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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미니 Jun 28. 2019

[뉴욕편] 맛집으로 기억하는 행복

더 큰 세상을 꿈꾸게 만든 뉴욕 여행일기 03

"나 지금 정말 행복해"라는 말을 입밖으로 소리내서 말해본 적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속으로만 말하거나, SNS에 올리거나, 일기에 적어본 적은 많은데 육성으로는 의외로 잘 쓰지 않는 표현인 것 같다. 너무 비장해서 영화대사 같달까? 다만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있는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서는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아 이런게 인생의 행복이지"라고 말하곤 한다. 이럴 땐 행복이란 것도 참 별거 없구나 싶다.


맛있다는 감각은 행복을 즉각적으로 떠올리게 해주는 힘이 있다. 가족과 월급날 나가는 외식, 연인과 보내는 기념일, 친구들의 생일에는 언제나 맛있는 음식이 빠질 수가 없다. 나는 마찬가지의 이유로 여행지에서도 맛있는 한끼에 공들이는 편이다. SNS에서 검증된 맛집도 좋고, 지인 추천 맛집도 좋고, 현지인들이 길게 줄 선 골목 어느 식당도 좋다.




뉴욕에서 짧지 않은 8박 10일 동안 다양한 먹거리를 체험하고 왔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의 요리를 수준급으로 즐길 수 있어서 행복했다. 음식은 도시와 나라의 특색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매개체라는데, 뉴욕은 문화적으로 굉장히 다양하고 풍요로운 도시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짤막하게나마  맛에 기록을 남겨본다. 



1. 불레이 (Bouley at Home)

31 W 21st St, New York, NY 10010

- 런치메뉴 Five-course Pre-fixed Lunch Menu : $55

뉴욕에서 한번쯤은 분위기 괜찮은 곳에서 식사를 해보고 싶었다. ‘파인다이닝’이라면  고급스럽고  유명한 식당도 많았지만 런치코스 가성비가 괜찮은 불레이로 예약했다. 전반적인 평은 '너무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분위기  만한 곳'이다.


우선 좋았던 점은 맛의 대중성이었다. 내가 고른 메뉴는 당근스프-게살 트러플 스프?-등심 스테이크-아몬드 아이스크림-초콜릿 디저트였는데, 요리가 전반적으로 난해하지 않아 실패할 확률이 적은 편이었다. 오히려 실험적인 요리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 같고, 코스구성이 겹쳐서 메뉴 구성에 큰 차이가 없는 점이 아쉬웠다.


서비스도 기대에 미치진 못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내 기준에는 코스 사이의 텀이 너무 짧았다. 코스마다 맛을 충분히 음미할 시간 그리고 그 다음 코스에 대한 기대감을 갖는 여유가 코스요리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여유있게 주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포크를 잠시 내려놓으면 종업원이 재빠르게 와서 치워주고, 또 재빠르게 다음 요리를 가져다줬다. (뉴욕에서는 이런 서비스가 보편적인 걸까? 아메리카에 대한 편견^^;;)




2. 잭스와이프프레다 Jack's wife Freda

50 Carmine St, New York, NY 10014

- Madame Freda / Today's Pasta

지중해식 브런치집. 비록 지중해를 가본 적은 없으나 기분탓인지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타지에서 느끼는 또 다른 타지의 맛이랄까..

친구가 고른 오늘의 파스타는 새하얀 보울에 조미료를 쓰지 않은 듯한 심플한 맛과 비주얼이었다. 재료만 보면 어떤 맛을 내겠다는 의지조차 없어 보였는데, 막상 먹다보니 쉬지 않고 먹게 되는 중독성이 있었다. 반면에 'Madame Freda'는 빵에 계란, 치즈, 오리 프로슈토의 조합이라 내가 원하던 꾸덕하고 느끼한 스타일이었다. 양도 많아서 배고프고 지친 두 여행자는 모두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칠 수 있었다. 저녁타임에는 샥슈카라는 제일 유명한 메뉴는 먹어볼 수 없었어서 아쉽다.




