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친정
여자가 결혼했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 있다. 바로 ‘우리 집’을 ‘친정’이라고 부르는 순간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우리 집은 분명 엄마아빠와 살던 그 집이었는데,
느닷없이 남편과 사는 새집이 우리 집이 된다. 처음엔 낯설다.
핸드폰에 우리 집 전화번호를 새로 등록하면서는 이런 고민도 했다. 먼저 저장 되어 있던 ‘우리 집’은 ‘친정’으로 바꿀까, 아니면 ‘우리 집2’로 바꿀까? 뭔가 옛날 우리 집에 괜히 미안하고 서운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참 희한하다. 금세 새 보금자리가 ‘우리 집’이 되고, ‘우리 집2’는 ‘친정’이 된다.
친정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부터 21년을 산 집이고, 새로운 우리 집은 이제 막 3달 정도 살았을 때였나.
친정에 놀러갔다가 자고가라는 아빠 말에 나는 대답하고 있었다.
“아냐~ 우리 집 가서 잘게요.”
그렇다고 친정이 남의 집이 됐다는 건 물론 아니다. 사람들이 흔히 쓰는 친정의 의미만 봐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회사를 옮긴 사람이 좋아하던 옛 동료들 사이에 있을 때 말한다.
“꼭 친정 온 것 같이 좋아요.”
마음깊이 좋고 편안한 사람의 집에 있을 때도 이렇게 말한다.
“여기 있으면 꼭 친정 온 것 같아.”
친정은 그런 의미다. 나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놓은 곳. 내 추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
특히 21년이란 세월을 이사도 안 가고 한 집서 살았으니, 더 얘기해서 뭐할까.
말 그대로 내 인생이 녹아있는 집이다.
우리가족은 이사하는 걸 안 좋아했다. 물론 다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이사를 하지, 좋아서 하는 사람이야 없겠지마는. 그런 우리가족이 이사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 생겼다. 한바탕 거대한 물난리가 우리를 휩쓸고 간 것이다. 단독주택에 살던 우리 집은 물에 둥둥 떠내려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집 빼고 모든 게 다 떠내려갔다.
2층집 사는 이웃 아줌마 집으로 대피했다가 다시 우리 집으로 내려온 날, 집 안엔 정말이지 시멘트벽과 바닥. 그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어린 언니와 난, 그게 재밌다고 방방 뛰어다녔다.
텅텅 빈 집 안에서 스티로폼을 깔고 자면서 그게 또 웃기다고 깔깔대던 우리였다.
그 무렵 엄마는 평소의 열배는 더 열심히 살았다. 대신 자신을 위한 것은 양말 한 짝도 사지 않았다.
유일한 사치였다면 크리스마스 선물로 우리에게 사 준 작은 요정 바구니 하나씩이었다.
그 무렵 아빠의 책상 위엔 늘 ‘신념의 마력’이란 책이 놓여 있었다.
지갑 속엔 ‘당첨’이라고 쓴 종이를 늘 지니고 다녔다.
특별한 종교도 없는 엄마아빠가 우리 가족의 인생에 마법을 건 순간이었다.
처음 아파트가 당첨되어 지금의 친정으로 이사 오던 날을 평생 잊지 못한다. 밤새 엄마아빠의 말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왔고, 해 뜰 무렵 새 집으로 향하는 차 안에는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대는 우리가 있었다.
주말연속극 한 장면처럼 행복한 순간이었다.
얼마 전, 친정에 놀러갔을 때 오랜만에 집 앞 슈퍼에 들렀다. 그 슈퍼도 집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했고, 당연히 그런 곳은 ‘편의점’이 아니라 ‘슈퍼’여야 한다. 슈퍼 아저씨는 나를 보더니 눈이 동그래지며
“아니, 이렇게 반가울 때가!” 라는 연극 대사 같은 말을 한다. ‘어떻게 지내’ ‘지금은 어디에 살어’ 이런 물음 한마디 없이 연신 “너무 반갑다 진짜” 하시는데 괜히 눈물이 핑 돌며 찡하다.
한 자리에 그냥 있는 것. 그것만으로 큰 의미가 된다.
떠올리기만 해도 위로가 되는 뭔가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집이 있을 것이다.
떠올리면 눈부터 감게 되는 집.
푸른 바닷물에 뛰어든 것처럼 끝은 알 수 없고 아득해지는 기억 속,
옛날에 살던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