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우연의 질병, 필연의 죽음>
우리는 최선을 선택하기 위해 정보를 찾고 의견을 묻고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
사례와 논리를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고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하며 효과적인 도구이자 세상의 난제를 풀어나갈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우리는 불확실성을 기피하고자 하며 미래에 대한 합리적 예측을 통해 스스로를 지키고자 한다. 그러는 동안 세계를 향한 믿음과 우연히 태어나는 ‘지금’에 몸을 내던질 용기를 망각하게 된다.
물론, 신중하고 합리적 예측을 하고자 하는 현상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는 ‘혹시 모르니까 보험을 들자’, ‘혹시 모르니까 하나 더 챙기자’와 같은 가끔 스스로를 현명하다 생각이 들게 할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있고. 더 나아가 ‘대학을 나오면 더 나은 일자리를 보장해 주니까’, ‘아직 꿈이 없다면 우선 공부부터 해보렴’과 같이 어른들의 지혜라며 오래도록 들어온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많은 상황에서 이 생각은 잘 맞아 든다.
우리는 이러한 사고방식이 제공한 안락함에 너무나도 도취하여 ‘남들은 하지 않는데 왜 그걸 하는 거지?’, ‘어차피 그럴 텐데’와 같이 방어적이며 미래를 좁혀 그리게 되기도 한다.
남들도 가보지 않았고, 예측되지 않는 미래는 두렵다.
쓴 이는 불분명한 이야기를 뚜렷하게 만들기 위해 극단적 상황을 가정하고 극단을 점차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모으는 시선으로 두 학자의 이야기를 바라보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의 등장인물이자 죽음을 앞둔 ‘이소노 마호’의 이야기는 ‘암’이라는 우연이지만 강력한 ‘죽음’ 즉, ‘극단’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사유를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연이 가득한 삶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에게 있어 가치있는 삶은 무엇인지 동료 ‘미야노 마키코’와 편지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 두 학자의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도 유효하며 두 가지의 가치에 대해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첫째는 ‘바람직한 나를 그리는 것’ 그리고 둘째는 ‘친구(관계)의 이유’이다.
죽음을 가까이 있다고 느낀 ‘이소노’씨는 모든 활동을 줄이곤 암울해한다.
아마도 강력한 병마 앞에서 한 인간이 하게 될 가장 높은 확률의 행동이다. 그에게 강력한 우연에 의해 극단의 암울함이 찾아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죽음 앞에서 그가 소심해진 것은 아마도 큰 재앙에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드는 무력감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좁혀 그리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불확실성을 기피하고자 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이 마주할 수 있는 거의 가장 극단일 것이다.
쉽게 말해 ‘어차피 그럴 텐데’라는 생각의 가장 극단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난 죽을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의 덜 극단적인 사고가 ‘어차피 그럴탠데’, ‘다들 그러던데’와 같은 흐름을 가진다.
모두 결론을 지어둔 흐름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좁혀 그리는 미래는 마치 안경 대신에 고깔콘을 쓴 사람과 같다.
생각의 시야를 좁히고 스스로를 바로 앞의 상황에 더 사로잡히게 한다.
‘이소노’씨에게 죽음이 그의 시야를 좁히고 상황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면, 우리가 방어적 태도로 미래를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흔히 ‘현실’이라고 말하는 사회가 우리의 시야를 좁히고 좀처럼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죽음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따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에 사로잡혀 시야가 좁아지곤 한다.
주어진 상황에서 벗어나는 일은 두렵고, 또 때로는 위험한 일이다. 결과적으로 이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 결정을 내리고자 하고, 우연이 가득한 ‘지금’에 몸을 던질 용기는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이소노’씨 이렇게 말한다.
“불운이라는 부조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인생을 고정한 순간 불행이라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라고.
우리는 필연적으로 주어진 상황을 벗어난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실존자로서 미래의 기투(project)에 따라서 선택을 통해 현재의 상황을 뛰어넘는 존재, ‘자유로운 존재라는 선고’를 받은 자라고 말한다.
