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OK Oct 04. 2021

1화. 갑자기 베트남?

나는 아무런 준비도 없이 대학교를 졸업했다.

계획해 두었던 핑크빛 미래는 남자 친구와 헤어짐과 동시에 박살 났다. 사랑이 전부였던 20대의 나에게 찾아온 예정된 시련이었다. 나는 졸업 후 싱가포르에 갈 계획이었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그리고 '계획되지 않은 실패'는 내 삶을 엉뚱한 곳에 데려다 놓았다.




패션디자인과 시각디자인을 복수 전공하던 학부생이었던 시절이다. 

2학년 학기가 끝날 즈음 지도교수님의 호출이 있었다. LA에 인턴쉽 프로그램이 있는데 참여할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미국 유명 백화점에 납품을 하는 규모 있는 벤더 회사라 했다.

단칼에 거절했다. 

적어도 3개월은 LA에 있어야 하는데, 당시 남자 친구와 만난 지 1년밖에 안되었던 나는 남자 친구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지금 그때로 돌아가면 맹랑한 소릴 하는 내 정강이를 걷어차고 당장 미국에 가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20대의 나는 겨울방학을 남자 친구와 알차게 낭비한 후 3학년이 되었다.


계획대로라면 3학년을 끝으로 졸업했어야 했다.

동기들과 같이 졸업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1년을 조기졸업해야만 했다. 내가 첫 학기를 마치고 1년을 휴학했기 때문이다. 휴학의 이유는 흔한 레퍼토리.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해 방황했다. 

쉬는 동안 뭐했냐고? 당연히 반수 했다. 

당시 홍익대학교에 내신과 면접으로만 뽑는 예대 ‘자율전공' 학부가 처음 생겼다. 내신성적이 꽤 괜찮았던 나는 서류전형을 통과하고 면접을 앞두고 있었다. 새로 생긴 전형이라 경쟁률도 높지 않았다. 합격할 것이라 생각했다. 

면접에 갔었다면 말이지.

날짜를 착각했다. 그걸 발견한 건 면접에 갔어야 할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 그렇게 반수가 허무하게 끝났다. 다시 원래 다니던 학교에 돌아간 나는 졸업이라도 일찍 하자 싶었다.


조기졸업의 목표는 꽤 순조롭게 흘러갔다. 졸업전시회를 준비하는 기간은 정신이 없었다. 복수전공이라 패션쇼와 전시회 2개를 준비해야 했다. 준비할 것이 아주 많았지만, 그래도 할만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귀던 남자 친구가 내 운전대를 돌려놓는다. 

같이 뉴욕에 가자는 제안을 한다. 당시 남자친구는 뉴욕에서 다니던 학교를 휴학하고 한국에 나온 상태였다. 나도 다녀보고 싶었던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흔쾌히 오케이 했다. 2학년도 마쳤으니 편입을 준비하자. 열심히 준비하던 졸업전시회를 중단하고 휴학했다. 한학기만 더 다녔으면 졸업이었는데, 바보같이 휴학했다. 남자친구가 9월 학기에 복학해야 하니 이사 먼저 가자는 말에 들떠서 그랬다. 무려 뉴욕 아닌가. 디자인과 패션으로 유명한 도시. 뉴욕이라는 이름은 내가 졸업전시회를 쉽게 내팽겨치게 만들었다. 나는 들뜬 마음으로 필요한 공인 영어 성적과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뉴욕? 오케이! 콜!

그러는 중에 남자 친구가 말한다. 못 가겠다고. 그래, 그럴 수 있지. 처음에도 말했지만 사랑이 전부였던 20대의 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도 이해했다. 남자 친구의 결정에 그의 어머니가 더 미안해했다. 자기 아들 때문에 내 계획이 틀어졌다며. 괜찮아요. 정말 괜찮았다. 

어머니가 연신 사과하자 남자 친구가 말했다. 졸업하면 싱가포르에 가자고.


나는 인생의 운전대를 남에게 맡기는 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어렴풋이 느꼈다.

할 수 없이 그 다음 해 봄, 나는 복학했다. 두 번째 준비하는 졸업전시회. 괜찮다. 졸업을 1년 미뤘던 동기들, 밑 학번 후배들과 함께 숱한 밤을 새우며 즐거웠다. 무사히 패션쇼와 디자인 전시회를 마쳤다. 졸업전시회가 끝나자 많은 아이들이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상반기 공채를 위해 인적성을 준비하는 아이들도 있었고, 추천을 받아 인턴쉽을 시작한 이들도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닐 때의 패션업계는 비공개 채용 즉, 학교 추천, 헤드헌팅, 사내추천이 많았다. 당시 교수님 집필을 도와드리고 있던 나는 좋은 면접 자리를 소개받게 된다. 

그리고? 또 거절했다. 이건 정강이가 아니라 정신 차리라고 뒤통수를 세게 맞아야 한다.

남자 친구와 졸업하고 싱가포르에 가기로 한 약속했기 때문에 그랬다.


그다음은? 남자 친구가 또 마음을 바꿨다. 싱가포르의 회사에 입사지원서를 넣고 면접을 보고 있던 나는 화가 났다. 못 가겠다고 말하는 타이밍도 기가 막히게 공채가 모두 끝난 시점이었다. 화가 난 나와 남자 친구의 사이는 순탄치 못했다. 당연히 많이 싸우게 되었다. 

결국 그 해가 가기 전 헤어졌다. 나는 그렇게 남자 친구도 잃고, 취업도 못한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이 한 가지 교훈을 새긴다. 나를 사랑하자.

