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주자 회의가 열렸다
두 장 짜리 노트호스텔에 사는 문장들이 입주자 회의를 열었다.
호스텔이란 자고로 들어온 문장이 있으면 여독만 좀 풀고 금세 나가는 문장들이 있고, 또 새로운 문장들이 들어오며 계속해서 회전되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런데 이들이 입주자로 오래 눌러앉아 대책 회의까지 연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듣자 하니 건물주가 영 자기 문장을 안 쓰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방에 묵는 문장들은 건물주가 본인을 읽고 스스로 새 문장을 써내야만 다음 여행지를 향해 떠날 수가 있다. 건물주인 정마고씨는 지난 몇 달간 부끄러움과 부담감, 코어 근육 부족 등을 이유로 이 문장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이다.
A동에는 총 네 문장이 묵고 있다. 모두 예술계 인사들이다. 그중 185와 402는 같은 고향에서 올라왔다. 두 친구는 무표정하고 차분한 얼굴로 제법 잔인한 말을 갈기는 것이 특징이다. 건물주 마고는 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 세계를 정확히 재연하고 있다면서 이 두 친구에게 방을 내줬다. 하지만 마고씨는 틀렸다. 사실 두 친구의 나이는 74세이기 때문에 완전히 거꾸로인 것이다. 현실이 두 친구를 정확히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맞다.
공로 또는 육로로 보내오는 구호물자와 함께, 매일 저녁 전파를 타고 혹은 신문에 실려서 동정 또는 찬양으로 가득한 논평들이 고립되어 버린 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들의 그 서사시 투 혹은 수상식의 연설 투가 의사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마음씨가 거짓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를 인류 전체와 연결해주는 그 무엇을 표현하고자 할 때에 쓰는 상투적인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언어는, 예를 들어 페스트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랑 같은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저히 설명해줄 수 없는 까닭에, 그랑이 기울이는 매일매일의 사소한 노력을 표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은 것이다. (...) 리유는 생각했다. '천만의 말씀. 함께 사랑하든가 함께 죽든가 해야지. 그 이외의 방법은 없어. 그들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니.' <페스트, 알베르 카뮈>, 185p.
시내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리유는 그러한 환희가 항상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 기쁨에 들떠있는 군중이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 간 기구나 옷가지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방이나 지하실이나 트렁크나 손수건이나 낡은 서류 같은 것들 속에서 꾸준히 살아남아 있다가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안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를 흔들어 깨워서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스트, 알베르 카뮈>, 402p.
그 아랫 방의 169는 화염처럼 타오르는 사랑을 하는 소녀다. 마고씨는 사랑은 모름지기 좀 미친놈처럼 해야 한다는 주의다. 그래서 그녀에게 선뜻 방 열쇠를 건넸다. 169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다정한 모습을 봤을 때, 이런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건물주는 그녀의 '입 속이 재로 가득 차 버린' 느낌이 뭔지 너무 알 것 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장면은 프랜시스에게 기이한 영향을 끼쳤다. 불현듯 외로워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외로웠다. 자기 침실로 살금살금 들어간 프랜시스는 촛불도 켜지 않은 채 옷을 벗고 웅크려 누워, 고통의 소용돌이에서 허우적거렸다. 자신이 살아봤자 뭐하나 싶었다. 심장이 바싹 말라비틀어진 것 같았다. 말린 자두처럼, 화석처럼, 석탄이 다 타고 남은 단단한 덩어리처럼. 입 속이 재로 가득 차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절망적이고 허망했다. <게스트, 사라 워터스>, 169p.
5는 숫기 없는 아저씨다. 삐쩍 마른 몸에 늘 갈색 리넨 재킷 차림새다. 건물주는 이 사람이 입을 열어 최초로 꺼낸 말이 그 후에 나눴던 어떤 대화보다 좋았다고 회상했다. 아마 이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이 모두에게 한 명씩은 있거나, 곧 있게 될 거라고 덧붙였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문재>, 5p.
매일 죽상으로 지나다니는 A동 문장들에 비해 B동 인사들은 조금 더 활기와 삶의 의욕이 있는 편이다. B동에는 총 네 문장이 살고 있다. 건물주는 꼭대기 층의 빛나는 무테안경을 쓴 687과 말하고 있으면 일상의 전쟁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다.