3. 피터루거 스테이크 하우스 (Peter Luger Steak House)

178 Broadway, Brooklyn, NY 11211

- Steak for Two : $107.9

뉴욕에는 3대 스테이크 맛집이 있다는데, 동선에 맞추다 보니 피터루거를 가게 되었다. 친구는 사실 좀 다른 입장이었던 것이, 무려 가장 가보고 싶은 뉴욕 맛집으로 꼽을만큼 여행 출발 전부터 기대를 품고 있던 터었다. 웨이팅이 어마어마했지만 근처 골목 구경을 좀 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가서 허기진 상태로 입장했고 그 상태로 잘 구워진 고기를 먹으니 당연히 맛있(을 수 밖에 없)었다. 다만 내 취향에는 너무 담백해서 처음엔 와규 같다고 느꼈다. 버터맛이 좀더 났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렇다 보니 그렇게까지 꼭 가봐야 할 맛집인지까지는 솔직히 조금 의문이다.


아무튼 목 끝까지 찰 만큼 배터지게 스테이크를 먹은 날이었고, 약간 질리기까지 해서 나오는 길에 당분간 스테이크 금식이라는 선언을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둘다 새까맣게 잊고 지내고 있다.




4. 토미재즈 (Tomi Jazz)

239 E 53rd St, New York, NY 10022

행복지수가 높아지면 아무리 평범한 음식이라도 최고급 요리처럼 느껴지는 마법이 있는 걸까? 여행 후반부라 미국 음식에 물린 탓도 있겠지만, 이날의 저녁은 진심으로 가장 맛있게 먹은 식사였다.  


음식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토미재즈도, 여기서 보낸 여행의 마지막 밤 조차도.


그러니까 시간 순대로 적자면 여기서 먹은 저녁식사가 뉴욕에서의 마지막 식사였다. 마지막 밤은 늘 아쉽고 보내기 싫은 순간이었는데, 뉴욕의 마지막 밤은 참으로 행복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갈망했던 문화적인 욕구도 충족됐고, 친구랑 함께하는 순간마다 놀라울만큼 편안하고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그 덕분인지 뉴욕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명란크림파스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착각을 불러일으켰고, 추가로 시킨 오므라이스도 훌륭했다. 배가 찼는데도 더 맛보고 싶어서 치즈 튀김까지 주문해서 다 먹어버렸다.


이런 날은 행복이 먹는 만큼 늘어나는 법!




5. 바 룸 (The Bar Room)

5 Beekman St, New York, NY 10038

다운타운에 머물 때 괜찮은 바를 찾다가 숙소 근처에서 운 좋게 발견했다.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거센 바람을 실컷 맞아서 춥고 으실으실한데, 프렌치 어니언 스프를 먹자마자 몸이 스르르 녹았다. 여유를 되찾고 주위를 둘러보니 으리으리한 내부 전경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높은 천장과 고풍스러운 인테리어 덕분에 오래된 성당 안에서 술을 마시는 이색체험 같기도 했다.





6. 에싸베이글 (Ess-a-Bagel)

831 3rd Ave, New York, NY 10022

우연치 않게 출근 시간대에 뉴요커처럼 베이글을 사러 가게 됐다. 어디선가 봐본 듯한 뉴요커 행세를 하며 쿨하게 주문을 해보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베이글과 크림 종류가 너무 많았다. 한참 바라보다가 커스터마이징은 포기하고 그냥 제일 유명한 연어베이글을 시켰다. 후기에서 많이 짜다는 얘기를 듣고 먹었는데 진짜 그랬다. 나중에 빵과 크림치즈만 남은 부분이 더 맛있었다. 차라리 심플하게 베이글에 그냥 크림치즈만 얹어 먹어도 좋을듯.




