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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 민구 Oct 04. 2020

죽는 게 무섭냐 안 무섭냐(2부)

바로 죽거나, 금방 죽거나, 천천히 죽거나



시대가 바뀌었다. 


역병이 돌았고, 눈 앞에서 사람들이 실려갔다.

잠복기만 끝나면 며칠 새 기침도 하고 열도 난다고 한다.


마스크는 순식간에 동이 났다. 약국을 몇 군 데 돌아다녀봤자 살 수 있는 마스크는 없었다. 정부에서는 혼란을 막고자 마스크 구매 수량을 제한했다.



하지만 결국 피해는 약자들이 보았다.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약국과 우체국 앞에 몇 시간씩 줄을 서고 나서야 겨우 몇 개의 마스크를 살 수 있었다. 마스크는 사치품도 기호품도 아니었다. 필수재 중 필수재였다.


마스크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었다.


실제로 치사율이 몇 퍼센트 되지 않는데 사람들은 모두 금방 죽는 게 무서웠다. 작은 확률이지만 역병에 걸린 사람들은 오랜 투병을 할 시간을 얻지 못하고 죽었다. 사람들은 그렇게 [준비 없이 죽는 게] 무서웠나 보다.


영화 같은데 보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당사자나 주변에서 안락한 죽음을 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아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잠깐 생각해보아도 그 편이 더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미세먼지와 역병과 영화 속 상황을 종합해서 판단해 보면, 어차피 죽음은 같은데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위기의식과 대처가 다르다는 결론을 얻었다.


천천히 죽는 것은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라는 가정하에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대한 걱정은 미뤄두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고 생각할 수 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금방 죽는 건 확실히 무서운 일이다. 죽음이 눈앞에서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고, 생각보다 버킷리스트에 많은 아이템들이 남아있다면 인생이 너무 아쉬울 것임에 틀림없다. 맞는 것보다 눈 앞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것을 보는 것 자체가 더 무서운 법이니, 죽음이 눈 앞에서 와리가리한다면 무서울 것이 확실하다.


바로 죽는 경우를 선택하는 것은 어떤 심정일까. 죽음으로 이르는 공포와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다는 생각이 큰 것일까. 그래도 1%의 가능성이 있다면 그 고통들을 견뎌내고 살아보려는 시도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1%의 살 가능성과, 1%의 치사율이 비슷한 무게여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다르게 저울질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지만 모든 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고 사람마다 상황마다 조건마다 달라질 것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다만 숨 쉬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미세먼지는 정부 추산 한 해 평균 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만들어 내는데, 그 경우에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 역병은 올 한 해를 거의 다 쓸어 버리고 있음에도 미세먼지보다 훨씬 작은 희생자를 내는데 전 국민이 마스크를 쓰고 있으니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군에서는 마스크 의무 착용 지침을 하달했다. 식사와 흡연할 때를 제외하곤 항상 쓰고 있어야 한다. 마스크를 많이 쓰고 있으니 뇌로 적절한 산소공급이 안되고, 산소공급이 안되니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런 경우에도 아이러니하게, 나처럼 담배 안 피고 딱 붙어서 일만 하는 사람이 뇌에 산소를 덜 공급받을 수 있고 하루에 열 번도 넘게 담배를 피우러 다니는 아무개는 나보다 두 시간이나 산소공급을 원활히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이해력이 떨어진 게 확실하다.




죽음이 다르지 않은데, 왜 죽음을 무서워하는 정도가 다른 것일까.


어찌 됐든 더 많은 희생자 없이 얼른 역병이 종식되고 마스크 좀 벗고 다녔으면 좋겠다. (이것이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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