우리는 스스로가 정의하는 ‘더 나은 존재’이길 희망하기에 하는 선택이 더 자연스러운 존재이다.
바라던 무언가를 성공했을 때, 내가 만들어낸 이유가 있는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가 단순히 남이 시킨, 나의 이유가 들어있지 않은 일을 할 때 보다 더욱 짜릿하고 행복하다 느끼지 않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선택하는 것도 선택이지만 인간은 선택을 통해 필연적으로 현재의 상황을 뛰어넘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자연스럽고 행복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은 내가 죽은 이후의 시간까지도 상정하는 희망이다.
때문에 우리의 선택은 더 나은 존재로서의 선택 그리고 그것이 선택이 멈추는 시점인 죽음의 문턱 앞에서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모습을 기투했을 때 ‘아쉬움’ 가득한 인간이 아니길 바라며 선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선택은 생물학적 죽음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일시적 죽음’을 생각해 보아도 이 선택은 바람직하다.
‘일시적 죽음’이란 쉽게 말해 상대방과 내가 상호작용하고 있지 않을 때이다.
이 기간은 나의 선택과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모습이 상대방에게 미치지 않아서 상대방이 그리는 나의 모습이 멈춰있을 때이다. 이때 나는 잠시 죽어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의 모습이 멈춰있다는 점에서 죽음과 동일하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주변을 의식하고 사회에서 좋은 상호작용을 하길 바란다.
이러한 바람을 희망하는 관점에서라도 ‘더 나은 존재’로의 선택은 바람직하다.
결과적으로 생물학적 죽음이든 일시적인 죽음이든 ‘더 나은 존재’를 고민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적극적인 사유를 하지 않는 것 즉, 이런 저런 이유로 또는 남들이 그러했으니까 라는 이유로 미래를 좁혀 그리는 행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소노씨는 결국 미래를 좁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미래를 넓히는 방향으로 가닥을 다 잡는다. 다시 강연을 열고 저술 활동을 이어 나간다.
다시 넓혀나간 미래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저는 바람직하게 연결될 뿐인 점으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저에게 여력이 있는 한 세계를 지각하고 그 세계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계속 선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러다 만나는 다른 선과 새로운 선을 엮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이소노씨가 무너지는 자신을 다잡고 다시 자신의 세상을 넓힐 수 있는 것에는 그의 친구가 되어준 공동 저자 ‘미야노 마키코’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키코’씨의 말을 빌리자면 친구와의 대화에는 ‘여지’가 존재한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여분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아니라 대화가 넓어질 여지를 만들어낸다.
만나서 편안한 친구 오래가는 친구와의 대화는 이러하다. 친구와의 대화는 정리되어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대화에서 문득 번뜩인 생각이 연상을 일으키고, 서로가 더욱 잘 알게 되는 것 또 이런저런 요소가 뒤섞이면서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정을 최고의 덕으로 높이면서 우정을 가지로 나눈다. ‘쾌락(즐거움)’을 위한 우정, ‘유익함’을 위한 우정, ‘덕’을 주고받는 우정. 그중에서 우정을 나누는 서로가 참되어 ‘덕’을 주고받는 우정을 지속 가능한 우정, 참된 우정이라 일컫는다.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편지의 다수는 그저 평범한 대화이다. 어딘가를 놀러 갔다는 이야기, 어떤 것을 보았는데 놀라웠다는 이야기 그저 ‘친구와의 대화’이다 깊은 사유는 일부에서 나타난다.
평범한 나의 일상을 나누면서도 때로는 깊은 고뇌를 공유하는 그 둘의 모습에서 보인 것은 참된 우정의 친구이다.
앞서 쓴 이는 ‘현실’이라고 말하는 사회가 또는 지금 당장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현실)에 사로잡혀 시야가 좁아지곤 좀처럼 그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였다.
놓인 현실 앞에서 압도되는 것은 인간의 나약한 본모습 중 하나일 것이다.