정치적인 행동을 하려면 우선 우리 정치 공동체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가 '우리'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올해 8월에는 경기도가 코로나 19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에서 외국인을 제외했습니다. (...) 경계 문제가 정치의 갈등 축이 되는 사례입니다. 경계 문제에서 유권자들은 '우리'의 경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놓고 갈라집니다. 20세기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선 문제는 인종이었습니다. 21세기 선진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경계선 문제는 이민입니다. 이민은 인종과 종교가 뒤엉켜 있는 경계 문제의 정수입니다. <시사인 687호, 천관율, '트럼프는 가도 트럼프 시대는 남는다'>
핫핑크 복장의 693은 딱딱한 정장도 자기 식으로 고쳐 입는 멋쟁이다. 그녀는 어떤 엄숙한 자리에서도 자기 자신으로 편하게 있을 줄 알고, 어느 누구에게나 쉽게 진실을 말해주기 때문에 마고씨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성실한 문장이지만 여전히 보헤미안인 그녀는 그 누구보다 얼른 이 호스텔을 탈출하고 싶어 한다.
선생님, 마스크 올리세요. (...) 경고하는 어린이의 목소리가 너무나 단호하여서 나는 지난 1년 간 국가와 학교와 가정이 어린이에게 제한한 것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린이는 줄어든 선택지를 순순히 받아들였고 그래서 내게도 단호히 요구한 것인지 모른다. 눈 밑까지 마스크를 덮어쓴 채로 나는 묻고 싶었다. 얘들아 우리, 얼굴을 가리고도 어떻게 가까워질 수 있을까. 닿지 않고도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이제 다들 만남의 발명가가 되어야 했다. <시사인 693호, 이슬아, '얼굴을 가진 발명가'>
18과 26은 같은 동네에서 왔다. 언제쯤 사랑의 정의 같은 걸 생각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건물주가 이 둘과 이야기를 나눈 지는 어느덧 5년이 되었는데 매번 너무 재밌으면서도 동시에 너무 싫다고 했다. 주변에 제일 사랑이 많은 사람을 떠올려봐라. 보통 그런 사람들은 사랑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고, 또 그가 자신이 그 누군가의 사랑을 받을만한 타당한 원인을 제공한다고 믿는다면, 그는 자부심을 느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상상하되, 그가 그 사랑에 어떤 원인도 제공한 바가 없다고 믿는 겨우, 그는 그 사랑에 대한 응답으로 그 누군가를 사랑할 것이다." - 스피노자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18p.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믿고 격렬해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 지가 중요한 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 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정확한 사랑의 실험, 신형철>, 26p.
여하튼 A동과 B동의 이 말 많은 문장들은 입주 회의 시간의 9할을 건물주 욕만 실컷 하다가 마지막 10분을 남겨두고 대충 결론을 내렸다. 이놈의 건물주는 쓰라고 백 번 천 번 말하고 칼을 목에 들이밀어도 억지로 쓸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문장들은 일단 건물주에게 1) 매일 2리터의 물을 마시게 하고 2) 8시간의 잠을 자라고 하며 3) 30분의 코어 근육 운동을 시켜보기로 했다.
그게 본인들의 탈주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입주 회의 때 나온 결론을 대자보에 적어 호스텔 대문에 붙이기로 하고 다시 각자의 네모난 방으로 돌아가 조용히 누웠다. 건물주 마고씨가 문장들의 농성에 떠밀려 자신의 글을 써낼 수 있게 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물건의 장점 : 포스트잇으로 각 도시의 컬러를 담은 컬렉션을 기획한 담당자는 누구일까? 인센티브 때려야만. 나 같은 오타쿠는 참지를 못하고 모든 도시 컬렉션을 구매하고 만다. 덕분에 포스트잇을 올려둘 엄청난 길이의 나무 트레이를 손수 제작하기까지 했다. 서울컬렉션도 있어서(무지개떡 조합이지만) 케이팝 종주국 시민으로서 아주 뿌듯했다.
물건의 단점 : 3M 다니는 사람이 있으면 보시오. 글씨를 쓰는 것 이외에 다른 용도가 없는 포스트잇의 종이 재질이 왜 천 원짜리 노트보다 못한 것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너무 사랑해서 그래요. 제발 저의 펜이 부드럽게 미끄러지고 잉크를 순식간에 빨아 당기는 프리미엄 포스트잇을 발매해주세요. 얼마라도 사겠습니다. 알겠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