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계발서의 재해석

by 이해하나

무심코 손을 뻗어 집어 든 책 위로 뽀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습니다. 손가락으로 제목을 훑어 내리자 익숙한 세 글자가 드러납니다. 《혼·창·통(魂·創·通)》. 2010년 즈음, 서점가를 강타했던 그 책이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와 섞여 묵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순간, 기묘한 기시감이 밀려왔습니다.


무식했지만 용감했던 30대의 제가 그 책갈피 사이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책장을 넘기니 붉은색 펜으로 벅벅 그어놓은 밑줄들이 눈을 찌릅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하라", "매일 새로워져라", "상대를 내 편으로 만들어라". 페이지마다 성공을 향한 갈망과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이 잉크 자국처럼 배어 있었습니다. 그때의 저는 스스로를 더 예리하고 단단한 도구로 연마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회사라는 조직의 부속품으로서 가장 빛나고 효율적인 부품이 되는 것, 그것이 곧 '혼'이고 '창'이며 '통'이라 믿었던 시절이었습니다.


비단 이 책뿐만이 아닙니다. 그 옆에는 새벽 기상을 강요하는 《미라클 모닝》이, 끝까지 버티는 힘을 역설하는 《그릿(Grit)》이, 그리고 1만 시간의 법칙을 외치는 《아웃라이어》가 나란히 꽂혀 있습니다. 당신의 서재에도 아마 비슷한 책들이 한두 권쯤은 꽂혀 있겠지요. 우리는 그 책들을 경전처럼 모시며 더 빨리 달리고, 더 오래 참고, 더 많이 생산해 내는 법을 배웠습니다. 마치 그것이 영원한 생존 방정식인 것처럼요.


하지만 오늘 새벽, 이 책들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지는 건 단순히 시간이 흘렀기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창밖은 여전히 칠흑 같은 어둠이지만, 세상은 우리가 알던 궤도를 벗어나고 있다는 소식들이 매일같이 들려옵니다.


인공일반지능(AGI)의 시대가 목전이라 합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고닦으려 했던 '효율성'은 이미 기계가 인간을 추월했습니다. 밤을 새워 데이터를 분석하던 '혼신의 노력'은 AI의 몇 초 계산 앞에 무색해졌고,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 믿었던 '창조'마저도 알고리즘이 그려내는 그림과 시 앞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심지어 타인의 마음을 읽고 반응하는 '소통'조차 기계가 더 매끄럽게 수행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더 나은 도구가 돼라"라고 외치던 자기 계발서의 문법은 이제 효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능적인 탁월함으로 승부하던 시대는 저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먼지 쌓인 이 책은 이제 폐기 처분해야 할 지난 시대의 유물일까요?


차가운 책 표지를 다시 쓰다듬으며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단어들을 오독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제는 완전히 다르게 읽어야 할 때가 온 것일지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혼(魂)은 조직을 위한 맹목적인 열정이 아닙니다. AI가 "무엇을 할까요?"라고 물을 때,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라고 되물을 수 있는 인간만의 철학이자 숭고한 목적의식이어야 합니다. 효율성이 아닌 의미를 찾는 힘, 그것이 새로운 혼입니다.


창(創)은 더 이상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기술적 혁신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계라면 결코 하지 않을 비효율적인 시도, 쓸모없어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 실패할 줄 알면서도 사랑 때문에 저지르는 무모함. 그런 인간적인 결들이 만들어내는 고유한 무늬가 진정한 창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통(通). 정보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기계의 몫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통은 논리적 설득이 아닌, 타인의 고통에 함께 젖어들 수 있는 공명(共鳴) 능력입니다. 데이터가 아닌 온기로 연결되는 것 말입니다.


동이 트려는지 창밖이 푸르스름하게 변해갑니다. 서늘했던 방 안 공기도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합니다.


저는 《혼·창·통》을 다시 책장에 꽂습니다.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자리에 둡니다. 성공하기 위해 읽어야 할 '전략서' 칸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해 읽어야 할 '철학서' 칸으로 옮겨둡니다.


이제 이 책들은 더 이상 성공을 위한 지침서가 아닙니다. AGI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끝까지 인간으로 남기 위한 질문집입니다.


당신의 서재에 꽂힌 낡은 책들은 지금 당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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