상황에 한 발짝 떨어져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러지 못한다.
‘이소노’씨는 현실에 압도된 자신의 모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차례차례 들이닥치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현실은 차례차례 일어나는 것이 확실하지만 언제 일어날지는 잘 모르는 그리고 혹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심각해지는 병세‘, 그리고 ’죽음‘이었다.
현실 앞에서 더 이상 미래를 그릴 수 없을 때, 더 이상 그릴 힘도 남아있지 못할 때 우리는 무너진다.
불가항력적인 힘에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이소노‘씨는 다시 자신의 세상을 넓힐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은 그가 ’마키코‘씨를 비롯하여 그의 인간 관계 속의 친구들과의 대화로 스스로를 한 발짝 현실에서 때어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쓴 이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갑자기 병세가 악화될지도 모릅니다‘에서 ’지금 무엇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한지‘ 그리고 둘 간의 멈추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나아간다. 몇 개월 상간의 10번의 편지의 주고 받음 속에서 서로가 친구로서 일상을 나누며 때로는 각자의 고민과 생각을 나누며 발전한다.
그들이 대화에서 보이는 친구의 이유는 잠시 현실에서 벗어나 틈 많은 대화 속에 담긴 서로의 색채가 서로룰 물들이며 영감을 주는 것이다.
친구가 없었다면 이 압도적인 현실 속에서 고통만이 가득하며 새로운 미래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친구, 가족, 연인 이렇게 우정을 나누는 존재와의 상호작용은 잠시 현실에서 벗어남으로 우리는 다시 현실에 뛰어들 힘을 충전해 주기도 한다.
때로는 친구가 삶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소노‘씨는 약속을 이렇게 정의한다.
’약속‘은 친구가 희망하고 또 내가 보길 바라는 미래를 향한 도박이자, 미래를 향한 모험을 포기하지 않고 나아가겠다는 각오.
참된 우정의 친구와의 약속은 미래를 향해 나아갈 용기와 이유를 만들어준다.
거창한 약속을 말하는 건 아니다.
내일 만날 나의 친구와의 저녁 약속을 위해 오늘 열심히 일하게 하는 것마저도 하루를 알차게 살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소노‘씨는 우연으로 발생한 암이라는 압도적인 현실에서 필연의 죽음을 가까이 바라보게 된다.
대다수의 사람에게 멀게만 느껴지는 죽음을 보다 가까이 경험한 그가 ’마키코‘씨와 나눈 대화는 단순히 죽음 앞에서 갑자기 소중하게 느껴지는 삶이 아니라 삶의 시간을 어떻게 가치 있게 보낼 것인지 탐구한다.
죽은 자는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변화시키지 못한다.
다만, 살아있는 동안에 스스로를 뚜렷하게 만들어둔 자는 적어도 한동안은 자신이 원하는 그 모습으로 세상에 남아있을 것이다.
물론, 죽음 이후에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에 허무를 느낄 수 있지만. 그 마지막 순간에 끝매듭이 아름답길 원하는 것은 누구나 같은 생각이지 않는가.
충분히 생각하고 스스로를 꾸려나간 자가 마지막에 할 이야기는 열심히 살았다 일 것이고. 충분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쉬움이 가능한 채로 마지막의 모습을 남길 것이다.
이 구절을 끝으로 마치고자 한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 - 티모테오 2서 4장 7절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에게]
쓴이는 책을 모두 읽어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보길 권한다. 이 책은 차근 차근 쌓아올린 반듯한 건축물 같은 것이 아니라 계속 읽다보니 조용히 스며들어 색이 진해지는 그런 매력이 있다.
[제목에 관하여]
제목은 딜런 토마스의 시 ‘Do not go gentle into that good night’를 번역한 것이다. 인터스텔라에서 인용되기도 하였으며 순순히 죽음으로의 수순을 밟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생명의 가치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나의 삶의 지향점을 잘 나타낼 수 있다 생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