 것에 안위했다.
얼마 전 배운 '안배'라는 행위를 의식적으로 해낸 것이다.
당시 @themaf 님께 배운 '안배'는 뭘 해도 다 잘되는 날에는 베팅을 하고
뭘 해도 안되거나 불운이 겹치는 날에는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 쥐 죽은 듯 살라는 뜻이다.
이를 '안배'라는 단어로 풀어낸 사람도 그를 나에게 전달해 준 사람도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결국 3번의 경고를 받고 운동을 포기했다.
만약 이를 무시하고 산책을 하러 갔다 해도 나는 운동하는 내내 분노의 휩싸여 예민해진 상태로 걸어 다녔을 것이다. 혹은 사소한 문제(개똥을 밟는다 정도의)라도 만난다면 그것에 대한 후회와 분노도 크게 증폭될 것이 뻔했다. 이것은 막연한 불안과 있지도 않을 걱정을 미리 하는 것과는 결이 다른 선택에 관한 문제였다.
무엇이 더 나은가에 관한 선택에서 하나의 길을 더 열어둔 것이다.
운동을 한다. vs 운동을 하지 않는다. vs 전면 철수 후 하루를 안배한다.
(선택지가 하나 늘었을 뿐이지만 이것은 인생의 큰 비밀 열쇠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은 사례이긴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일을 인생에 대입해 볼 수 도 있겠다.
어떤 목표를 향해 나가는데 뭔가 말도 안 되는 위기가 닥쳐올 수도 있다.
그때마다 포기를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너무 이상한 일들이 연속해서 나에게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의 '경고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나 어제처럼 신체적인 위해가 자꾸만 일어나려는 경고음이 3회나 반복되었다는 것은 하루의 남은 일정을 전면 재검토해보라는 '계시' 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운의 흐름을 '역행'하는 일들이 반복해서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면 검토를 한 번쯤 고려해봐야 한다.
하루를 안배하듯 삶에 대한 장기적인 안배 또한 필요할 것이었다.
못 먹어도 고! 를 외치는 것과 죽어도 안될 일을 멱살 잡고 질질 끌고 가는 것의 도착점은 다를 수밖에 없다.
아집을 부려 안 되는 일을 목숨 걸고 완수해 낸다 해도 그것이 내면에 상처와 후회를 남긴다면 결국 도전은 허망한 것으로 자리 잡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상처를 경계해야 한다. 그런 상처는 종국에는 내면의 힘을 무너뜨리는 촉매로 작용한다. (그것이 내면이든 외면이든 상처는 상처다.)
한발 물러서 관조하며 사태를 판단해야 한다.
좋은 인생은 우리가 매일 하는 좋은 판단의 집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