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김에 데이트(2)
강솔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무슨 말씀이세요. 워, 원래 웃는 얼굴엔 뭐 못 뱉는 거예요.”
“내가 원한 반응은 아닌 것 같네.” 수호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데요!” 그녀는 얼굴을 돌리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지 말고 나 좀 봐.”
‘아무 말이나 던져서 분위기를 바꿔야 해. 이대로 가다간 정말 흡수되겠어.’ 두어 번 크게 심호흡한 뒤, 생각나는 말을 던졌다.
“아, 궁금한 게 있어요. 본부장님.”
‘궁금한’ 것이라는 말에 수호는 팔짱을 끼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할 준비를 했다.
“오, 나에 대해서 드디어 궁금한 게 생겼어? 뭐든 물어봐. 다 알려줄게. 참고로 나는 완전무결한 싱글이고,”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수호는 한 사람에게 얽매이기 싫고 자유롭게 여럿을 만나기 위해 정식으로 교제하지 않는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보려 한 게 아닌데. 그녀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말을 꺼냈다.
“우리만의 비밀이요. 정말 시간 능력밖에 없으신 거 맞아요? 순간 이동이라든가, 마음을 읽는다는 가 그런 능력도 있는지..”
“아 솔깃하네. 우리만의 비밀. 나 아까 느낀 건데, 하루에 시간 돌리기 그렇게 많이 해 본 적은 처음이야. 그리고, 현기증도 없고, 머리도 좀 덜 아픈데?”
“제 질문에 대한 답을 좀.. 저 헷갈린단 말이에요. 갑자기 사라지셨다 나타나시고, 그런 적도 많고.”
“마음을 읽을 줄은 몰라. 그건 네 표정을 읽기 쉬워서 그래. 다른 능력은 없어.”
그러더니 다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간을 멈추고 움직이면, 순간 이동처럼 보일 수는 있겠네.”
"그렇게 제 마음을 알기가 쉬운가요?"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수호는 그녀의 행동이 귀여워 미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머리가 아프다는 건, 부작용 같은데요."
그의 능력을 인형 뽑기에 낭비하는 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장본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디 많이 아프거나 하면, 꼭 제게 말씀해주셔야 해요."
"감동인걸... 이렇게까지 나를 걱정해 주는 거야?"
"본부장님 쓰러지셔서 실려가면 그날 업무가 걱정이 돼서..."
그녀는 수호가 매우 걱정되었지만, 마음과 달리 일 핑계를 대며 우물쭈물했다.
"와, 누가 일 중독 아니랄까 봐... 내가 아픈 것보다 일이 걱정이야? 섭섭하게."
"그런 뜻이 아니고요. 저는 일단 현실적으로 생각해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솔아, 걱정 마. 난 정말 괜찮아. 네가 있어서 더 안 아픈걸. 정말이야."
평소와 달리 차분한 목소리를 들으며 강솔은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눈동자는 황금빛을 띠었다. 차츰 소리가 줄어들었다. 마치 그와 둘만 남은 것 같았다.
“지금 잠깐 멈췄어. 역시 너도 느껴져?”
강솔은 벤치에서 일어나 멈춰 버린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뭐예요.. 이건. ”
지나가는 사람들, 바람에 흔들리던 나뭇잎, 도로변의 자동차들이 마치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듯했다. 왁자지껄 떠들던 행인들의 말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 간혹 들려오던 경적소리도, 산책하는 강아지들이 짖던 소리도 잠잠했다.
‘원래 오늘 이 정도로 많이 쓰면 현기증 세게 와서 기절할 텐데, 의외로 멀쩡하네.’ 수호는 피식 웃으며 눈을 크게 떴다. 가로수에서 떨어지다가 공중에 멈춰 있는 나뭇잎을 톡 건드려 보는 강솔을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가 곁에 있으면 부작용이 덜해지는 것 같다고 그는 확신했다. 살짝 손을 들어 그녀의 손을 잡아보았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져 오고 머리를 지끈거리던 아픔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는 대신 갑자기 수호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아야! 뭐 하는 거야..!” 수호가 멈칫하며 물러났다. 그 바람에 멈춘 시간은 다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둑해진 공원은 다시금 활기를 되찾고 원래대로 돌아갔다.
“시간을 멈출 수 있으면 전 이것부터 했을 거예요. 한 대 때려보기.”
“와, 너무한데?? 난 솔이 너의 상사라구.” 수호는 이마를 문지르며, 뻔뻔스럽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눈웃음 쳤다.
“지금은 상사가 아니라, 그냥 같이 노는 친구잖아요?”
“도대체가, 다음에 뭘 할지, 무슨 말을 할지 예측이 안되네. 우리 솔이는.”
“부작용 걱정하는데 다시 능력을 쓰시면 어떡해요! 그 벌이예요.”
