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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쥬얼꼰대 Jun 12. 2019

시간은 완벽하지 않다.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기

초록이가 태어나고부터, 몇 년 전 (중고로) 장만했던 미러리스 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쓸 줄을 몰라서 초점없는 사진만 찍어대다가 하도 답답해서 책 몇 번 들추다 보니 이제야 자주 쓰는 기능 두세 개 이용해 가며 적당히 사진 비슷한 것 몇 장 건지게 되었다. 전문가들이 들으면 코웃음 치겠지만 찍어놓고 보면 솔직히 핸드폰 카메라와 큰 차이를 느끼지는 못하겠는데, 그럼에도 종종 미러리스를 꺼내드는 건 그 순간을 남기고픈 성의가 더 크기 때문이리라고 스스로 생각해 본다.


디지털 카메라라는 것이 나오기 전에는 사진 찍기가 참 쉽지 않았다. 어렸을 적 집에는 일제 수동카메라가 하나 있었는데, 다룰줄을 모르니 당연하게도 찍으면 사진이 잘 나오지 않았고(오토모드가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마저도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있을 때는 별로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초등학교 정도때까지는 그 카메라로 사진을 종종 찍곤 했었던 기억이 나는데, 중학교에 들어가고 집이 좀 어려워지고 나서부터는 가족여행같은 걸 가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카메라를 잘 쓰지 않게 되었다. 대신 졸업식, 대학 입학식과 같은 중요행사에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일회용 카메라로 찍은 사진은 몇 장 남아있다.


2000년대 초중반에 디지털카메라가 널리 보급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빨리 돌아가신 엄마의 사진을, 특히 목소리를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생각날 땐 디카가 몇 년만 빨리 나왔다면, 아니 몇 년만 더 사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후에 이삿짐을 꾸리다 어디선가 툭 굴러나온 필름을 혹시나 싶어 얼른 사진관에 가 인화를 맡긴 일도 있었다. 필름이 오래되고 빛이 들어가 변질되어 거기에 어떤 사진이 담겼는지는 영영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남은 영상이 없기에 엄마의 목소리가 잘 떠오르진 않는데 이상하게도 꿈에서는 금세 알아듣는다. 여기저기서 아날로그 감성의 아름다움을 얘기하지만 가끔은 디지털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신형철 작가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책을 읽다가 마지막 부분에 쓰여진 문구가 몇 번이고 책을 다시 펴게 만들었다.

시간은 빠르다. 시간은 정확하다.
시간은 비정하다. 시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렇다면 시간과 관련해선 이런일을 해야하리라.
변하지 않을 수 없는 것들이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 내고,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다그치기.

가족을 일찍 잃은 것은 진작에 받아들였다. 그러니 가족과 함께 하는 추억을 변하지 않도록 간직하는 것 또한 앞으로 내가 시간과 관련해서 해야 할 일일 것이다. 며칠 전 와이프와 함께 초록이를 데리고 아빠가 계신 시골에 다녀왔다. 아빠는 사진찍기 귀찮다고 하셨지만, 한사코 우겨서 삼각대를 꺼내 카메라 높이를 맞추고 조리개와 밝기를 알맞게 조절한 후 타이머를 맞춰 사진을 찍었다. 예전에 일본 아오모리에서 홈스테이 했을 때 멋진 풍경에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날 보며 홈스테이 아저씨는 '뭘 계속 찍어대~ 눈이 가장 좋은 카메라야, 눈!' 이라 하셨었는데, 물론 그럴 때도 있지만 아닐 때도 분명 있는 것 같다. 사진이란 건 변하지 않으면 좋을 것들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내는 멋지고도 또 간단한 방법이니까.

아빠와 초록이.. 그리고 시골집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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