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김에 데이트(1)
"저도 모르게 그런 저녁 약속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강솔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지금 막 즉흥적으로 결정하신 거 같은데요..!"
수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녀의 뒤를 따랐다. "지금 결정하고 말고 가 중요한가, 무엇보다 우리 강비서 오늘도 내 활약으로 퇴근이잖아. 신난다."
'잠깐, 그러고 보니... 내일 오전 임원회의 때문에 일찍 출근해야 하는 걸.'
강솔은 멈추어 서서 휙 뒤돌아보았다. 그 바람에 수호의 가슴팍에 이마가 살짝 부딪힐 뻔했다.
수호는 잠시 놀란 듯 멈칫하다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 넘어지지 않게 지탱했다.
"뭐야, 그 표정은. 퇴근했는데 일 생각 하기야? 좀 잊어버리고 나랑 놀자."
"내일 오전 10시 임원회의잖아요." 그녀는 아침 회의 준비를 시작할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러다가 이내 자연스럽게 생각이 이어졌다.
‘그래. 야근을 방해하는 상사께서는 조기 출근은 못 막으시겠지. 7시에 빨리 나오지 뭐.’
"알아. 10시. 대회의실. 내일 일은 내일 하고, 나 봐주면 안 돼?" 수호는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에 올렸던 손을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팔을 살짝 스쳤다.
강솔은 이제 수호의 가벼운 터치에 일일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을 빠져나왔다.
“매일 놀아달라 하시는데, 저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대체 얼마나 신나게 놀아주시는지 한번 보죠.”
강솔은 최대한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퇴근하고 놀아 본 적이 언제였더라, 그녀는 또 생각에 잠겼다. 야근을 밥 먹듯 일삼던 그녀에게는 퇴근이란 곧 귀가와 마찬가지였다. 뭐부터 할지, 무엇을 하고 놀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좋아!” 수호는 어린아이처럼 밝게 웃었다. 저 웃음은 유해한가 아니면 무해한가. 그녀의 입가에도 살짝 미소가 번졌다.
‘강아지 산책시키는 기분인데.’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제 수호가 대형견으로 보이는 듯했다.
“일단 배고프지? 저녁 먹으러 가자. 메뉴는 떡볶이야.!” 신난 수호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녀의 눈을 살짝 부드럽게 바라보았다.
강솔은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가 떡볶이 먹고 싶었는지 어떻게 아셨어요?”
‘정말, 마음을 읽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수호는 아무렇지도 않게 씨익 미소 지었다. “우리 강비서 일하는 와중에 떡볶이집 검색하는 거 봤지.”
"다음에 비서실 언니들하고 점심할 때 가려고 찾아본 건데, 본부장님 덕에 먼저 먹어보고 자랑할 수 있겠네요."
둘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로제떡볶이와 튀김, 어묵을 주문하고 맛있게 먹는 그녀를 수호는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많이 먹어 솔아.”
그녀는 튀김을 떡볶이 국물에 담가 휘휘 저었다. 바스락거리는 튀김이 국물에 젖어 주황색으로 물들어갔다.
“본부장님은 이런 거 안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우리 솔이가 좋아하는 거면 나도 좋아해. 다 말해. 이 순간부터 입맛도 바꿀 수 있어.”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잘도 하네.’ 하지만 강솔은 떡볶이가 너무 맛있어서 수호의 말에 대꾸하기 귀찮아졌다.
“제가 아직 어린애 입맛이라서요. 근데 저한테 너무 맞춰 주시는 거 아닌가요?”
“사람마다 선호하는 게 다른데 뭐 어때. 신경 쓰지 마. 그리고..”
수호는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오늘은 강솔님이 원하는 대로 해야지. 안 그래?”
수호의 천진난만한 미소에 그녀는 또 그가 강아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머리를 쓰다듬으면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일까 아니면… 하, 어묵도 맛있네.
'벌써 즐거워지려고 하네. 말려들었어.' 국물만 남아 가는 떡볶이를 보며 그녀는 한 마디 더 내뱉었다.
"밥 볶아 드실 거죠? 2인분?"
두 사람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풍경을 따라 공원으로 나섰다. 산책하는 어린아이와 개들, 연인들, 여유로운 저녁시간을 즐기는 인파가 눈에 들어왔다. 수호는 미처 강솔의 손을 잡지는 못하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그녀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걸으며 팔꿈치만 스치고 있었다.
"우리 저거 해요." 그녀가 손을 들어 인형 뽑기 기계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부탁이 있는데, 실패할 때마다 시간 한 10번만 3분 전으로 되돌려 주실래요?" 그녀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종종걸음으로 동전 교환기에 달려가 바꿔오는 모습에 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함박웃음이 지어졌다.
"아, 내 능력을 이런 데다 쓰다니. 너무한데."
이미 신난 그녀의 귀에는 수호의 푸념이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동전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기계에 들어갔다.
