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과 순대국밥을
어느 토요일 오후, HY백화점 푸드코트 키오스크 앞, 은빛 머리를 단정히 넘기고 가벼운 리넨 재킷과 깔끔한 흰색 폴로셔츠를 입은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산책 나온 노인 같았지만, 자연스레 고개를 세운 자세에서 남다른 기품이 느껴졌다.
그러나 노인은 화면을 이리저리 보며 난감해하고 있었다.
‘허, 말로만 듣던 게.. 이거구만..’
“도와드릴까요?” 맑고 낭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마치 도와줄 사람을 기다렸다는 듯 노인은 돌아보았다.
“그러면 고맙겠네. 생각보다 어려워서. 미안하게 됐어요 아가씨.”
갈색 단발머리를 살짝 올려 묶고 동그란 안경을 쓴 남색 후드 트레이닝복 차림의 강솔이 살짝 미소 지으며 익숙하게 키오스크 화면을 두드렸다.
“어르신, 순대국밥 찾으시는 거죠?” 아까 노인이 찾던 화면을 유심히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솔은 차분하게 순대국밥을 2개 주문하고 결제까지 마친 다음 대기번호가 프린트된 종이를 꺼내어 노인을 빈자리로 앉혔다.
“아니, 계산은 내가…? 허허.. 이거 미안해서 어쩌지?”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강솔의 손에 이끌려 자리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키오스크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자신을 대뜸 도와주는 모습에, 순간 이 아가씨는 남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제가 한율그룹 한희준 회장님에게 점심을 사 보겠어요?” 강솔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했다.
노인은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는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았지?”
강솔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후드 안쪽에 숨어있던 사원증을 목에서 풀어, 한회장에게 내밀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기획본부장 비서 강솔입니다. 근무하는 회사의 회장님 얼굴도 모를 리 있나요. 긴가민가했는데…”
“허허, 토요일인데 사원증을 가지고 다니나?”
흰색 바탕의 사원증에는 머리를 단정하게 올리고 무표정하게 찍힌 강솔의 사진이 있었다. 회장은 요즈음 그룹 내 경영 활동에서 거의 물러난 듯한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봉사활동이나 사회공헌 활동 외에 큰 행사에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중요한 결정은 둘째 아들인 한주원 부회장이 맡아했다.
오늘처럼 백화점 나들이는 회장의 즉흥적인 돌발 행동이었다.
“백화점 매장 둘러보고 나서 사무실 출근하려고 챙겨 왔는데, 이렇게 쓸 일이 생길 줄은 몰랐네요. 명함은 다음에 드리겠습니다.”
강솔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주말특근 수당 신청하는 것으로 사는 거니 결국 회장님이 사는 거나 마찬가지네요… 아, 이상하게 회장님 앞에서도 이렇게 말이 편하게 나오네요. 사무실이 아니라서 그런가 봐요.”
마침 대기번호가 화면에 떴다.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가 순대국밥 접시를 한회장 앞에 살며시 가져다놓았다.
“회장님, 천천히 드십시오, 잘 먹겠습니다.”
그녀는 살짝 한회장을 보며, 그의 손자인 수호와 조금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숟가락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마음속으로 반복하여 생각했다. ‘그냥 동네 할아버지다… 이분은 아는 할아버지다..’
‘강솔이라… 눈치도 빠르고 싹싹하네. 수호가 아주 좋아하겠어.’ 한회장은 강솔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자신의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연신 종달새처럼 재잘거리며 편안하게 국밥을 먹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마치 친손녀 같은 느낌이 들었다.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MBTI가 I입니다.”
“허허.. 그래?? I라면.. 내향적이라는 게지?? 지금 처음 본 나에게 스스럼없이 대하는데 뭔가 잘못된 게 아닌가?” 회장은 연신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있었다. 회장과 점심 독대를 하면서 전혀 주눅 들지 않으면서 적절히 하고 싶은 말을 조곤조곤 해내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고 생각이 들었다.
“잘 보여야 하는 높으신 분들께는 선택적 E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모르게 말이 술술 나오는데, 초면에 너무 무례하지 않았나 걱정이 되네요.”
“아닐세, 정말 재밌는 시간이었네. 무례는 무슨.” 회장은 손사래를 치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회장은 속으로 웃음을 참았다. 높은 사람 앞에서도 기죽지 않고 농담까지 섞어내는 이런 직원은 보기 드물었다.
“순대국밥 맛도 괜찮죠? 이 백화점 푸드코트가 가성비 좋다고 맘카페에서 본 적 있어 실사 나왔거든요.”
