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생각하고 쓰고 (32) - 먼 북소리
“나이를 먹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다. 나이를 먹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니다. 누구나 나이는 먹는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어느 한 시기에 달성해야 할 무엇인가를 달성하지 않은 채로 세월을 헛되이 보내는 것이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나는 마흔이 되기 전에 소설을 두 편 썼으면 하고 생각한다. 아니 생각한다기보다는 써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매우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 일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을 쓰면 좋을지 어떻게 써야 할지는 대강 알고 있다. 그런데도 시작할 수가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대로 영원히 쓸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매일 계속해서 소설을 쓰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때때로 자신의 뼈를 깎고 근육을 씹어 먹는 것 같은 기분조차 들었다. 그렇지만 쓰지 않는 것은 더 고통스러웠다. 글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글은 써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그 세계에 자신을 몰입시키는 집중력, 그리고 그 집중력을 가능한 한 길게 지속시키는 힘이다. 그렇게 하면 어느 시점에서 그 고통은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을 믿는 것. 나는 이것을 완성시킬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이 중요하다.”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같다. 소설을 쓰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 죽고 싶지 않다라고 계속 생각한다. 적어도 그 소설을 무사히 끝마칠 때까지는 절대로 죽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을 완성하지 않은 채 도중에 죽게 되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분하다. 어쩌면 이것은 문학사에 남을 훌륭한 작품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것은 나 자신이다.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그 소설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내 인생은 정확하게는 이미 내 인생이 아닌 것이다.”
“내 존재를 증명하려면 살아가면서 계속 글을 쓰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잃고, 세상에서 끊임없이 미움받는 것을 의미한다 해도 나는 역시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나라는 인간이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다.”
멋쩍은 얘기 하나. 하루키가 했다는 말을 지난번 썬파클 북토크에서 인용한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출처라는 <먼 북소리>에는 정작 해당 문구를 찾을 수 없다.
문제의(?) 문장은 이렇다.
“뛰어가려면 늦지 않게 가고, 어차피 늦을 거라면 뛰어가지 마라. 후회할 거라면 그렇게 살지 말고, 그렇게 살 거라면 절대 후회하지 마라.”
결국 멋진 문구라고 노트에 적어놓고 출처 확인을 미처 하지 않은 내 탓이다. 반성하는 의미에서 남겨놓는다. 여러분 저 문구는 ‘먼 북소리’에 없습니다. 아마도 오래된 격언인데 달리기를 좋아하는 하루키가 자연스레 연상되어 퍼진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유럽 여행기로만 알고 있었던 ‘먼 북소리’를 각 잡고 정독하게 되었는데… 거기엔 마흔에 막 접어든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었다. 소설가로서 그리고 번역가로서 일본 문단과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던 삼십 대 후반의 청년 하루키는 소설 두 편을 완성시키기 위해 일본을 떠나 유럽에서 아내와 함께 3년간의 시간을 보낸다. 팔자 좋은 유럽살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통신이 불편하던 시절이다. (이탈리아 우편 시스템을 저주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소설 쓰기라는 본업을 위해 본국의 소음을 피해 스스로를 낯선 환경에 가둔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서른일곱에서 마흔에 이르는 그 3년간 하루키는 본인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와 ‘댄스 댄스 댄스’를 완성해 낸다. ‘먼 북소리’는 알고 보니 그 두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머물던 이탈리아와 그리스 생활을 담은 한 편의 긴 저자 후기이기도 했다.
계기는 아이러니했으나, 덕분에 마흔의 하루키를 만날 수 있어서 좋았던 시간이었다. 중간중간 시답잖은 농담에 킥킥거리다가도, 글쓰기에 진심인 그의 산문을 읽으면서 나는 내 본업에 얼마나 진심인가 자문하게 된다. 삼십 년, 한 세대를 훌쩍 넘어 여전히 독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글이라는 매체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고.
ps. ’19년 개정판으로 읽었는데 ‘04년 국내 초판 출간 후 60쇄가 넘게 팔렸는데도 여전히 오타가 간간이 눈에 띄는 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