그녀는 집중하여 뽑기 버튼을 눌러 컨트롤을 계속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돌아가고 다시 그녀의 손바닥에 동전이 나타났다. 그녀는 동전을 보며 킥킥 신기한 듯 웃었다.
"아, 이걸 생각 못했네. 인형 위치가 다시 리셋이네요..??" 집중하던 강솔이 수호를 돌아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강솔은 매번 실패할 때마다 그 위치에서 재시작하여 출구 쪽으로 밀어 넣을 계획이었던 것 같았다. 갈고리가 원위치로 가듯 솔이 건드렸던 인형은 시간을 돌릴 때마다 제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수호는 옆에서 눈을 감았다 뜨며 시간을 반복해서 돌렸다. 9번이나 뽑기를 실패한 그녀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뽑기보다 동전 되돌아오는 게 더 재밌는 거 아냐? 아이고, 또 실패했네. 이제 마지막이야."
수호는 즐거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뽑기에 성공한 그녀가 인형을 흔들어 보이며 웃었다.
수호는 조그만 곰인형의 배를 꾹꾹 눌러보는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요 녀석, 넌 나올 운명이었어. 잘 걸렸다. 히히."
그녀는 마치 친구에게 말하듯 인형과 대화하며 톡톡 쳤다.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 드디어 뽑았네, 축하해. 500원으로 11번을 하다니, 하하." 둘의 웃음소리가 기분 좋게 울려 퍼졌다.
"본부장님..! 조용히 해요. CCTV 있는데...?"
"그런 게 신경 쓸 거였으면 정직하게 돈 넣고 했어야죠? 안 그래요, 강비서님."
"그, 그냥. 한번.. 한 번인데요 뭐." 그녀는 아무도 이쪽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죄송해요.. 한번 이렇게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본부장님 덕에 뽑았는데, 드릴게요." 갑자기 그녀는 그에게 미안해졌는지, 인형을 살짝 건넸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수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거, 솔이 닮았네. 그래서 기를 쓰고 뽑은 거야?" 수호는 인형을 받아 들고 유심히 살펴보다가 강솔의 얼굴 옆에 비교하려는 듯 갖다 대었다.
"제가 이렇게 생겼어요?" 그녀는 입술을 삐죽였다.
"뚱한 표정이 닮았네. 솔이 넌 사무실에서 꼭 저런 표정인걸." 수호는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거야, 제 디폴트인걸요. 바쁘게 일하다 보면 다 그런 거 아니에요?" 아직도 그녀는 입술을 쭉 내밀고 있었다.
수호는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려고 살짝 손을 올렸다가 슬그머니 내렸다.
"그거, 전리품. 꼭 달고 다니셔요." 솔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수호를 뚫어버릴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아~ 요새는 인형을 달고 다니는 거야?" 수호는 어디다 이 녀석을 달고 다녀야 하나 살짝 고민했다.
"네. 키링이잖아요."
"우비서한테 얘기해서 차에 두지 뭐." 수호는 키링 고리를 열었다 닫았다 반복하다가,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리며 말했다.
"아 참, 왜 우비서 님 하고는 안 놀아달라 하세요."
수호의 수행비서 '우수한'은 워낙 말이 없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말끝을 흩트렸다.
"제 말은.. 뭐 같이 다니면서 한 마디도 안 하지는 않으실 거잖아요. 그쵸?"
"글쎄, 말하지 않아도 척척이야. 워낙 오래 같이 일했으니까. 눈빛만 봐도 아는 거지 뭐."
"담엔 우비서님도 같이 불러 놀아요."
"정말 그랬으면 좋겠어?" 수호는 멈칫했다. 손가락에서 돌아가던 인형을 떨어뜨릴 뻔했다.
"제가 본부장님하고 많이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친해지듯이 우비서님하고도 좀 친해져야죠. 그리고 제가 매일 놀아드릴 수가 없잖아요."
"나는 강솔, 너랑 내가 더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수호는 강솔에게 그윽한 눈빛을 살짝 보냈다. 왜 얘한테는 이 눈빛이 통할 듯 말 듯 할까.
"오늘 아주아주 많이 친해졌잖아요. 떡볶이랑, 우리 곰인형의 힘."
"그래, 이 녀석 이름도 지어줘야겠다. 뭐가 좋을까. 솔이가 뽑은 곰이니까..... 곰솔이?"
"으, 그게 뭐예요.. 이상해요. 곰은 곰돌이죠. 뭘 깊이 생각해요." 그녀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어느새 주변은 어둑어둑해졌고, 공원은 반짝이는 불빛들로 가득했다. 둘은 공원 벤치에 앉아 슬그머니 서로를 바라보고 웃었다. 수호는 턱에 손을 괴고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잘 웃는데? 왜 그동안은 안 웃었을까.
수호는 다음에도 이렇게 그녀와 소소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쁘다. 앞으로도 이렇게 많이 웃어줘. 아, 나한테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