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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Oct 13. 2020

여름날의 퀴어 축제, 여름날의 무지개

2020.07.06




  24년, 정확히 8,550일이라는 내 짧은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름날이 언제일까 떠올려보다가 그날에 대해 쓰고 싶어 졌다.



“퀴어 문화 축제(2012.05.27)에 참가하여 성소수자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함.”



  나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中 동아리 활동에 적힌 내용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 You&I라는 인권동아리에 들어갔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인권에 대해 “저는 인권에 관심이 많아요”라고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어쨌든 고등학교 때부터 인권에 관심이 있었다. 믿기지 않겠지만 고등학교 때는 다른 사람을 위해 사는 게 의미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삶을 살고 싶었다. 이 말을 했을 때 정말 의외라며 놀라던 엄마와 언니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인권동아리에 들어갔고 그 덕에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으로 퀴어 문화 축제에 참가할 수 있었다.


  2012년 여름의 초입. 남색 세라복을 입고 가능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1호선을 탔다. 지금 보니 겨우 5월 말인데 왜 이렇게 더웠나 싶다. 분명 하복을 입고 있었다. 가능역에서 종각역까지. 2012 퀴어 문화 축제의 개최지인 청계천 한빛 광장으로 향했다. 그때는 서울이라면 다 먼 곳이었다. 청계천... 들어는 봤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지도 몰랐고, 그저 “지하철 타고 1시간 걸린대!” 하면 “헥? 개 멀다” 할 뿐이었다.


  인권동아리에는 나와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YJ라는 아이와 친해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친구는 말도 많고 굉장히 활발했다. 나랑은 상반되는 면이 많았는데 어떻게 친해졌는지 모르겠다. 지금에서야 친구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해가 쨍쨍한 한빛 광장에 도착한 동아리원들은 흩어져서 이것저것 구경하기 시작했다. 흰색 세라복 셔츠에 남색 치마를 입은 친구와 나도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맞이한 1차 충격은 이상형 월드컵이었다. 이상형 월드컵은 지금은 굉장히 흔하지만 KBS2의 ‘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이라는 예능에서 처음 시작했다.


  남자 연예인은 여자 연예인들 중 이상형을 뽑고, 여자 연예인은 남자 연예인들 중 이상형을 뽑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나는 남자는 여자에 대한 이상형이 있고, 여자는 남자에 대한 이상형이 있는 게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인 우리에게 여자 이상형 월드컵을 하라는 거다. 아주 잠시 ‘엥’ 했지만 바로 열심히 골랐다. 1위는 태연이었다. (정말 내 취향 소나무네…)


  2차 충격은 손을 잡고 다녔는지 팔짱을 끼고 다녔는지 아무튼 스킨십을 하고 다녔던 나와 친구에게 혼인 신고서를 쓰고 가라는 거였다. 1차 충격 이상형 월드컵에 비해 이때는 좀 찐으로 당황했다. 굉장히 친절하게 우리에게 혼인 신고서를 쓰고 가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괜찮아요!”라고 말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때 나는 여자끼리 좋아한다, 사귄다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자끼리 혼인을 한다는 건 가능 불가능을 떠나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또 우리가 커플로 보였다는 게 웃기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럴 만하다. 퀴어 문화 축제에서 여자애들 둘이 손잡고 팔짱 끼고 다니는데… 지금은 나도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학생들 보고 ‘쟤네 사귀는 거 아니야?’ 이런 망상을 자주 한다.


  3차 충격은 스모 선수처럼 똥꼬만 가린 남자분들이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우리한테 같이 춤을 추자고 했다. 딱 봤을 때 ‘뭐지? 왜 저런 차림을 하고 있지?’ 생각했다. 또래에 비해 성에 대한 부끄러움이 없는 편이었지만 그래 봤자 고등학교 1학년이었고, 아빠 외에 성인 남성의 (거의) 나체를 눈앞에서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엄청 해맑은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즐기고 있어서 나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우리는 같이 춤을 추지는 못하고 애써 웃음을 지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후에 퀴어 문화 축제가 음란 축제다 뭐다 하면서 선정성 논란이 있었는데 잠시지만 내가 있었던 그곳은 분명 그런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렇게 생애 첫 퀴어 문화 축제에 대한 기억은 이상형 월드컵을 빼면 도망친 것 밖에 없다. 한 곳에 눌러앉아 오랫동안 무언가를 보고 듣기보다는, 그저 부끄러워서 이리저리 돌아다니기만 했다. 혹시 내가 당황한 게 티 나서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이 경험은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내 주변에도 많은 성소수자들이 있었지만 (그 당시에) 나에게 직접적으로 밝힌 사람은 정말 몇 없었다. 그래서 첫 퀴어 문화 축제는 성소수자가 많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 준 소중한 경험이었다. 물론 거기 모인 사람들도 전체 성소수자들 중 극 소수밖에 안 되겠지만…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면서 나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스스로를 양성애자라고 정체화했고 가끔 지난 시절을 반추하며 그것은 우정이 아니라 사랑이었음을 깨달은 적도 많다.


  그리고 2012년으로부터 6년 후인 2018년 7월 14일, 나는 친구들과 두 번째로 퀴어 문화 축제에 갔다. 남색 세라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청계천 한빛 광장이 아닌 시청 광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머뭇거렸던 예전과 달리 어떤 부스가 열리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혼자서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광장을 몇 바퀴 돌고 명동, 을지로 일대를 걷는 퀴어 퍼레이드에도 참여했다.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더운 여름날, 왜 이 많은 사람들은 그늘도 없는 서울 광장에 모여서 4km에 이르는 거리를 걷기까지 할까. 흔한 표현이지만 그날의 태양보다 더 뜨거웠던 것은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열정이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뜨거운 열정이 세상을 바꾸길 바란다!”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한여름의 태양보다 뜨거운 열정을 보인다는 게 쉬운 줄 아나. 그 열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 앞에서 열정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 그래도 내가 죽기 전에 내 지인들 중 한 명은 동성 결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미주, 유럽, 호주 대사관이 괜히 퀴어 문화 축제에 부스를 여는 게 아니다. 요즘 우리나라 짜증 나니까 그냥 열심히 배우고 돈 모아서 이민 가자. 대만에 이어서 태국도 동성혼 합법화 추진 중이라니까 태국 가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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