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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가능

제로 투 윈

by 아빠 민구

인간의 몸으로 살면서 인간적으로 생각하지 않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엘리야가 불말과 불병거를 보여주지 않는 이상 나에게는 더 이상 가능성이라곤 없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하고 싶은 것은 늘어나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은 계속해서 줄어들어간다. 동시에 몸은 늙어가고 할 일은 많아진다.


마치 베드로가 아무리 그물을 던져도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던 것과 같이, 내 삶에 모든 진을 빼며 노력하고 있으나 아무런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라면 필패다. 그 누구와의 경쟁에서 뿐만 아니라 나 스스로와의 싸움에서조차 이길 수 없다. 에디슨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겠지만, 현실속에서 실패의 연속은 좌절의 어머니이다. 나의 가능성이 세월에 반비례하며 줄어든다. 70%였다가, 40%였다가 20%, 9%, 3%. 그리고 이젠 제로를 향해 가고 있다. 이 수열은 '불가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한다. 내가 만약 젊은 시절처럼 70%의 확률로 내가 시도하고 노력하는 것들에서 성공을 해나간다면 하나님이 등장할 타이밍은 있을 것인가. 더 노력하고 더 가다듬어 80%가 된다면. 90%라면. 99%라면. 아마 하나님은 등장하지 않으실 것이다. 오만과 독선에 묻혀 결국 성공적인 사망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 일하는 곳으로 전근 오면서 많은 좌절과 굴욕, 무기력함을 느끼곤 했다. 요셉이 사랑받는 아들에서 하루아침에 노예로 팔려갔던 것처럼, 나에겐 이 묶인 멍에를 풀어헤칠 아무런 자구책도 마련되어있지 않았다. 끊임없는 무기력과 자괴감 속에서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과정을 거치고 있다.


일종의 연단이라 할 수 있겠다. 자존심이 깨지고 자아가 엎어지는 지난 2년 간의 과정은, 나의 가능성이 0으로 수렴함과 동시에 자력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겸손의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이건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가능성이 제로가 될 때까지 기다리게 하신 이후에야 이삭을 주신 것과 같은 일종의 장치 같은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나의 불가능이야 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가장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배경화면인 것이다. 그러니 이제야. 마음 놓고 실패하고 무력하고 엎어진다. 나의 가능성이 제로가 되는 순간을 맞이하는 건 이런 맥락에서는 참 기대되는 일이다. 바닥을 딛고 주님의 날개를 달아 솟아오를 수 있는 인생 대 역전극의 서사가 이제 한참 구르고 있다.


나의 불가능은- 심령이 가난한 자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는 것처럼 일종의 복이다. 나의 불가능은- 아버지의 전능함을 빛내기 위한 영광이다. 그러므로 나의 불가능은- 불가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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