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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May 19. 2020

호랑이 아내, 토끼 남편

Feat. 원숭이, 닭



아주 강렬하게 달콤했던 5개월의 연애기간,

나는 내가 사랑하는 고성-속초로 당시 여자 친구(현 아내 꼭 맞음)를 데려갔다. 청춘을 바쳐 근무했던 곳이라 그런지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드는 곳이었고 결혼을 마음먹은 이후라  - 사실 아무도 만날 사람은 없지만서도 - 부모님께 아내를 소개해드린다는 심정으로 고성에 데려갔다.


추억이 보물상자처럼 묻혀있는 고성과 속초의 곳곳을 찾아 아내에게 보여주며 서로에 대한 생각을 꼭 잡은 손을 통해 체온으로, 또 확신으로 옮겨가던 여행이었다.


그 중 백미는 가을의 단풍이 절정을 이룬 설악산 등반이었다.

설악은 충분히 단장을 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잎새들은 붉으노랗게 팔랑거렸고 시내는 조올 졸졸 흘렀다. 그 장단에 맞춰 우리는 울산바위로 향했다.


연애 초반이었고, 나는 군인이었다.

내 홈그라운드에서 무언가 멋지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었고, 체력적으로 힘들다면 약간의 스킨십도 더 기대해 볼 수 있겠다는 늑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날씨는 너무 좋았고 옆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는 남자가 이 만큼 강해. 이것 봐 기운이 펄펄 나는 내 모습을!'이라고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더 신이 나서 산에 올랐던 것 같다. 사실 상식적으로 내가 더 잘 오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군인이고 매일 뛰었고 늘 산에 올랐는데.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급격한 체력 저하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고산병이라도 걸린 것 마냥 나는 힘이 쭉쭉 빠지고 걸음은 무거워졌다. 머릿속에선 '그럴 리 없다'라고 되뇌었지만 그녀의 발걸음이 더 경쾌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해가 뉘엿뉘엿 태백산맥을 넘어가던 즈음의 하산길에서는 아내의 도움(?)으로 무사히 주차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지쳤고, 지친 것보다 인정하기 싫은 멘탈의 붕괴가 선행되었다. 아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무 그늘에 앉아 기습같이 찾아오는 가을 산바람에 달달 떨며 이유를 곱씹었지만, 답은 찾을 수 없었다.


아내는 운동선수도 아니고 운동을 즐기는 사람도 아니고 도시의 회사원인데.


셀카봉 들 힘도 없다, 울산바위



사실, 돌아보니 아내는 나보다 더 군인에 적합한 사람이다.


언젠가 한 번은 여수의 해변에 놀러 가서 '사격 내기'를 한 적이 있었다. 생도 3학년 시절 이후로는 '특등사수'가 아니었던 적이 없던 나였기에 부담 없이 내기를 했건만 처참히 패배했고, 아내는 큰 인형을, 나는 아저씨가 선의로 베푼 최하 등급의 열쇠고리를 받았었다. 이때도 머릿속에선 '그럴 리 없다'라고 되뇌었지만 멘탈의 회복은 쉽지 않았다.


학창 시절 왜소한 체구로 많이도 맞고 다녔던 나와 다르게, 아내는 어렸을 때부터 또래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키로 항상 모두를 내려다보는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밖에도 늘상 잔병을 달고 사는 나에 비해, 아내는 결혼하고 지금껏 어디 한 번 아프다고 골골거린 적이 없다. 체력과 체격도 좋지만 면역력도 남달랐던 것 같다.



암만 생각해봐도 "그럴 리 없는데, 설마 아니겠지..."싶었다. 하지만 이유를 찾지 못한 내 사고의 끈은 '띠'에 까지 이르렀다.  사실 아내는 호랑이 띠고 나는 토끼띠다. 띠 조합이 상당히 좋다. 나만 순종한다면 문제없는 조합이다.


호랑이 같은 아내는 늘 신체적 강인함과 더불어 현실을 조망할 줄 아는 여유와 약자에 대한 강자의 관용을 베풀 줄 아는 여자다. 반면, 나는 순발력 있고 기민하지만 가진 것에 비해 분수를 모르고 까부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집은 그렇다. 제왕적 호랑이 아내 아래 원숭이와 닭이 투닥거리고, 토끼는 낑겨있는 형상이다. 심지어는 집안 서열이 제일 낮다고 생각하는 내가 '토끼띠'인 게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지금 남편이 집안의 주춧돌이자 중심이라는 구시대적 사고에서 벗어나, 호랑이 굴에서 토끼가 살아남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다. 7년째 배우고 있지만, 아직도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호랑이 행세를 하고 싶어 하는 나를 이따금씩 돌아보며 '가장으로서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심하고 있다.


다행히 '가장으로서의 권위'를 늘 세우고 지켜주려는 아내의 노력으로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살고 있지만, 그래도 진정한 권위와 그에 맞는 책임을 갖기 위해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다.


여기서도 권위 타령하는 꼰대 마인드부터 제껴두고 정말 집안의 평화를 위해 호랑이와 닭과 원숭이를 조화시킬 수 있는 토끼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다.


토끼, 원숭이, 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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