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명징한 이상을 그리십시오
이 글의 제목은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를 약간 수정했다.
"각하, 문학을 읽으십시오"이라는 글은 '얀 마텔'이 자국 수상에게 4년 동안 각종 문학을 추천하는 편지를 엮은 "101 Letters to Prime Minister"의 한국판 제목이다.
얀 마텔은 자국 수상에게 문학을 권하는 이유로 다음을 들었다.
"픽션을 읽으십시오.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모든 정치인이 원하는 것이 새로운 세계, 더 나은 세계를 이룩하는 게 아닙니까?"
전쟁과도 같은 정치에서 잠시 벗어나
정재되고 이상적인 세상, 혼돈 그 자체의 세상, 슬픔만이 가득한 세상..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또는 상상할 수 없든 세상에 이끌어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정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테다.
사람은 제각기 동떨어진 세상에서 각자의 시선으로 살아간다.
더군다나 개인의 개성이, 자유의사가 중요한 현대사회에서 각자만의 가치관은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다.
모두가 자신의 환경, 자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언어를 구축한다.
때문에 가끔 우리는 각자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다.
인문 전공자와 공학 전공자가 서로가 각기 다른 어휘로 말할 때 소통에 장애를 겪듯이
각기 다른 세계관의 우리들은
조금씩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모두 경험하며 공통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경험과 감정이다.
우리는 예시를 통해 설명할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그들의 경험이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감동'한다.
형언할 수 없지만 그 글이, 그 작품이, 그 경험이 입체적으로 나에게 와닿는다.
그리고 비로소 우리는 '이해'한다.
예를 들어
내가 정말 마음을 바쳐 한 일에 좋은 결과가 돌아올 때
한편의 뭉클함이, 따듯함이, 후련함이 남아있지 않는가.
그 사건에 대하여 나의 경험과 감정이 엮여 있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누군가와 같이 한 일이라면 두 사람은 비슷한 감정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하지만
실제로 경험하지 않아도 이러한 감정의 경험을 할 때가 있다.
이따금 말로는 이해 가지 않던 것들이, 영상으로 잘 이해가 가던 때가 있지 않은가.
때로 누군가는 영화를 보곤 한없이 울기도 한다.
마치 나의 일인 양.
다시 말해
나와 저 사람의 간극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이 매개체가 바로 경험과 감정이다.
나는 한 번 도 경험해 보지도, 상상해 보지 않은 것들을
인문학을 통해 상상하고 경험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세상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음을 깨닫고,
이런 일엔 나는 이렇게 해야지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고,
도저히 이해 가지 않는 사람의 마음도 잠시나마 헤아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상상을 통한 간접적 경험은
어린아이는 '멋있는 자신의 미래'를,
공학자는 '세상을 멋있게 만들어줄 기술'을,
정치가는 '세상을 이롭게 만들 정치'를,
한 아이의 부모님은 '아름다운 가정과 아이의 육아를'을
상상하고 경험하여 나만의 미래를 창조한다.
때로는 나를 잠시 멀리서 떨어져 볼 수 있게 한다.
소설책 속 주인공과 내가 같아 보이거나,
이 글 속에서 어떤 것이 나의 상황과 비슷해 보인다거나.
남이 나에 대해 이야기해 주듯 나도 모르게 내 모습을 인문학 속에서 발견한다.
책이라 가정한다면
단돈 만 원에,
몇 개월을 통해 얻어야 하는 실제 경험과는 다르게 단 몇 주 만에,
그리고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사물 안에
무한에 가까운 상상과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인문학은 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누군가는 글을 읽다가도 울지만,
누군가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울지 않는다.
글에 큰 감동을 느끼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그 글을 보고 내면에서 상상을 펼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상상의 해상도가 낮기 때문에 나의 경험과 감정에 잘 동화되지 않는다.
그것을 조금 더 쉽게 도와주는 것이 영화와 같은 시각 매체이다.
시각 매체로 나는 내면의 상상을 펼치지 않아도 된다.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이 상상에 경험과 감정이 동화된다.
우리는 작은 것에도 깊게 공감하기 위하여
훈련이 필요하다.
높은 감정의 공감의 해상도로 각자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사람이 많아져야 한다.
인문학을 통해 감정의 동화와 이해를 이룰 수 있다 하였다.
