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낙연 총리님의 말투, 어법,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일단 목소리도 좋으시고, 뛰어난 언변도 가지고 계시고, 듣기 싫은 요소들(권위로 밀어붙이거나, 고성을 지른다던가)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는 심리학 글을 써야 하는데, 대정부 질문에서의 답변 모습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싶어 글을 써 봅니다.
(메인 사진 출처 : 브레이크 뉴스 "이낙연 총리, 실질적인 여야 협치 더욱더 노력하라" 중)
이낙연 총리에게 배우는 말문 막기의 기술
일명 "네가 나보다 더 잘 알아?" 기술입니다.
2017년 9월 11일 국회 대정부 질의의 장면을 살펴봅니다.
자유한국당 박대출 의원이 총리님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박대출 의원 : "KBS나 MBC에서 불공정한 보도를 한 것을 본 적이 있느냐?"
이낙연 총리 : "음... 잘 안 봅니다."
(중략)
이낙연 총리 : "꽤 오래전부터 좀 더 공정한 채널을 보고 있습니다."
박대출 의원 : "언론 노조가 장악한 방송이 객관적이 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이낙연 총리 : "저는 보도를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어느 것이 공정한 보도인가는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공정한 보도를 보고 있습니다."
박대출 의원 : "...."
이 말을 통해 당시의 KBS나 MBC는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공정한 보도에 대한 판단을 네가 나보다 더 잘할 수 있겠냐는 공격이 간접적으로 들어갑니다.
이낙연 총리님은 기자 출신임을 토론에 십분 활용합니다. 실제로 찾아보니 총리님은 동아일보에서 10년 이상 재직하셨고, 이때의 경험을 무기로 활용하곤 합니다. 상대가 기자 출신인 경우는 아닌 경우가 많고, 그로 인해 언론에 관한 이야기에서는 그 경험과 관점을 따라올 수 없습니다.
토론의 기본 기술은 상대의 주장에 따른 근거와 가정의 허점을 발견해 그 주장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이낙연 총리님은 이 기본 기술에서 더 나아간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김성태 의원 : "오죽하면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통화하면서 한국이 대북 대화 구걸하는 거지 같다는 그런 기사가 나왔겠습니까!"
(중략)
이낙연 총리 : "네. 김성태 의원님이 한국 대통령보다 일본 총리를 더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김성태 의원 : "총리..."
근거의 기반이 되는 기사가 일본 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낙연 총리님은 그 근거를 가져왔을 때 하기 쉬운 가정을 자연스럽게 공격합니다. 위의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일본 총리발 기사를 신뢰해야 하는데, 김성태 의원 입장에서는 대놓고 그 말을 신뢰한다고 말하기에는 입장이 곤란해지므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습니다. 김성태 의원은 아마도 그 메시지 "트럼프 대통령이 아베 총리와 통화하면서 한국이 대북 대화 구걸하는 거지 같다"라는 말에 집중해서 공격하고 싶었으나, 아예 공격을 받지도 않고 반격을 한 것이죠.
자유한국당 함진규 의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함진규 의원 : "핵은 우리(북한)와 미국 사이의 문제 남조선의 근본 입장이 바로 서지 않는 한 대화는 하나마나 (이게) 북한의 입장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낙연 총리 : "제가 오히려 되묻고 싶은 것은요. 미국이 대화를 말하면 전략이라 하고, 한국이 대화를 말하면 구걸이라 하는 그 기준은 또 무엇인지 이상합니다"
함진규 의원 : "...."
이 대화를 조금 쉽게 표현하면,
'그거 구걸이잖아? ㅇㅈ?'이라는 주장에 이낙연 총리님은 '그걸 왜 구걸로 보는데?' '미국도 대화를 말하는데?' 같은 기준으로 보면 미국도 '구걸'임? '음... 그거는' 결국 너희들은 근거는 없고 '구걸'로 보려는 것뿐이네?
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화는 전략일 수도 있고, 구걸일 수도 있죠. 그러나 어떤 측면으로 보기 위해서는 근거가 필요합니다. 정부 입장에서 대화는 전략이라는 프레임이고, 이는 평화적 문제 해결을 위한 방식이라는 근거가 있습니다. 반대로 자유한국당은 그것은 대화가 아니고 '구걸'로 프레임해서 공격하고자 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보아야 할 설득적인 근거가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낙연 총리님은 '그렇게 봐야 할 근거는 무엇입니까'라는 핵심 논리를 묻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A이고 어떤 것은 B라면 그렇게 봐야 하는 이유가 필요하고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주장은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국민의당 황주홍 의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황주홍 의원 : "한국은 삼권분립 국가가 아닙니다. 의심 없이 제왕적 대통령 1인제 입니다."
이낙연 총리 : "조금 전에 우리는 삼권분립을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대통령이 지명하신 헌법재판 소장 후보자가 바로 인준에 받지 못한 사태가 있었지 않습니까. 삼권 분립은 살아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주홍 의원 : "네 좋습니다.."
다음으로는
바른정당 김무성 의원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김무성 의원 : "수십 조씩이나 퍼붓고 있는 복지예산은 늘릴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안보 예산을 늘릴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낙연 총리 : "안보예산도 필요한 것도 늘려야겠죠. 복지예산 늘어난 것은 지난 대선 때 모든 정당들이 공통으로 공양했던 사항들이 먼저 이행되고 있다는 말씀드립니다."
김무성 의원 : "...."
이낙연 총리님의 기술 중 하나는 나만 인정할 수 있는, 나만 알고 있는 근거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인정한 것들을 근거로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상대가 먼저 동의했거나,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 동의했기 때문에 반박할 수 없습니다. 황주홍 의원의 경우엔 모두가 대통령이 지목한 후보자가 인준받지 못한 사항을 보았기에 (그리고 그것을 주도했던 야당이기 때문에) 할 말이 없고, 김무성 의원의 경우엔 복지예산 확대가 본인이 속한 바른 정당의 주장이었기에 할 말이 없었지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더 묵직하다.
상대의 감정이 섞인 발언에도, 똑같이 대응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대정부 질문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고, 화를 내며 흥분하는 사람의 말은 그 논리가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흥분하지 않고 차분함을 유지하는 게 더 논리적이고 묵직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소리 지르고 윽박지르는 것은 너무 평범한 모습이고, 당연하게도 부정적인 감정을 일으킵니다. 일단 소리를 치는 사람은 지고 들어가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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