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 Oct 13. 2020

2013년 회상

2020.05.23

  한자 시험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오랜만에 본시험이라 그런지 진이 다 빠졌다. 머리가 아프고 얼굴에 열이 오르고 배가 고프다. 서둘러 지하철을 탔다. 소요산행 열차에 자리가 많다는 것이 오늘의 가장 큰 행운이다.


  컴퓨터 화면 속 한자를 읽으며 문제를 푸는데 문득 고등학교 때 시험 끝나고 다 같이 채점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성인이 돼서 시험을 볼 때마다 ‘고등학교 때 어떻게 살았지?’ 의문이 들었다. ‘어떻게 버텼지’가 더 맞는 말 같다.


  극심한 학업 스트레스를 버틸 수 있었던 건 단연 인피니트 덕분이다. 정말 그때 우린 미쳤었다. 우리 반은 엑소파와 인피니트파로 나뉘었다. MAMA 같이 큰 시상식을 할 때면 친구네 집에 옹기종기 모였고, 포토카드를 받겠다고 롯데리아에 가서 인피니트 팩을 사 먹었다. 공부하다가 집중이 안 되면 핸드폰에 저장해 놓은 영상을 봤다. 야자 시간에 작은 베가레이서로 영상을 보는 건 소박하지만 그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누군가 핸드폰을 보는 건 진정한 휴식이 아니라고 했는데 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사랑하는 오빠들의 얼굴을 보면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어떨 때는 입까지 막고 본다. 이렇게 행복해지는데 어찌 휴식이 아니란 말인가?


  그때는 진지했다.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꿈이었지만 그와의 결혼이 최종 목표였다. 틈만 나면 친구들이랑 어떻게 하면 결혼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방송국이나 엔터테인먼트에 취직한다, 그 멤버의 가족이 하는 식당에 가서 우연히 마주친다, 연예인을 알 만한 지인을 통해 소개받는다, 나이 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낚아챈다 등등… 18살의 우리는 꽤 그럴싸한 방법들을 생각해냈다.


  나는 마지막을 노렸다. ‘다른 팬들이 다 떠나가도 꼭 끝까지 남아서 개인적인 친분을 쌓으리라... 단물이 빠져서 아이돌로서 가치가 떨어지면 그의 가치와 나의 가치가 비슷해지겠지? 그럼 그때를 노리는 거야…’ 하지만 아이돌로서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내 흥미가 먼저 떨어졌다. 모니터 속 오빠들보다 훨씬 못생긴 오빠에게 빠져서 더 이상 그들의 소식이 궁금하지 않았다. 모두가 대학에 가면 아이돌도 재미없어진다고 했는데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인 줄 알았다. 그들이 나를 두고 간 것도 아니고 내가 떠나 간 거면서 괜스레 아쉬웠다.


  흥미가 떨어져도 그들의 흔적은 오래된 핸드폰의 앨범과 비밀번호 같은 곳에 남아 있다. 네이버 클라우드에 들어가서 베가레이서 폴더를 클릭하면 18살의 내가 저장해 놓은 사진이 가득하다. 이상하다. 지금은 마음만 먹으면 엔터테인먼트에 취직하거나 멤버의 가족이 하는 가게에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물론 그렇게 해서 마주친다고 나와 결혼해 주지는 않겠지만.


  오랜만에 만난 사촌동생에게 요즘 인기 많은 아이돌이 누구인지 물어봤다. “요즘은 운동선수나 배우 더 좋아하는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 ‘너희들이 뭘 몰라서 그래. 아무리 그래도 운동선수나 배우보다는 아이돌이지.’ 하는 꼰대 같은 생각이 든다. 사촌동생이 말한 것처럼 이제 아이돌은 끝물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실제로 웬만한 기획사에서 내보낸 아이돌이면 중박은 치던 7~8년 전과 달리 요즘은 대형 기획사에서 나온 아이돌도 큰 인지도를 얻지 못한다.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하지만 내가 학생 시절에 즐겼던 문화가 죽는 것 같아 슬프다. 그렇지만 믿는다. 나보다 똑똑한 누군가가 다시 내가 열광할 만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줄 거라고. 예를 들면 토토가 인피니트 편 같은…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한 잔 속에 담긴 서비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