휴학도, 취업을 싱가포르로 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모두 내가 한 결정이다. 그렇지만 내가 아닌 남자 친구가 좋아할 만한 선택을 하기 위해 애쓴 결정이었다. 연인을 사랑하는 마음,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아주 조금만 더 나를 사랑하자. 내가 가장 기뻐할 일을 하자. 내가 나를 위해 목소리를 내자. 그런 다짐을 했다.


그렇지만 마음만 먹었을 뿐, 상황이 나아진 건 없었다. 의욕은 당연히 바닥이었다. 취직하지 못한 나는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살며 비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일들을 했다. 얼마간은 밤을 새우며 일했고, 어떤 때는 일이 없어 아무것도 안 했다. 졸업한 지 1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그런 나를 보는 엄마가 답답했던지, 9시부터 6시까지 일하는 직장에 다니라고 타박했다.


당시 공채 시즌이라 몇 군데의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다. 

그중 최종면접까지 2군데에 붙게 되었는데, 하나는 대기업 계열사의 시각디자이너 직군이었고, 하나는 ‘2014코트라글로벌마케팅인턴’ 프로그램이었다. 대기업은 디자이너로서 업계 비교하여 연봉이 높은 수준이었다. 인턴 프로그램은, 말 그대로 생활지원금이 조금 보태지는 인턴쉽이었다. 당시 주목받고 있던 5개 국가; 인도네시아, 일본, 베트남, 인도, 말레이시아에서 총 6개월 혹은 8개월을 보내는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베트남으로 지원했다. 모집요강에서 의상디자인과 졸업생을 우대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인턴은 3개월 언어 교육을 마친 후 나머지 3개월엔 매칭 된 회사에서 근무하는 방식이었다.

*코트라에서 인턴을 하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코트라가 매칭 시켜주는 해외에 있는 회사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엄마가 기뻐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대기업에 갈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전 남자 친구의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왔다. 나랑 만날 때 바람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하던 여자와 사귄다는 이야기. 회사 선택을 앞둔 며칠 전 정말 우습게도 그를 길에서 마주쳤다. 


나를 아직 좋아한다고 했다. 

울면서. 마음이 약해졌다. 그 여자와 정말 사귀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다시 사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괘씸했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그럼 그 여자와 헤어져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대답이 없다. 전 남자 친구는 재차 그 여자를 안 좋아한다고, 좋아하는 건 나라고 했다. 그러나 또 헤어질 순 없다고 했다. 할말이 없었다. 그렇게 그를 지나쳐 왔다. 어디로든 떠나고 싶었다. 소식이 닿지 않고, 추억이 떠오르지 않는 곳으로.


대기업은 탈락했다 거짓말했다. 그리고 코트라 인턴에 참여했다. 이곳이 나를 추억으로 부터 멀리 떠나보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척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베트남에 간다고 말했다. 친척오빠는 디자이너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의아해했다. 의류 공장이 대부분이라 시각디자이너로서 할 일이 많지 않을 것이라며....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던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그렇게 5월 한 달 사이에 짧은 국내 합숙교육과 3주간의 개인 준비기간을 거쳐 베트남으로 떠났다.

국내 합숙교육 : 팀별로 과제를 수행한다. 하라는 건 또 열심히 한다.


오래 있을 생각이 아니라서 부모님의 마중을 막았다.

새벽에 출발해야 해서 부모님께 주무시라 했다. 아빠가 일어나셔서 공항까지 태워준다 했지만 극구 사양했다. 어차피 6개월 후면 올 텐데.

베트남에 뼈를 묻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는 몇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헐렁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에 오른 사람은 총 18명. 17명의 사람들은 후기 3개월에 일할 회사를 매칭하고 왔다. 적극적이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오직 나만 매칭 된 회사가 없었다. 전기 3개월이 끝날 때까지 매칭 된 회사가 없으면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에게 해당되는 얘기였다. 


그러나 길어야 6개월이라고 생각한 베트남행은 해외창업까지 이어진다.






해외취업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팁


한국 대학을 갓 졸업한 한국인을 외국회사에서 뽑는 일은 흔하지 않다.

서양권에선 레퍼런스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취업비자를 잘 내주지 않는다.

동남아 쪽 현지 회사는 급여가 낮아 지원할 마음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

그럴 때 활용할 수 있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하고 싶다.


#K-move 

(내가 베트남에 오게 된 프로그램도 K-move의 일환이다.)

정부는 여러 부처에서 운영하던 청년 해외진출 지원을 한 곳에 모으게 된다.

그렇게 개편된 ‘월드잡플러스'

https://www.worldjob.or.kr/

해외에 진출해 있는 한국계 기업에서 한국인을 채용하는 공고가 대륙별로 올라와있다.

직무마다 다르지만 중소기업의 평균 연봉은 된다.

그렇게 취업한 회사에 1년을 다니면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해외취업장려금도 지원해준다.


지원금 우대 국가 | 600만 원

동남아, 중남미, 중동, 유라시아, 아프리카 등 신흥국(선진국 분류 25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

(1차) 취업 후 1개월 : 300만 원 지급

(2차) 취업 후 6개월 : 100만 원 지급

(3차) 취업 후 12개월 : 200만 원 지급


선진국 분류 국가 | 400만 원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뉴질랜드, 덴마크, 독일, 룩셈부르크, 미국,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스페인, 아이슬란드, 아일랜드,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 이스라엘, 이탈리아, 일본, 캐나다, 포르투갈, 프랑스, 핀란드, 홍콩


한번 취업비자를 받았던 기록이 있으면, 다음 비자받기는 좀 더 수월해진다.

서양권의 경우, 다녔던 회사에 연락해 레퍼런스 확인하기가 쉬워진다. 

자연히 이직하고자 하는 사람의 신뢰도도 올라간다.


작가의 이전글 1화. 술,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