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 회식
“네? 그야. 오늘 회의의 주인공이셨잖아요.” 강솔은 도저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회의자료 정리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주인공? 이게 무슨 영화라도 돼?” 수호는 회의실 책상의 자료를 모으는 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말을 이어갔다.
“어제 그렇게 내가 재밌게 놀아줬는데, 뽀뽀도 하고.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은 이현준이고?”
강솔은 놀라 눈을 크게 뜨며, 재빨리 회의실 주변을 살폈다.
“본부장님!!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마셔요..!” 그녀는 자료를 들고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와 버렸다.
‘미치겠네 정말…’ 강솔은 어제 벌어진 일과 꿈 내용까지 모두 잊고 싶었다. 다시 어제로 시간을 돌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임원회의 또 준비하긴 싫다.’
그때, 여직원 두 명이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강비서님? 본부장님 안 계신가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호의 자리를 슬쩍 곁눈질하고 있었다.
“이제 막 회의가 끝났는데,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강솔은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오~이게 누구야? 기획팀 제영씨, 경영지원팀 수아씨 아냐?” 언제 들어왔는지 수호가 나타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제영과 수아를 반겼다.
‘아, 회사 내 여직원 이름은 다 아나 보네.’
수호는 시시덕거리며 본부장실 안쪽으로 두 여직원을 데리고 들어가고, 강솔은 빠른 속도로 차 세 잔을 내왔다.
“임원회의에서 부회장님께 칭찬도 듣고 기분 좋은데, 오늘 우리 본부 회식 제안드려요!”
“맞아요, 대신 시간 되는 사람만! 우리는 되는데 본부장님 섭외하러 직접 왔어요.”
아, MZ는 회식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게다가 당일?
강솔은 짐짓 놀라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았다.
수호는 그다지 이런 상황이 놀랍지 않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우리 본부의 얼굴인 내가 빠지면 되나.”
하여간에 노는 거라서 오케이인 거겠지. 강솔은 표정관리를 하려는 듯 돌아서서 자리로 갔다.
“근데 이현준 팀장도 오지? 그래야 우리 강비서도 참석할 거 같은데?”
수호는 강솔과 잠깐 눈을 마주쳤다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아직 아까 삐친 게 안 풀렸네.’
강솔은 ‘이현준’ 이름이 나오자 헛웃음이 나왔다.
“어머 그럼요. 급 회식 제안 하신 게 이팀장님이신데요.”
“맞아요, 고생한 우리 본부 직원들 격려해줘야 한다고 흔쾌히 말씀하셨어요.”
“그래, 다들 잘했으니 그렇지, 강비서?”
세 사람의 눈길이 강솔을 향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
회사 앞 고깃집,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겹살 냄새가 식당을 가득 채웠다. 본부 직원들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며 회식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수호는 제영과 수아, 그 외 다른 여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여직원들은 즐거운 표정으로 까르르 웃어대고 있었다.
“아, 본부장님. 저하고도 인스타 맞팔해요. 네?”
“본부장님 이거 뭐예요..? 화보?” 서로의 인스타를 들여다보며 그들의 웃음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며 말없이 고기만 먹고 있는 강솔에게 현준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강비서, 왜 이렇게 조용해?”
“제가 MBTI I인 걸 지금 다시 깨달았네요…
기 빨리는 느낌? 그 대신 고기는 다 제겁니다.”
현준은 조금 뒤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 너무 시끄러운데. 잠깐 나가지?”
현준과 솔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바깥으로 향했다.
반대편 테이블에서 떠들던 수호는 그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그의 얼굴에 서서히 그늘이 졌다.
강솔은 문을 열자마자 느껴지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주변의 다른 가게에도 손님들이 북적대고 있었다.
“하… 근데 웬일로 회식 제안까지 하시고, 의외네요.” 강솔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며,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보고 달이 어디 떠 있는지 찾고 있었다.
현준도 말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끔은.”
그는 다시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요할 때가 있지.”
“오늘은 좀 말이 많네. 강비서.”
강솔은 살짝 미소 지었다. “팀장님하고 일하면서 메신저로 이야기 엄청하는데요 뭐.”
“그래, 많이 하지. ‘자료 보내드렸습니다. 확인해 주세요.’ 이런 거?”
현준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아무튼, 그런 메시지 말고. 좀 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긴 했지.”
“취하셨나, 팀장님, 저랑은 일 얘기만 하시잖아요?”
순간, 솔의 말에 당황한 듯하더니, 다시금 무표정으로 되돌아갔다.
“그런가, 취했나 보네.”
그러고는 강솔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 비서 생각보다 말이 많네. MBTI I 맞나?”
