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일상적인 투쟁의 공간
경기도민에게 지하철이란 무엇인가. 내겐 하루 평균 3시간을 고스란히 바쳐야 하는 투쟁의 공간이다. 대학교 통학 시절부터 직장인 출퇴근까지, 나의 길지 않은 인생에 지하철은 꽤나 커다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괴롭고 힘든 하루를 초장부터 진 빠지게 만들어주지만, 덕분에 먼 거리를 예측가능한 시간으로 오갈 수 있게 해주는 감사한 이동수단이다.
허나 그건 좀 더 깊게 생각해야 하는 굉장히 이상적인 마음이고, 현실에서의 지하철 통근은 그저 피곤할 뿐이다. 회사를 다니면서는 어떻게든 이 긴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 사이버 대학교에 편입하여 강의를 들으며 추가 학사를 따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 졸면서 수강하고, 시험도 잘 본 편이 아니라 학점이 좋지는 않았다. 이때의 눈물겨운 학구열을 살려 코딩학원의 개인 과제로 경기도민 대상 출퇴근 서비스를 만들어보기도 했다. (설정해 둔 출발지와 목적지에 따라 실시간 대중교통 안내와 자기 계발 기록을 통합하는 시스템이었다. 충분히 수요 있는 서비스라고 자신하며 기획했다. 관심 있으신 분들 함께 만들어볼래요? 하핫)
이렇게 벌써부터 지하철에 관해 넘쳐흐르는 나의 푸념과 추억의 토크 보따리. 지금부터 딱 5개만 가볍게 풀어보겠습니다.
1. 무르팍이 깨지는 출근길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의 도착지에 맞추어 그 흐름에 함께 휩쓸리거나 절대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아침부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니까. '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하철을 못 내려서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 이런 억울한 아침 인사는 너무너무 싫다고! 특히 핸드폰에 정신을 빼앗기는 건 아주 위험하다. 그날이 하필 그랬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들어보니 내려야 할 도착지였다. 그리고 이미 문이 닫히고 있었다. 으악! 가까스로 밖으로 몸을 던져 일단 잘 내렸다. 퍽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은 채로. 그래도 다행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절뚝거리며 환승하러 또 뛰어갔고,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피가 철철철철 흐르고 있었다. 결국 양해를 구하고 병원에 다녀와야만 했다. 지각보단 차라리 피를 흘리는 게 낫다고 진심으로 안심했던 신입 시절의 출근길.
2. 닫힌 문을 여는 마법의 액션
미친 듯이 뛰어왔지만 눈앞에서 문이 닫혔다. 아 안 돼! 제발요! 닫힌 문 앞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짱구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온몸으로 절망을 표현했다. 그러자 스르륵, 마법처럼 문이 열렸다. 실제로 기관사 분들이 모니터로 승객들의 동선을 보며, 상황에 따라 닫힌 문을 열어주실 때도 있다고 한다. 제시간에 맞게 무탈히 탑승하는 게 제일 좋지만, 어디 모든 일이 그렇게 정확하고 알맞게 흘러갑니까? 흑흑. 우리는 여기서 인생의 중요한 교훈을 낚아챌 수 있다.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뭐라도 애처롭게 어필해야 한다는 것! 꽤나 거창한 인사이트지만 막차를 놓칠 뻔한 순간에서는 아주 아주 요긴한 명심보감이랍니다.
3. 압구정 막차 요정
연이은 야근으로 지친 어떤 평일 저녁. 또 지하철 막차 시간에 맞춰 퇴근하고 달려왔다. 당시 코로나 시절이라 배차 간격이 꽤 길었었고, 심지어 나는 3호선 대화행을 타야 했기 때문에 구파발행을 보내며 하염없이 기다렸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바람을 가르며 대화행이 도착했다. 하지만 난 일어나지 않았다. 어? 나 저거 타야 되는데. 꾸벅꾸벅 졸면서 반쯤 뜬 눈으로 멍하게 지하철 문이 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시 눈을 감았다. 그 순간, 검은색 비니를 쓴 잘생긴 힙합스러운 남자가 내게 말을 건네며 사라졌다. '일어나세요. 막차 타셔야죠.' 허둥지둥 눈을 번쩍 뜨고 문이 닫히기 전에 쏜살같이 뛰어들었다. 그는 누구였을까. 다음날 회사에서 나의 막차 요정 이야기를 퍼트리자 누군가 얄밉게 쏘았다. 엥? 귀신 아니에요? 그 말에 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으며 탄식을 터뜨렸다. 아! 귀신도 나의 편이구나!
4. 첫 명품 지갑의 운명
남자친구가 기념일을 맞아 선물했던 첫 명품 지갑. 커다란 브랜드 로고가 박혀있어 누가 봐도 명품인 것을 뽐낼 수 있어 오히려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회초년생이던 남자친구가 한 푼 두 푼 모아 장만했던 선물이니 소중하게 지니며 모든 출퇴근길에 함께했다. 그리고 금세 잃어버렸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의자에 앉아 '아케인'이라는 넷플릭스 애니메이션에 심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지하철이 왔고 그 안에서 또 열심히 봤다. 도착지에 내려 개찰구에 카드를 찍으려고 보니 없다. 나의 소중한 지갑이. 물건을 잘 잃어버리는 편이 아니라 더더욱 패닉에 빠졌다. 무엇보다 남자친구에게 미안했다. 며칠간 분실물 보관소에 계속 연락해 보았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자숙의 의미로 동생이 버린 꼬질꼬질한 전시회 굿즈 카드지갑을 가지고 다녔다. 명품 지갑을 바칠 정도로 날 홀렸던 명품 애니메이션 아케인, 적극 추천합니다.
5. 빈자리에 미친 내 친구가 지하철 기관사라고?
1교시 수업을 가는 이른 아침. 난 전략적으로 1호선 출발지인 용산역까지 와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했다. 몇 정거장을 거쳐 창문 너머 친구가 보인다. 인사하려 손을 들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지하철이 멈출 때까지 안 그래도 큰 눈을 바짝 치켜뜨고 고개와 함께 눈알을 요리조리 굴리며 혓바닥을 낼름거리고 있었다. 빈자리를 찾기 위한 하이에나의 그 악착같은 눈초리. 너무 무서워서 입을 벌린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문이 열리자 그녀가 벼락처럼 내리치며 몇 없는 빈자리로 순간 이동했다. 아침부터 승리를 쟁취한 대견스러운 나의 친구. 대학 시절 우리에게 1호선은 고통과 전쟁의 통학길이었다. 대학교 입학식 그리고 정확히 10년 후. 놀랍게도 그 친구는 지하철 1호선의 기관사가 되었다. 우리의 전공인 식품공학과와 전혀 무관한 이야기다. 지금 나에게 1호선은, 인생의 개연성이란 대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성찰의 단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