강솔은 손을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가요.” 재빠른 걸음으로 강솔은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아, 더 놀아주면 안 돼? 응? 좋았는데. 우리 더 친해졌잖아?”
수호는 금세 그녀의 걸음을 따라잡고 어깨에 슬쩍 손을 올렸다.
“생각해 보니 본부장님, 그걸로 응큼한 짓 많이 했을 거 같아요.” 그녀는 살짝 그를 돌아보며 투덜거렸다.
“아하하, 강솔, 그래서 그게 신경쓰여?? 뭐, 아니라면 거짓말이지." 그의 눈꼬리가 가볍게 휘었다.
강솔은 흠칫 멈춰 섰다. 이 인간이 정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어, 무슨 생각해? 나 그렇게까지 저렴한 인간은 아니라고.”
"앞으로 제가 허가할 때만 쓰셔야 해요! 본부장님이 아프면, 제가 여러 모로 곤란해요." 강솔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미 수호의 능력에 대해 엮일 대로 엮인 마당에 강솔은 그를 통제해 보고 싶어졌다.
시간을 멈추고 돌리는 능력이 어쨌든지 간에 두통이 있다는 것은 몸에 무리를 준다는 뜻이다.
그로 인해 또 어떤 불확실한 미래가 있다면?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면?
만약에 본부장이 부재한다면? 걱정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그녀가 옆에 있으면 그 아픔이 덜하다는 것은 다행이지만 그걸로 완벽하게 안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나저나 이 인간이 이렇게 말한다고 자신의 말을 듣기는 할까, 확신은 들지 않았다.
"좋아. 네가 원하는 대로 할게. 그 대신 조건이 있어."
수호는 너무도 쉽게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무슨 조건이요." 강솔은 눈썹을 찌푸렸다. 동그란 안경 너머로 큰 눈동자가 그의 쪽으로 움직였다.
수호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볼을 가리켰다.
"여기다 뽀뽀 한 번만. 하하."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강솔은 팔짱을 끼며 말했다. "그거면 돼요?"
"그럼, 우리 강솔 비서님께 약속합니다. 저는 앞으로 허락 없이 능력을 쓰지 않겠습니다."
강솔은 당황한 듯 보였으나, 이내 무언가에 이끌리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입술을 살짝 그의 왼쪽 뺨에 가져갔다. '쪽', 하고 살짝 소리가 났다.
'내가 미쳤지, 정말. 오늘 왜 이럴까.' 강솔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돌렸다.
이 정도로 한수호를 좀 통제할 수 있으려나.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녀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거래완료. 딴 말하시기 없기예요."
강솔은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수호를 살짝 흘겨보았다.
수호는 살짝 놀란 듯한 표정이었다가, 입꼬리를 올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진짜 할 줄은 몰랐는데. 진작 해달라고 할걸.'
"한 번 더 해달라고 하면 아마 큰일 나겠지?"
"끝났어요 끝. 딴말하지 말라고 방금 말씀드렸거든요?"
"아, 한 가지 더, 업무 시간에 돌아다니는 것도 좀 자제해 주시면 안 될까요?" 강솔은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주저 없이 내뱉었다. 평소 그가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에 대해 불만이 많이 쌓였던 탓이다.
"너무 조건이 많아 우리 비서님. 그건,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내 나름의 동향파악이라고." 수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 본부장님, 제가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매번 예쁜 여직원들과 수다 떨고 계셨잖아요."
"솔아. 질투하는구나? 그렇지?"
수호는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업무 보고로는 알 수 없는 회사 내 현장 상황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단 말씀. 일을 꼭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만 해야 한다고 볼 수 없어. 그리고 나같이 잘생긴 사람이랑 이야기도 하고 그래야 일할 맛도 나지 않겠어?"
"자기변명은 잘 들었어요."
한율그룹 회장의 손자, 차기 후계자인 그를 모르는 직원은 거의 없다. 그가 다니면서 물어보면 회사 직원 누구든 잘 얘기해주지 않을까. 그녀는 그에게 불만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솔이 네가 원하면 좀 줄여볼게."
수호는 말을 멈추고 진지하게 눈빛을 보냈다. 강솔은 살짝 두근거림을 느끼고, 아직도 얼굴에서 열기가 나는지 손부채질을 하며 돌아섰다.
"내일 봐요. 본부장님. 늦지 않게 오세요." 그녀는 꾸벅 인사한 뒤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수호는 천천히 그녀를 뒤따르며 말했다.
"데려다주려고 했는데. 가차 없이 가버리는 거야? 응?"
"저, 가까워서. 여기서 걸어가면 금방이어요."
"같이 걷자."
수호는 말없이 그녀의 옆에서 발걸음을 맞춰 걸었다. 가로등 밑의 조명을 받아 살짝 빛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