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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민 Nov 12. 2021

라니의 다양한 모습을 기대한다

아동학자 엄마의 관점에서 본 애니메이션 2: 꼬마버스 타요

타요는 뽀로로와 함께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결혼도 하기 전, 서울 시내에서 종종 눈 스티커가 붙은 타요 혹은 로기 버스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아이는 티비를 보기 전부터 누르면 소리가 나는 타요 장난감을 갖고 놀았다. 수저, 컵, 심지어 주스팩에도 타요가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는 티비 화면으로 처음 타요를 만났을 때에도 반가워했고 잘 보았다. 두 돌도 안 된 아이가 볼 만화가 많지 않았던 때에도 타요 만큼은 아이가 꼬박꼬박 보았다.     

 

타요는 의인화된 교통수단들이 나와서 서로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타요의 주요 테마 중의 하나는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행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모두 다 친구예요’, ‘친구가 되고 싶어요’, ‘사이좋게 지내요’와 같은 에피소드가 이에 해당한다. ‘타요와 띠띠뽀의 달리기 경주’나 ‘긴급 출동센터가 생겼어요’처럼 타요의 캐릭터와 기획 의도에 맞춰 교통수단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에피소드도 있다. ‘타요의 우주 대모험’이나 ‘꼬마버스들의 공룡 친구’와 같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소재로 특별한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타요에서도 등장인물의 성비 불균형이 뚜렷하다. 우선 네 명의 꼬마버스 중에 여성 캐릭터는 라니 뿐이다. 주연 격인 꼬마버스들 중에서 여성은 고작 한 명, 홍일점으로 끼어 있다. 일단 EBS 웹사이트의 꼬마버스 타요 게시판에 있는 인물 소개부터 답답함이 느껴진다. 타요, 로기, 가니는 각자에 대한 성격을 설명하며 ‘~꼬마 버스’로 소개되는 반면, 라니의 경우는 어쩌구저쩌구한 성격의 ‘꼬마 숙녀 버스’라고 되어 있다. 라니는 분명히 여성이다. 다른 버스들은 성별을 나타내는 말이 딱히 없다. 남성이 주를 이루고 기준이며, 여성인 경우에만 특별히 알려주겠다는 것일까? 여군, 여의사, 여경찰과 같은 단어를 쓰지 말자는 논의가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데, 요즘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에서도 별 다른 점이 없다. 


그림 1. 꼬마버스 타요 주요 캐릭터: 로기, 타요, 라니, 가니


남성 꼬마버스들은 여럿이다보니 성격도 다양하다. 타요는 호기심이 강하고 명랑하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개구쟁이 측면도 있긴 하나 착하고 밝아 주인공다운 느낌이다. 로기는 자기애가 무척 강하며,, 타요와 티격태격하고 다른 친구들을 놀리기도 한다. 한편 가니는 타요나 로기와 달리 어른스러워서 남을 잘 배려하고 성실한 성격이다. 가니를 보면 뽀로로의 포비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이처럼 남성 캐릭터들은 여러 명이니 각 인물의 특성도 다양하다.      


하지만 라니의 경우는 혼자 여성을 대표하고 있다. 문제는 라니의 성격이 전통적인 여성 고정관념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EBS 1의 공식 페이지를 보면 라니는 ‘상냥하고 귀엽지만 겁이 많은 애교만점 꼬마 숙녀 버스’로 소개된다. 

그림 2. 공식 웹사이트의 라니 인물 소개



이러한 라니의 성격은 라니가 주인공이 되는 에피소드에서 생생히 나타난다. 시즌 1의 19화 ‘라니의 오해’ 편에서 꼬마버스들은 주행 시험을 앞두고 실내연습장에 간다. 실내연습장 자리는 한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꼬마버스들은 서로 연습하려고 한다. 라니는 원래 실내연습장에 가고자 했지만 친구들이 앞다퉈 가려고 하자 

‘나는 괜찮아. 피곤해서 일찍 쉬려구...’

하고 원래 계획을 갑자기 바꾸고 친구들이 미안해할까봐 피곤해서 쉰다는 말까지 친절하게 덧붙인다. 라니는 속으로

‘나도 연습이 필요하긴 한데..어쩔 수 없지 뭐.’

라며 무책임하게 포기한다.      

그림 3. 주행시험을 잘 못봐서 씨투에게 혼나는 라니


라니는 결국 시험을 못 봐서 씨투에게 혼난다. 이 에피소드는 좋게 마무리되지만, 라니가 자기 잇속을 챙기지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모습이 계속 마음에 남는다. 친구들에게 양보한 건 좋지만, 자신에게 중요한 걸 포기해가면서까지 양보해야 하나? 게다가 라니가 유일한 여성 꼬마버스 캐릭터라는 걸 고려할 때, 이걸 보는 아이들은 여성에 대해 어떤 이미지를 갖게 될까?      




네 명의 꼬마버스 중에 랜덤으로 라니가 그런 역할에 배정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에피소드에서도 라니가 포기하고 양보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시즌 1의 23화 ‘라니의 쉬는 날’ 편에서 라니는 쉬는 날을 맞이하여 꽃이 많은 길로 소풍을 간다. 가는 도중 라니는 고장난 유치원 차를 발견한다. 소풍을 가지 못해 속상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라니는 잠시 갈등을 한다.

‘오늘 나 쉬는 날이야. (아이들을 태워주면) 나는 놀러갈 수 없잖아.’

그러다 결국에는

‘그래 난 괜찮아. 아이들에게 한번밖에 없는 소풍이잖아.’

