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는 메시지로
“뭐라고?”
수호는 잠시 멈춰 섰지만 여전히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2차요, 2차 가요, 본부장님. 저 할 말 있어요.” 강솔은 재빨리 수호의 뒤에 붙어 고개를 살짝 들이밀고 그의 얼굴을 보려 했다. 그러나 수호는 손을 들어 그녀를 밀어냈다.
“더 이상 너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수호는 터덜터덜 힘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수호의 마음속에서는 그녀가 자신을 다시 한번 붙잡아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잡으면 돌아설까, 그대로 갈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그의 안에서 복잡하게 뒤엉키고 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뺨을 스치던 그때, 수호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솔:[본부장님, 미안해요.]
솔:[제가 지나쳤어요.]
솔:[말하기 싫으면 메시지 해요.ㅠㅠ]
솔:[그치만 나도 말할 기회는 줘야죠.]
솔:[답장 안 해요?]
솔:[안]
솔:[해]
솔:[요]
솔:[?]
엄청난 속도로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졌다.
“아, 뭐야…” 수호는 다시 한번 멈춰 섰다.
역시 강솔, 이대로 포기하지 않네.
수호는 가슴 한편이 간질간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수호:[뭐가 미안한데?]
수호는 계속 걸으며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보냈다. 가로등 불빛을 따라 조금 떨어져 걷는 두 사람은 휴대폰으로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솔:[아, 뭐예요. 그 어려운 질문은?]
수호:[미안하다며.]
솔:[네… 기분 나쁘게 한 거요.]
수호:[그게 다야?]
솔:[계속 눈치 없이 굴어서요.]
‘강솔하고 말하는 것도 재밌는데, 이렇게 메시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어느새 수호의 차갑게 식었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든 그녀는 그 와중에도 수호의 귀가를 위해 재빨리 우비서를 호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앞에 우수한 수행비서가 다가왔다. “본부장님,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차 안에는 어제 그녀가 시간을 반복해서 돌리며 뽑기 한 곰돌이 키링이 놓여있었다.
여기 잘 뒀네. 강솔은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곰돌아, 네 주인 좀 어떻게 해봐.’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차에 탔다. 조수석의 강솔과 뒷자리의 수호는 계속 메시지를 하고 있었다. 우비서는 운전석에서 말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는 두 사람을 힐끔거리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솔:[어쨌든 제가. 많이 많이. 하루 종일 기분상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수호:[…..]
솔:[본부장님..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 나 오늘 집에 안 가요. 기분 풀릴 때까지.]
수호:[뭐야. 이제 협박이야?]
솔:[화내시는 거 처음 봐요. 그래서 어떡할지 잘 모르겠어요.]
수호:[-_-]
솔:[그나저나 화내시니까 좀 무섭네요.]
수호:[와, 당연하지. 나도 무서운 남자라구.]
솔:[곰돌이도 화난 본부장님 너무 무섭대요.]
강솔은 곰인형의 배를 꾹꾹 눌러댔다.
수호는 문득 자신의 너무 다른 모습에 그녀가 많이 겁이 났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수호:[이현준보다 날 좀 더 생각해 줘. 넌 내 비서잖아.]
솔:[저도 섭섭해요. 나도 인스타 있는데.]
풉, 수호는 크게 웃을 뻔했다. 그가 여직원들과 친하게 지내는 이유는 그들이 상대하기 편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그가 몇 마디 말을 걸면 자연스럽게 사내에 흐르는 여러 소식과 소문을 알려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게 즐겁기도 하고.
결국엔 여직원들과 노는 모습이 샘이 났다는 건데, 수호 본인에게 그런 모습은 일상이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여자들과 노닥거린다는 모습도 사실 그가 일부러 만들어낸 이미지였으니까.
하다 보니 적성에 맞는 것 같아 계속하고 있었지만.
수호:[인스타도 하는 줄은 몰랐네.]
솔:[눈팅만 해요. 홍보, 마케팅 참고하는 거죠.]
수호:[어휴, 또 일밖에 모르네..?]
솔:[일 아니었음 계정 안 만들죠.]
메시지 실랑이가 계속되고, 그들을 태운 차는 어느새 강솔의 집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곰돌이를 살짝 다시 올려놓고, 차에서 슬그머니 내렸다.
”항상 고마워요, 우비서님!" 그녀는 수호를 한 번 보고, 휴대폰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수호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두 분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수호와 둘만 차 안에 남자, 우비서가 룸미러로 수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냥 좀, 취해서 그런가. 다퉜어.” 눈치가 빠른 우비서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대로 운전을 계속했다.
수호:[뭐야. 집에 안 간다며. 쪼르르 가버렸네.]
솔:[협박 말라면서요? 그리고 급 피곤하네요.]
수호:[알았어. 잘 자.]
