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너는 존재하는가?
크루아상이 내게 따뜻한 행복을 주었다면, 그건 당연하지 않은 일이다. 분명 커다란 행운을 받은 날이 틀림없다. 분명 어느 날엔 그렇지 않은 눅눅한 덩어리를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까. 그때에 우리가 할 일은 조금만 투덜거리고, 찾아올 다음번 행운의 크루아상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대하던 첫 한 입. 그리고 그 한 입에 모든 것을 파악했다. 아, 실패다. 이것은 맛없는 크루아상이다. 찬찬히 돌이켜보면, 이미 내 손은 알고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쥐고 있던 집게가 정작 그 앞에서 이미 머뭇거렸다. 나를 재촉하는 버터의 풍미가 없었고, 촘촘하게 쌓여있어야 할 얇은 벽들이 벌써부터 흐물흐물한 뭉텅이로 보였다. 그래도 여기는 맛있는 베이커리 브랜드잖아! 난 지금 꼭 크루아상을 먹고 싶단 말이야. 왠지 모를 기시감을 외면하며 너를 택했고, 너는 내게 탄식으로 다가왔다.
모르겠다. 어째서 맛없는 크루아상이 존재하는가? 너의 존재의 목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이냐? 과거의 이곳은 내게 행운의 크루아상을 건네던 카페였다. 가뜩이나 빵값도 비싼 대한민국에서 쉽게 지나칠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지금부터 이 사태를 아주 진지하게 고민해 보자. 하여 내가 추측해 본 5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원래 이 맛인데, 내 기준이 높아졌다. → 입맛 고급화 이슈
미리 말하자면 1번이 제일 나은 선택지다. 원인이 명확히 나한테 있으니까. 이곳저곳에서 접한 크루아상 리스트를 떠올려본다. 그래, 그때 참 맛있었고, 저때는 좀 아쉬웠고, 오늘은 꽤 부족하구나. 내가 성장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며 애써 넘어갈 수 있다.
2. 하필 오늘만! 나와 이 맛의 궁합이 안 맞았다. → 컨디션 이슈
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날도 저런 날도 있는 법이니까. 다음번엔 꼬옥 오늘 몫까지 더해 나의 따뜻한 천국이 되어 주렴. 여기까지는 그래도 긍정적인 척하며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3. 보관을 잘못해서 원래의 맛이 변했다. → 관리 이슈
슬슬 억울하면 튀어나오는 입술이 시동을 건다. 생각해 보니 이 날 비가 살짝 내렸었다. 온도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민한 아이들이다. 그렇다면 내가 덜 예민해지는 수밖에 없는 걸까? 오븐이든 에어프라이어든 살짝 데우면 나름대로 괜찮아질 듯싶은데, 또 그런 서비스는 없다고 한다. 이것 참. 아무래도 날을 잘못 골랐다.
4. 맛을 만들어내는 것들이 변했다. → 재료 변경 이슈
나 같은 소비자는 쉽게 알 방도가 없는 분야다. 더 저렴해진 비율로 레시피가 바뀌었다 한들, 가격은 절대 떨어지지 않는 게 빵 세상의 법칙이지 않는가. 그저 돈을 내밀며 바보처럼 당할 수밖에 없다고!
5. 오래되어 최상의 순간을 지나갔다. → 묵은지 이슈
이건 정말 심각한 손해보상의 차원이다. 떨이도 아니고, 난 정가에 샀다구요! 하지만 나름의 체계를 갖춘 곳일 테니 이건 아니지 않을까 희망해 본다.
위 5개의 가설 중, 정답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성격 상 컴플레인을 걸지도 않는다. 이렇게 혼자 투덜거릴 뿐. 소중한 음식을 두고 '먹어 치운다'라는 말을 쓰는 것을 꺼리는 편이지만, 이 맛없는 크루아상을 먹어 치우며 깊이 깨달았다. 그간 운이 좋았었다.
어느 빵집이든 응당 갖추어야 할 클래식한 빵 리스트가 있다면, 크루아상이 그곳에서 빠질 리 없다. 아주 익숙하고 자칫 지루해 보일 수도 있는 이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기대를 충족시켜 주는 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저 그런 맛이 연달아 이어지면 자연스레 설레는 손길을 멈추게 된다. 하지만 크루아상 하나 사는 일이 용기까지 거론해야 할 무시무시한 일인가? 지나가버린 아쉬운 선택에 그 이상으로 매몰되고 싶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할 무수한 도전에 크루아상까지는 넣지 말자. 나는 널 좋아해. 가끔 별로인 날이 있어도 행복했던 기억이 더 크기 때문에 괜찮아. 그래서 나는 또 새로운 크루아상을 만나러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