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의 하나님은 확실하지 않은 걸까.
받은 은혜는 손소독제처럼 금세 휘발되었다. 남은 건 그랬던 것 같은 느낌뿐이었다. 이 느낌만을 가지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팍팍한 삶이었다.
삶은 언제나처럼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또 상하고 회복되기를 반복하며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상처와 어려움은 그대로 둔다고 해도 다시 회복될 것이다. 다만. 지긋지긋한 모호함과 불확실성이 이번의 회복을 주저하게 만든다. 언제나처럼 확실하지 않은 나의 하나님을 찾으며- 들어주셨겠거니, 아직 가장 좋은 때가 아니겠거니, 듣고는 계시지만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 외에 내가 만날 방법은 없겠거니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그 뿌옇고 흐린 신앙생활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확실히 양육반은 좋은 기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하며 확인해 나갔다. 모두가 은혜 충만한 가운데 돌아오는 전인적 치유수양회에서는 분명 나도 은혜의 증거를 한 아름 가지고 내려와야 했다. 방언을 받았다고, 성령을 만났다고 생각했으나 그마저도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점령군이 되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의 마음은 방주에 올라 또 한 번 표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절실히 나의 벧엘과 홍해, 떨기나무가 필요했다. 성경 속 이야기 말고, 그런 것 같은 느낌 말고,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것 말고. 손에 잡히는 확신이 필요했다. 이번엔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안타까워하면서 받은 은혜 다 빼앗겼다고 조언하는 아내의 말은 그리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 쫓아다니느라 분주하고 곤란한 예배 시간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경 한 줄 읽으려면 끊임없이 불러대는 선배들과, 불철주야 엎지르고 망가트리는 아이들도 그랬다. 그러다 잠깐, 반지하에 해가 들듯 허락된 시간은 지쳐 디비 눕기 바쁜 귀한 낭비의 시간이었다.
그래도 살아보겠다고 성경을 펼치면 내 손은 언제나 욥기로 향한다. 욥기에는 내가 하나님을 찾을수록 늘어나는 의구심과 같이 해답 없는 질문만 가득하다. 욥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고난이 복이라는 신앙의 전통에서도 벗어나 있다. 그저 욥을 표적으로 삼은 사탄의 이의 제기와 검증 과정에서 욥은 자식과 재산을 다 잃고 병을 얻었다. 그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어렴풋이 설명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다.
나의 이 불행과 고난이 어떤 유익이 있을지 알지 못한 채 고통받고, 나의 그 어떤 선하고 의로움이 아닌 이유로 회복된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을 뿐, 어떤 행위의 주체도 행복과 선악에 있어서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것 또한 그랬다. 이미 죽은 자식들은 어쩌고, 고난 이후의 더 큰 번성과 풍요를 감사해야 한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욥기는 끝까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욥의 고난을 수십 번 묵상하며 욥의 상황에 몰입해 봤을 때, 오히려 현실적으로 가장 공감이 가는 한 구절은 욥 아내의 한마디 말이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그 상황에 처하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았다. 불손한 생각을 지우개로 벅벅 지운 후줄근한 백지장에 다시. 신앙과 삶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삶과 믿음에 관한 문제가 풀지 않은 문제집처럼 죄책감만 지운 채 마음 구석을 채워나갔다. 표류하는 마음의 방주에서 비둘기를 날려 보내지만, 어떤 회신을 받을지는 모르겠다.
은혜 넘치는 글이 아니라 은혜를 잃고 방황하는 글, 의심과 불편감이 가득한 삶, 반전되지 않는 한숨이 이어지는 매일이 어떤 유익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나 혼자만의 희귀한 고민은 아니겠으며, 누구나 경험할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해 보니 공유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는 길에 내가 그린 물음표를 던져본다.
그저 내가 간절히 원하는 건 내 삶과 신앙이 물음표로 끝나지 않는 것이다. 신앙을 키워 지켜오면서 언젠가는 나의 홍해를 건너기를, 나의 떨기나무를 만나기를, 나의 불기둥과 만나가 광야를 이끌어가기를 기대할 뿐이다. 욥의 고난은 무엇인지를 알기 원하고, 나의 삶이 확정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