7. 카페 하바나 (Café Habana)

17 Prince St, New York, NY 10012

- Grilled corn mexican style : $4.5

마약 옥수수의 원조격이라는 그릴드 콘이란 메뉴가 있는 카페. 자극적이라 홀린듯이 먹게 되지만, 옥수수에 뿌려준 가루랑 옥수수 알갱이들이 후두두 떨어지기 때문에 정갈한 식사매너를 지키기는 영 어려운 음식이다. 맛있어서가 아니라 중간에 멈출 수가 없어서 후루룩 먹었더니 사진 한장 못남겼다..



8. 첼시마켓 (Chelsea Market)

75 9th Ave, New York, NY 10011 

- 랍스터 미디움 사이즈, 클램차우더

촌스럽지만 나는 태어나서 랍스터를 이날 처음 먹어봤다. 역대급 많이 걸은 날이라 바닥에라도 주저앉고 싶었는데, 다리의 피로를 랍스터로 풀었다. 버터를 찍어먹다가 느끼하면 콜라 한 모금, 그러다 클램차우더를 곁들이면 더 깊고 진한 맛이다. 첼시마켓은 시간이 부족해서 다른 가게는 구경을 못하긴 했지만 랍스터만으로도 올 이유는 충분하다.  




9. 맥도날드 (Mcdoland's)

1651 Broadway, New York, NY 10019

 - Bacon Egg & Cheese McGriddle

저녁 공연을 보러가던 길에 소나기를 잠깐 피하려고 근처 맥도날드에 들어갔다. 거기서 우연히 주문해본 맥그리들은 도톰한 팬케익 빵 사이베이컨, 에그, 치즈를 끼워서 먹는 맥모닝 메뉴였는데, 단짠단짠과 느끼함의 조합이 최상의 밸런스였다. 또 먹고 싶은데 미국에만 있는 메뉴라고 한다.ㅠ




10. 쉐이크쉑 (Shake Shack)

200 Broadway level 2, New York, NY 10038

Fulton Center 내부에 있는 지점으로 갔는데 넓고 깔끔해서 좋았다. 동대문에서 가끔 먹어봐서 익숙한 맛이었지만 술 몇 잔 하고 나서 먹었더니 정말 맛있었다. 해장은 역시 햄버거지~ ((알쓰))



11. 르뱅 베이커리 (Levain Bakery)

167 W 74th St, New York, NY 10023

- Chocolate Chip Walnut/ Oatmeal Raisin Cookie/ Dark Chocolate Chocolate Chip/ Dark Chocolate Peanut Butter Chip : $4

친구가 죽기 전에 먹어봐야 할 몇대 음식으로 꼽힌 곳이라며 여기는 꼭 가야한다고 했다. 매장이 센트럴파크 근처에 있어서 피크닉용으로 몇 개를 사봤다. 푸른 잔디에 매트 깔고 앉아 쿠키를 입에 넣는 순간, 천국의 문이 열렸다.. 달달하고 찐득꾸덕한 미국식 쿠키의 정석. 촉촉함은 거의 굽기 전의 도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넷플릭스 다큐 '셰프의 테이블 4'에 나오는 밀크바 오너셰프, 크리스티나 토시의 말이 생각난다. "쿠키로 배를 채우는 사람도 없고 건강에도 좋진 않겠지만, 입에 넣는 순간 삶이 조금은 더 달콤해진다."




12. 매그놀리아 (Magnolia Bakery)

200 Columbus Ave, New York, NY 10023

- 바나나 푸딩

유명세는 엄청났지만 굳이 일부러 찾아갈 계획은 없었는데,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하던 길에 때마침 있길래 구경이나 해볼겸 들어갔다. 바나나 푸딩이 맛있다고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났는데 바나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잠시 고민하다가 제일 작은 사이즈로 하나 시켜봤는데, 한 입 먹자마자 더 큰 컵으로 시키지 않은 걸 먹는 내내 후회했다. 아쉬운 마음에 찾아보니 다행히 한국에도 입점이 된 브랜드라고 한다. 요즘은 이런게 참 좋구나. 덕분에 베이커리를 나서며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자연사박물관으로 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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