라며 휴가를 반납하고 아이들을 태워주기로 한다. 

‘라니야, 너에게도 이 쉬는 날은 한번 밖에 없어.’

라고 외쳐주고 싶었다. 라니는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쏟아도, 낙서를 해도 너그러이 받아주고 우는 아이를 달래기까지 한다. 그렇게 시간을 다 보내고 어둑해져서 차고지로 돌아온 라니에게 친구들은 

‘재밌게 놀았어?’ 

라고 묻는다. 라니는

‘놀러가는 것보다 더 재밌는 거했지~’

라며 이날의 일을 비밀로 하는 미덕까지 보인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성경 구절이 저절로 생각난다. ‘누군가를 돕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거든요.’하는 멘트와 함께 이야기가 끝난다. 

그림 4. 휴가를 반납하고 유치원 아이들을 태워주는 라니


누군가를 돕는 건 좋은 가치이다. 하지만 자신을 무조건 희생해가며 남을 돕는 것만 강요하는 것도 옳지 않다. 아무리 만화이고 꼬마버스이지만, 꼬마버스들은 일하러 가는 걸 싫어하고 놀러가는 걸 좋아하는, 어엿한 직장인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직장인의 소중한 휴일에, 무작정 남을 위해 봉사를 하는 것이 미덕인 것처럼 보여줘야 할까? 물론 아이들이 기다려왔던 소풍을 못가는 것도 아쉬운 일이다. 원장님이 얼른 버스 대절 회사에 연락해서 남는 버스를 보내달라고 해야 했다. 라니의 재능 기부로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2기 14화 ‘공주님이 되고 싶어요’는 라니의 유치하고 한심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다. 라니는 외국 공주님의 방문 행렬을 보고 공주님의 모습을 동경한다. 딸을 키우는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공주 앓이를 하는 시기가 있다고 한다. 이 때 아이들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 캐릭터 별로 원피스를 다 갖추고, 화려한 구두, 머리핀, 장신구로 머리부터 발 끝까지 치장하고 싶어 한다. 모두가 이런 시기를 겪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그렇게 공주처럼 치장한 아이는 눈길을 사로잡고, 주위에서는 이를 보며 ‘역시 여아들은 공주를 좋아해~’ 하고 한 마디 하게 된다. 라니는 공주 앓이를 하는 케이스였다. 라니는 공주님의 방문 행렬을 보고 차고지로 돌아와서 ‘나도 공주님 되고 싶다~’라고 하고, 친구들이 동조해주지 않으니 ‘내가 어때서!’하고 화를 냈다가 나중엔 울었다. 전체적으로 한심해 보인다. 


그림 5. 공주님의 방문 행렬을 회상하며, 공주가 되고 싶어하는 라니


이튿날 아침에도 시무룩한 라니를 위해 하나는 다른 꼬마버스들에게

‘너희가 하루만 라니를 공주님으로 만들어 줘.’

라고 부탁한다. 라니는 자신을 공주 취급해주자 갑자기 돌변하여 자기를 꼭 공주님이라 부르고, 어딜 가든 따라다니며 보호해주고, 원하는 건 모두 다 들어주라고 요구사항을 이야기한다. 다른 버스들은 곧 라니를 공주 대접하는 것에 지쳐가지만 라니는 공주가 되고 싶은 나머지 다른 이들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다. 친구들이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하자 

‘니들이 먼저 해주겠다고 했잖아!’

라고 울고 화내며 가버린다. 


그림 6. 친구들에게 공주대접 해줄 것을 강요하는 라니


라니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건 나뿐일까. 이 에피소드는 교훈을 주며 잘 마무리된다. 라니는 우연히 외국 공주님을 태우게 되는데, 공주님은 자유가 없어 답답하다며 라니를 부러워한다. 라니는 이에 화려한 공주의 삶이 좋기만 한 것은 아님을 깨닫고 자신에게 만족한다. 이야기가 좋게 마무리된 건 좋지만 전반부에서 어리석게 비쳐진 라니의 모습이 더 강렬했다. 다른 에피소드에서 라니는 양보를 잘 하고 선행도 감추는 등,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잘 하는 성격으로 나오는데, 공주 앞에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갑자기 성격이 바뀐 것이 영 어색할 뿐이다.     




심리학자 산드라 벰은 고정관념으로 갖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속성을 정리했다. 가령 ‘리더로 활동한다’, ‘야망이 있다’, ‘주장이 강하다’, ‘경쟁을 한다’, ‘지배적이다’ 등은 흔히 남성적인 속성으로 여겨진다. 반면 ‘감성적이다’, ‘명랑하다’, ‘유치하다’, ‘친절하다’, ‘남의 필요에 민감하다’ 등은 흔히 여성적인 속성으로 생각한다.


그림 7.  산드라 벰이 제시한 여성성과 남성성의 특징출처: http://m.mediafi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4834


 벰에 따르면, 사람들은 흔히 남자는 이러저러하고 여자는 이러저러해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고 있지만, 이는 고정관념일 뿐 실제는 다를 수 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벰이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 1974년이었다. 무려 40여 년이 지난 이후에도, 우리 아이들이 보는 애니메이션의 주요 여성 캐릭터에서 여성의 고정관념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아이들은 만화를 보면서 여자는 라니처럼 저렇게 상냥하고 귀엽고 애교도 있고, 겁은 많아야 한다고 무의식 중에 받아들이지는 않을까? 앞으로 새롭게 방영될 에피소드에서는 라니의 모습이 보다 고정관념을 깨는, 다양하고 신선한 이미지를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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