현준은 날카로운 시선을 강솔에게 던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려고 입을 열던 그 순간, 가게 문이 열리면서 한수호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둘이서 뭐 해? ”
“찬바람 좀 쐬며 이야기하고 있었죠.” 강솔은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수호가 다가와 솔과 현준을 번갈아 바라보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야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둘이서만 해?”
현준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별 거 아닙니다.”
“본부장님도 바람 쐬시려고요?” 강솔이 물었다.
수호가 능글맞게 웃으며 대꾸했다.
“응,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 수호는 강솔에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강비서랑 이야기 좀 더 하고 싶기도 하고.”
강솔은 고개를 푹 숙였다. “본부장님은 안에서 맞팔 다 하셨어요? 저.. 갈래요.” 뭔가 피곤해질 분위기를 감지한 강솔은 수호에게서 빠져나오려 했다.
현준이 수호의 팔을 그녀에게서 떼어놓으며 말했다.
“강 비서 피곤할 텐데, 이제 슬슬 마무리하시죠.”
수호는 그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오, 팀장님, 지금 나 견제하는 거야?”
“강비서가 지금 불편해하잖습니까.”
둘 사이에 냉랭한 기운이 흐르는 것 같았다. 이를 보고 있던 솔은 난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생각에 살짝 잠겼다.
“왜 그래요. 우리 본부의 최고 미남 스타들끼리. 응? 2차 갈래요?” 강솔은 분위기를 바꿔보고자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마침 그들을 찾으러 다른 직원이 나오는 것을 보고 강솔은 식당으로 들어가 외쳤다.
“자 이제 정리하시고 2차 가실 분은 가고 집에 가실 분은 자율 귀가하세요!”
“강비서님, 마무리 건배해요. 오늘 아무 말씀도 없으셨잖아.”
“그래요 그래. 건배사! 부탁해!”
직원들은 신이 나서 강솔을 붙잡는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막잔을 채웠다.
“술이 약한 관계로, 이제 사이다로 하겠습니다. 대신 ‘사이다 한잔’으로 5행시 갑니다.”
“우우~~ 강솔! 강솔!”
“사!”
강솔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사랑하는!”
직원들의 표정에 다들 기대감이 맺혔다.
“이!”
“이현준 팀장님.. 과,”
“우와아!!”
그 순간 수호의 얼굴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다.
“우리 기획본부 여러분…”
직원들은 키득키득거렸다.
“다!”
“다들 즐거우셨나요? 오늘은 여기까지.”
현준은 풉, 하고 손으로 입을 막았다.
“푸하하… 한!”
강솔은 거침없이 이어갔다.
“한수호 본부장님..!”
수호가 자리에서 서서히 일어나 강솔에게 다가가려 하는 찰나, 마지막 운이 띄어졌다.
“잔!”
“… 잔이 비었네?”
강솔은 수호에게 가득 채운 술잔을 건넸다. 수호는 활활 불타는 눈빛을 한 채 잔을 비워냈다. 능글맞은 웃음이 싹 사라지고 잔을 쥔 손이 살짝 떨렸다.
“와하하하..! 강솔 최고다 최고!!” 직원들은 다 같이 건배를 하고 마지막 술을 비워냈다. 모두들 싱글벙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준은 혼자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나섰다.
“강솔, 재밌는 친구야. 좀 더 지켜봐야겠네.” 그는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난 뒤, 수호는 팔짱을 끼고 강솔을 노려보았다.
“강비서, 취했어? 장난이 심하네.”
“본부장님은 일상이 장난이잖아요.” 좀 과했나, 강솔은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하, 그래. 내가 그런 사람이라 이거지.”
그는 정말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우비서님 불러드릴까요? 댁에 가실 거죠?”
휴대폰을 열고 연락처를 찾으려는 강솔의 손목을 낚아채듯 잡았다.
“너, 정말 일부러 그러는 거지?”
“어어, 본부장님..! 아파요!”
그는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강솔, 날 너무 자극하지 마. 네 그 태도, 참기 어려워.”
그의 얼어붙은 듯한 시선이 그녀를 두렵게 만들었다. 평소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모습에 당황한 그녀는 불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너, 너무 가까워.’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는 게 느껴졌다.
“… 화나셨어요?”
“그래, 아침부터. 밤까지. 아주 이현준 바라기 나셨네.”
강솔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차게 머리를 굴려 봐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얼어붙은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막 열려고 할 때, 수호가 눈을 감으며 천천히 손을 놓고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너무도 쓸쓸해 보여, 그녀는 더욱 말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안 돼, 내일도 또 만나서 같이 일해야 하는데.
잡아야 하나? 보내야 하나? 이대로?
생각해 내. 뭐라고 말하지?
강솔은 수많은 할 말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려보았다.
결국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짧게 한마디 말을 꺼냈다.
“2차 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