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에게서 배우는 내면의 자유
장자는 말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인간이 만들어 낸 구분, 즉 선과 악, 옳고 그름, 성공과 실패, 삶과 죽음의 이분법은 단지 관점의 산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구분에 집착하며 스스로를 고통 속에 몰아넣곤 합니다.
소요유(逍遙遊) 편의 ‘붕새’는 이 사상을 우화적으로 보여줍니다. 붕새는 구말리 높이 솟아오르며, 아래를 내려다볼 때 땅 위의 분간이나 경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푸른 덩어리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이 장자가 말하는 **‘붕새의 시선’**입니다. 멀리서 보면 구분은 의미를 잃고, 우리는 비로소 분별을 내려놓게 됩니다.
장자의 지인은 생을 기뻐하지도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삶과 죽음을 모두 하나의 흐름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연은 나에게 삶을 주었고, 늙음과 죽음을 통해 다시 쉴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시선은 불교의 무상(無常), 무아(無我)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태어남을 축복하고, 죽음을 피하고자 하나, 장자는 둘 다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봅니다.
이 통찰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왜 삶에 집착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집착이 사라지는 순간, 고통도 두려움도 함께 사라집니다.
장자는 공자와 안회의 대화를 통해 수행의 단계를 제시합니다.
심재(心齋)는 마음을 씻고 비우는 ‘내면의 단식’이며,
좌망(坐忘)은 앉아 있는 가운데 자신을 비워가는 수행입니다.
이 과정은 다음의 네 단계로 구성됩니다:
몸을 내려놓고
감각의 자극을 버리고
마음과 지식의 작용에서 물러서고
우주와 하나되는 전체성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은 불교의 사념처 수행(신, 수, 심, 법)과 거의 흡사합니다. 장자와 고타마 붓다는 서로 알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인간 내면을 닦는 방식은 유사합니다.
이 수행이 말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참된 자유란 비움에서 온다.
장자가 말하는 “모든 것을 얻는 법”은,
무엇도 얻으려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이 주어진다는 역설로 요약됩니다.
‘무위’란 인위적인 의도를 버리는 것이고,
‘자연’이란 스스로 그러함입니다.
즉, 의도와 집착을 내려놓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입니다.
김주환 교수는 이를 편도체 안정화와 연결합니다.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두려워할 때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불안이 생깁니다.
그러나 더 이상 얻을 것이 없다고 느낄 때, 전전두엽이 활성화되며 우리는 고요한 평정 속에 머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의 사람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 부릅니다.
그는 잘되어도 자만하지 않고,
잘못되어도 후회하지 않으며,
항상 자기 자신을 고요히 지켜냅니다.
붕새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조그만 새들은 그를 비웃습니다.
“굳이 저렇게 높이 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붕새는 구별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 모든 존재를 하나로 봅니다.
그 외로움은 오히려 진정한 자유입니다.
진짜 외로움은, 진짜 자유입니다.
장자의 결론은 이 한 문장에 담깁니다.
“천하를 천하 속에 그대로 놓아두라.”
집착하지 말고, 간섭하지 말고,
무엇도 바꾸려 하지 말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어지고
바로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김주환 교수는 말합니다.
“필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있다.”
이것이 바로 장자가 말한 '모든 것을 얻는 법'입니다.
그것은 높은 곳에서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비워냄을 통해 고요히 존재하는 법을 아는 것입니다.
붕새처럼 조용히 날며,
세상의 먼지와 아지랑이조차도
푸르게 보는 그 시선을 우리도 품을 수 있기를.
https://www.youtube.com/watch?v=9ValMx9rFPs&t=1677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