“허허… 젊은 사람이 SNS가 아니라 맘카페를 봤다고?”
“아.. 네, 맘카페 맛집 정보도 알아두면 도움이 되거든요. 모니터링만 하니까요.” 강솔은 거리낌 없이 말하며 국밥을 비웠다.
한회장이 국밥을 다 먹고 수저를 내려놓자, 강솔은 재빠르게 남은 그릇들을 포개어 한 쟁반으로 몰아담아 반납을 마쳤다. 그리고는 그를 안내하기 위해 다가섰다.
“일부러 수행비서 대동하지 않고 혼자 오신 게 맞으실까요?” 강솔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백화점 안은 금세 쇼핑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렇지. 잠깐 마실 나왔다네. 매번 누가 따라다니면 영 내키지 않아서.” 한 회장은 여전히 미소를 띠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강솔 씨를 만나서 더 잘 된 거 같아. 허허.”
강솔은 자연스럽게 회장을 따라 백화점 매장을 둘러보았다. 회장은 편안히 살펴보는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백화점을 누비며 가끔씩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안내하는 그녀의 친절함에 회장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근데 내가 마음대로 강솔 씨 시간을 너무 빼앗은 게 아닌가? 이제 곧 내 수행비서가 도착할 걸세.” 회장이 그녀를 보는 눈빛에는 인자함이 한껏 넘쳐 있었다.
“아닙니다. 회장님을 만나 뵙고 밀착 수행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강솔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너무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미 회장은 강솔이 뭐라고 말해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마치 오랫동안 곁에서 본 손녀를 대하듯 미소 지었다.
“내 다음에 꼭 우리 강솔 씨한테 점심 한번 사겠네. 연락 갈 거야. 아, 수호도 같이 오도록 하게.”
“네. 일정 조정하겠습니다.” 강솔은 휴대폰을 꺼내어 일정을 메모했다. 회장은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도착한 검은색 리무진에 올라탔다.
그녀는 차에 탄 회장에게 꾸벅 허리 굽혀 인사했다. 돌아서려는 순간, 차창이 내려가며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회사까지 멀지 않으니 같이 타고 가지 않겠나?” 그녀는 고개를 흔들며 극구 괜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회장님 오늘 많이 감사했습니다.”
회장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차량은 부드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나 잘한 건가. 모르겠네.’ 강솔은 기지개를 켜며 발걸음을 옮겼다. 토요일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게 그녀를 내리쬐고 있었다.
***
토요일 오후, 회장님을 배웅하고 나서 출근한 강솔의 휴대폰에 메시지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우성훈 비서님: [오늘 고생했어. 회장님이 아주 즐거우셨나 봐. ]
강솔은 무심한 듯 휴대폰을 바라보며 답장을 한 줄 써 보냈다.
솔: [뭘요. 오빠도 항상 고생이 많으세요.]
그날 아침, 단톡방
(우성훈 비서) 미안, 회장님이 이따 XX동 HY백화점 다녀오신다는데, 혼자 가시겠다네.
오후엔 내가 나갈 건데, 혹시 시간 되는 사람 있어?
(강솔) 오빠, 제가 그 근처 살잖아요. 가 볼게요. 걱정 마세요.
(비서실 1) 오, 강솔..! 토요일 아침 칼답하는 것 봐.
(비서실 2) 주말에 약속도 없음? ㅠㅠ ‘강솔로’..ㅋㅋㅋ
(강솔) 갔다가 회사 출근할 거예요.. -.-
(비서실 1) 솔아…. (엄지 척)
(비서실 3) 저렇게 주말에 매번 나와서 일하면 매일 칼퇴하는 의미가 없는 것 아님?
(우성훈 비서) 고마워 솔아. 정말 미안. 내가 나중에 한 턱 크게 쏠게.
회장을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평소에 회장, 부회장을 비롯한 임원과 간부들의 사진과 일정을 챙겨보는 것이 강솔에게는 너무도 당연했기 때문이었다. 토요일 정오가 되기 전, 백화점을 찾는 노인이 흔한 편은 아니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걸음걸이의 노년 신사, 살짝 들떠 보였으나 키오스크 앞에서 당황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찾았다!’
강솔은 살짝 미소 지었다. 평소 비서들이 알아서 처리했을 일이기에 회장이 직접 기기를 다루는 모습은 드물었다. 그녀는 키오스크 조작이 어렵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감이 가득했다.
‘그렇지만 회장님이다. 절대 실수하면 안 돼.’ 강솔은 속으로 되뇌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회장의 뒤로 살짝 다가섰다.
“도와드릴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