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 진짜는 로그아웃되었다

Serial Experiments Lain

by 작중화자


우리는 모두 한 손에 우주를 쥐고 다닌다.

깊이와 넓이를 측정할 수 없는 무한의 공간, 클릭 한 번에 어디에나 닿을 수 있는 인터넷은 국경도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 손 안의 우주다.

세상의 모든 정보는 여기서 탄생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게 진짜든 가짜든 상관없이, 이곳에서 우리는 모두 이어져 있다.


<Serial Experiments Lain(이하 Lain)>(1998)은 이 ‘연결된 세계’가 현대인에게 미치는 부작용을 집요하게 해부하는 작품이다. 서사와 설정은 지나치게 불친절하고 전개 또한 혼란스럽다. 사회적 불안이 팽배하던 당시 일본의 상황과 세기말이라는 시대적 변화가 맞물려 ‘난이도 조절을 무시한’ 철학적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이 혼란은 인간의 정체성과 현실이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침식되는 과정을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다.

이렇듯 <Lain>은 난해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디지털 시대의 혼돈을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구현한 수작이다.


나는 죽지 않았어.
육체를 버렸을 뿐이야.

모든 건 한 통의 이메일에서 시작됐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여중생 레인은 얼마 전 투신자살한 같은 반 학생으로부터 메일을 받는다. 그녀는 ‘와이어드’라고 불리는 가상공간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밝힌다.

이 일을 계기로 레인은 와이어드에 접속하는데, 그곳에서 전혀 다른 인격을 가진 ‘레인’이 목격됐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레인은 또 다른 자신을 추적하기 위해 직접 NAVI(컴퓨터)를 조립하며 와이어드에 깊숙이 들어간다.


레인의 방을 조금씩 점령해 가는 여러 대의 스크린과 본체, 전선, 냉각 장치들은 현실과 가상세계의 경계가 무너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때부터 레인의 혼란은 사건 해결의 차원을 넘어,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현실의 나와 네트워크 속의 나는 같은 존재인가, 혹은 전혀 다른 존재인가.




<Lain>이 보면 볼수록 불쾌하고 섬뜩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작품 속 사회가 오늘날 우리의 현실과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다.

작품이 제작된 90년대 후반의 일본은 초고속 인터넷이 가정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시기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인터넷이 가져올 사회적 문제를 놀라울 정도로 날카롭게 포착한다.


작품 전반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전신주와 거미줄처럼 뒤얽힌 전선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은 모두 이어져있다.’는 명제를 시각화한다. 집에서도, 거리에서도 사람들은 익명이라는 새로운 껍데기를 쓴 채 서로 연결된다.


문제는 이 익명이 새로운 정체성을 생산하는 편리한 수단이 된다는 점이다.

평범한 주부와 직장인, 은둔형 외톨이는 와이어드에서 해커가 되고, 정보의 생산자이자 유통자가 된다. 그들은 정보를 조작하고 가공해 진실처럼 퍼트리며, 심지어 타인의 사적인 비밀조차 ‘정보는 공유되어야 한다.’는 왜곡된 신념 아래 무차별적으로 노출시킨다.


이 세계에서 정보는 곧 권력이자 계급이다. 정보를 수집하고 편집하는 사람은 새로운 자아를 구축하고,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착각에 빠진다. 그렇게 타인의 사생활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인터넷 공간에서 범람하는 가짜 뉴스, 음모론, 신상 털기와 개인정보유출 등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사회적 문제와 겹친다.


와이어드에 몰입할수록 레인의 인격 또한 조금씩 변해간다. 이런 변화에 가장 먼저 균열을 감지하는 인물은 같은 반 친구인 앨리스다. 앨리스는 와이어드에 잠식되기 전의, ‘인간적인 레인’을 기억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현실과 가상이 침해되며 뒤섞이는 동안, 앨리스의 비밀이 와이어드에서 폭로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레인은 훔쳐본다.


현실의 레인이 비밀을 유출했다는 오해 속에서 교실의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 꽂히는 이 오싹한 장면은, 네트워크 사회에서 개인이 얼마나 쉽게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연결된 모든 이들에겐 책임과 혐의가 부과되는 것이다.


‘또 다른 레인’이 벌인 일련의 사건들로 자아의 붕괴를 느낀 레인은 그녀를 추적하다 ‘신’이라 자칭하는 에이리 마사미와 대면한다. 그는 현실세계에서 와이어드를 개발하던 연구원으로, 육체를 버리고 정보의 집합체로서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의 목표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완전히 해체하고, 인간이 정신으로 통합되는 세계를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수수께끼 같던 레인의 정체가 드러난다. 레인은 신의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현실과 가상세계의 영역을 없애기 위해 육체화 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레인은 깨닫는다. 와이어드에 대한 개입이 깊어질수록 현실은 침식되고, 인간은 자아와 함께 진짜 관계를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결국 레인은 신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리셋’한다.


<Lain>은 ‘Serial Experiments Lain’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실험적인 연출로 작품의 분위기를 강화한다. 지나치게 하얀 배경과 핏방울처럼 붉은 점이 일렁이는 그림자,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기계음은 현실감각을 지속적으로 교란시킨다. 의도적으로 절제된 배경음은 지금 이곳이 현실인지 와이어드라는 컴퓨터 속의 공간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든다. 또한, 형태를 잃고 흐트러지는 사람과 사물은 정체성이 분해되는 세계를 불쾌하게 대변한다.


동시에 <Lain>은 시대를 앞서간 작품으로 그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한 손에 들어오는 휴대용 전자기기를 이용해 교실에서도 서로 문자를 주고받는 모습이나, VR헤드셋을 이용해 게임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근미래의 현실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다.




<Lain>은 결국 묻는다.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에서, 우리는 여전히 ‘나’로 존재할 수 있는지 말이다. 현실과 다른 자아를 만들어내는 것이 쉬워진 시대,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점점 가볍게 소비하게 됐다.


레인이 선택한 ‘리셋’은 세계를 구하는 영웅적 선택이라기보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저항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지는 완전한 통합보다, 불완전하고 고립될지라도 자신을 인지할 수 있는 개인으로 존재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손 안의 우주를 넘나들며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작품이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Lain이 던지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영국 밴드 Bôa의 <Duvet>은 작품의 오프닝곡이다. 좋아하는 노래라 함께 올려본다.

[출처]boauk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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