이것은 그냥 단순한 '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밀도 있고, 날카로운 사람이 되고자 함에 있고,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사람이 되고자 함에 있다.
인간은 '자기 오류적 존재'이다.
스스로 끊임없이 오류를 범하는 존재이다.
이를 고쳐내는 요건의 가장 중요한 점은
반복되는 성찰에 있다.
성찰을 아주 거창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자.
누군가를 보고 그 사람의 행동이나 습관에 감명받아 나 또한 저렇게 되어보고자 하는 것도 성찰이다.
중요한 것은
나 이외의 것을 이해하고 공감하여 받아들일 수 있느냐 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문학의 경험은 물리적 제한을 벗어난다.
더 넓게 상상하여,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인문학을 통한 넒은 이해와 공감은
물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로 나를 성찰하게 하고, 성장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성찰을 넘어 사고의 확장에 기여한다.
누구보다도 더 많은 상황을 상상해 보았을 사람의 대처 능력은 능숙할 것이고,
거인의 어깨 위에서 상상해온 사람의 상상력은 더욱 높을 것이다.
[높은 자리의 사람일수록]
스스로가 자기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고, 항상 높고 곧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리더가 해야 할 것 중 하나는
리더가 이끄는 공동체에 명징한 방향성을 주어 혼란을 줄이고 합심하게 하는 것이다.
"항상 스스로가 올바르고 명징한 방향을 제시하는 것"
한 편에 완전하게 기울어 그곳을 향하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고민할 것들도 줄어들고, 표를 얻는 곳도 명확하다.
쉽다.
하지만 리더는 그렇게 해선 안된다.
때묻지 않은 순수한 상상력을 통해 순수한 방향성을 확신해야 한다.
올바른 방향성을 제시하기 위해
리더는 항상 이해와 공감을 해야 한다.
계속된 자기 성찰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를 올바른 자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얀 마텔은 자국 수상에게 문학을 권한 것이다.
넓고 때묻지 않은 상상력으로 미래를 그리고,
때로는 문학 속 이야기에 자신을 투영하여 스스로를 성찰해야 하기에.
[인문학을 모두(개인)가 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리더가 아니라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개인주의라는 이름을 쓴 사회적 감수성의 소멸로 인해
(개인주의가 사회적 감수성의 소멸로 이어질 이유가 없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다.)
공동체 속 서로의 이해의 밀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낮다.
사람에게 있어 이해와 공감의 능력은
스펀지 또는 댐퍼의 역할을 한다.
건물의 층 사이엔 댐퍼라는 부품이 들어간다.
이 댐퍼는 각 층에서 발생하는 도움을 흡수하여 다른 층으로 넘어가지 않게 한다.
우리는 대화해야 한다.
다름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한다.
다름의 인정 후에
대화를 하고 좋은 여론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다름을 '인지'하는 것은 잘한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그렇기에 '너와 나는 다르니 불편해',
'너와 나는 다르니 배척되어야 해'와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무엇이든 한 쪽에 기우는 결정은 고려할 것이 적어지기에 쉽다.
힘들고 어렵지만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 훈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나와는 다른 것이 있다는 경험을 많이 하는 것이다.
인문학의 장점은 물리의 한계를 뛰어넘어
상상하고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폭넓은 경험을 할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정해진 것은 없으며, 원래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한국과 서양의 신체적 '미'의 기준은 마른 몸에 가깝지만
아프리카 니제르의 신체적 '미'의 기준은 과체중일수록 아름다운 몸이다.
노동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마른 몸인데
노동하지 않는 몸은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과체중에 가까운 몸은 더욱 높게 평가받는다.
서양의 문화가 그렇다는 거지 원래 그런 것은 없다.
이렇게 다른 것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나와의 다른 무언가에 대한 거부반응이 적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쉽게 이것을 인정할 수 있다.
이렇게 대화의 바탕이 마련되는 것이다.
우리는 technology를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경향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기술을 만든 이유를 잘 알아야 한다.
자연을 이성으로써 관리하여
날것의 자연에서 오는 생명의 위협에서 벗어나고자 함에 있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이 좋은 삶을 영위하고자 함에서 시작한 것이다.
좋은 삶의 기준은 모두가 다르지만
결국 좋은 삶의 의미를 찾고 행함에 있어서 인문학이 필요함은 바뀌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