수호는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운 뒤에도 혹시 모를 그녀의 메시지를 기다렸다. 요즘 들어 이현준과 강솔을 생각하면 자꾸 짜증이 치솟고, 불쾌함을 느꼈다. 특히 그녀가 현준을 ‘이상형’이라고 말한 걸 들은 이후부터 더 신경이 쓰였다.
아까 회식에서의 5행시도, 장난에 농담을 섞은 걸 알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불안했다. 빼앗길 것 같아 조급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고, 자신을 항상 똑바로 바라보며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 귀엽고 새로웠다. 그녀는 유일하게 그의 시간 능력의 비밀을 알고 있고, 그걸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똑같이 대했다. 게다가 그녀와 있으면 사용할 때 부작용으로 인한 아픔도 없어진다. 그건 왜일까. 아마 운명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휴대폰을 다시 만지작거렸다. 그러다가 또 이현준 팀장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현준이야…’
수호는 작은아버지 한주원 부회장이 그룹 내 큰 파벌을 두었고, 주요 사업 기획을 담당하는 이현준팀장에게도 손길을 뻗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가 지금은 자기 소속이지만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야심가였다. 그래서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었다. 후계자 자리야 아무래도 좋다. 누가 되든 크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현준이 강솔을 데려간다면? 둘은 업무적으로도 잘 맞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그녀가 날 대할 때와 현준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도 달랐다. 생각만 해도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수호: [자? 나도 도착했어.]
수호는 기다리지 못하고 먼저 메시지를 보냈다. 곧이어 휴대폰 화면이 빛나며 강솔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솔:[알아요.]
짧은 한 줄의 메시지가 빠르게 도착했다. 수호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직 안 자네. 귀여워라.
수호:[뭐야, 나 감시해?]
솔:[ㅋㅋ 알고 계셨네. 우비서님 연락 왔어요. 잘 모셔다 드렸다고.]
수호는 약간 심통이 났다. 우비서랑 메시지 하느라 나한테 안 보냈나? 하는 생각이 들며 조금 섭섭함을 느꼈다.
수호:[근데 왜 아직 안 자?]
그렇지만 어쨌든 침대에 누워 자신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고 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수호는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솔:[내일 일정 확인하는데요.]
수호:[아 내일 하라고! 얼른 자.]
그 와중에 다음 날 일정이나 체크하고 있다니. 머릿속에 일 생각밖에 없는 거 아닌가.
수호는 혼자 중얼거렸다.
“일중독이네 강솔…” 정말 비서실 인력을 더 늘려야 하나 고민하려다가 그는 그녀의 다음 메시지를 보았다.
솔:[이상한 꿈 꿀까 봐…]
‘이상한 꿈? 뭔데 그러지?’
어차피 잠을 자면 꿈을 꾸게 되어 있는데, 악몽이라도 꾸는지 걱정이 되었다.
수호:[무슨 꿈인데?]
솔:[말도 안 되는 아주 이상한 꿈이요.]
차마 수호와 쌍둥이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꿈이었다고는 말을 못 하는 강솔이었다.
수호:[뭐야 그게. 내 생각하면 잠 잘 올 거야.]
설마 그 강솔이 말하는 이상한 꿈에 자신이 나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한 채 수호는 그녀와의 메시지 교환에 푹 빠져 있었다.
솔:[본부장님이 꿈에 나올까 봐 무서워요.]
수호:[ㅋ내가 꿈에 나오면 완전 길몽 아니야?]
솔:[-.-… 그냥 꿈 안 꿀래요.]
강솔은 그 이상한 꿈은 더 이상 꾸고 싶지 않았다.
‘괜히 얘기했나 봐. 본인이 나왔다고 그러면 평생 놀릴 거야. 아마.’
강솔은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수호:[그래, 빨리 자~내 생각하면서]
솔:[이제 화 풀리신 거죠? 내일은 가자마자 해장국 예약할게요.]
수호:[그것도 내일. 내일 하라니까.]
수호는 자기 전에도, 회식하고 온 날에도 일 생각만 하는 강솔이 좀 안타까워졌다. 강솔 덕분에 그가 확실히 전보다 일하기 편해지긴 했지만 그만큼 그녀가 더 많이 챙겨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은 잘 자려나. 내가 화내서 더 신경 썼을 거 같은데.’
수호는 그녀가 아까 꽤 난감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제야 조금 미안해졌다.
‘내일은 좀 더 다정하게 해 주지 뭐. 벌써 보고 싶다. 솔아.’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수호는 메시지를 다시 보냈다. 자야 하는데, 그녀와 메시지를 나누는 시간이 너무 즐겁다고 생각했다.
수호:[어쨌든 잘 자고 내일 보자.]
수호:[자냐? 응?]
수호:[… 잘 자...]
그 이후로도 도착하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가 수호는 잠이 들었다. 꿈에서 그녀를 만나길 기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