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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움 Aug 04. 2018

매드맥스, 역설적인 분노의 질주

키워드로 분석한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조지 밀러 감독이 매드맥스3 를 연출한지 30여 년 만에 나오는 신작 시리즈였다. 10여 년 전부터 여러 영화를 기획하고 엎어졌지만, 그 중 매드맥스의 신작만은 완성하고자 하는 감독의 집념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사막을 방랑하며 연신 ‘쓰레기’라는 단어가 넘치던 전 작들에 비해 캐릭터들과 서사는 더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진다. 또한 액션 특유의 장르적 쾌감은 기하급수적으로 발전시키면서도 페미니즘의 코드를 사용하면서 주제의식은 선명하게 잡았다. 매드맥스의 내러티브와 영상적 특징들을 통해 어떻게 이 영화가 페미니즘과 정치에 대한 주제의식을 묘사해나가고 구성되는지 살펴보고 나아간 현대사회에 제시하는 시사점을 찾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흔히 외화를 본다고 하면 영어에 익숙치 않은 누구든지 자막에 집중하게 되기 일쑤다. 어떤 때에는 자막을 읽는 와중에 중요한 혹은 인상적인 영상 기법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는 영화적 체험의 부재로 영어권 이외의 관객들에겐 공허한 관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매드맥스는 그런 걱정을 할 필요없이 효과적인 미장센과 액션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영화다. 대사가 거의 없어 마치 무성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도 든다. 기존의 할리우드에서 찍어내던 관습적 플롯은 사라지고 독자적인 플롯을 구현해냈다. 심지어 영화에서 보여주는 내러티브마저 단순해 원초적인 액션장르 특징에 초점을 맞추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계속해서 강하게 이어지는 폭발과 경주 시퀀스는 사실주의적인 색채로 관객에게 영화적 체험을 제공한다. 

          

  내러티브 _ 물을 소유한 임모탄이 독재로 지배하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의 시타델은 언뜻 봐선 평화로워 보이기도 한다. 모두가 제 역할에 따라 돌아가고 있는 상황은 익숙하지 않을 뿐 자연스럽게 보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요소는 시타델이 철저히 남성주의적인 ‘힘’의 질서로 그리고 인간의 도구화로 돌아가고 있는 사회라는 것이다. ‘워보이’라고 불리는 남자들은 전쟁의 도구로서 발할라에 가기 위해 임모탄에게 충성을 바친다. 그리고 여성은 출산의 기구 혹은 모유를 채취하기 위해 가축화되어 착취의 구조가 비춰진다. 모성성을 잃어버린 ‘모유’라는 소재는 그저 식욕의 충족을 위한 도구로서 전락한다. 삭발을 하고 여성성을 감춘 전사 ‘퓨리오사’가 임모탄의 번식을 위한 부인들을 데리고 이러한 사회 궤도에서 이탈하는 행위는 주체가 여성이라는 데에 큰 상징성이 있으며 인간의 도구화에 대한 반발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감독은 여성에 대한 영상의 성적 묘사를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할리우드 및 상업영화에서 거의 관습적으로 사용되는 여성의 몸매에 대한 고의적 클로즈업과 같은 성상품화를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계속해서 펼쳐지는 전투 신에서는 다섯 명의 부인들을 각각 성격에 따른 개성적 주체로 묘사하는 등 페미니즘적 코드를 보이고 있다. 맥스와 눅스는 이전에 녹색의 땅이었던 진창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여성들의 조력자가 되어 같이 사라진 녹색의 땅을 찾아 나선다. 남자와 여자, 양성의 연대는 시타델에 만연해있던 남성주의적 시각에 의한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는 복선으로 작용한다. 녹색의 땅은 없다던 사실이 던져지고 여성과 두 조력자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제시된다. 계속해서 찾아 헤맬 것인가. 혹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에 나타나는 자막은 이 맥락에서 유의미한 주제의식을 보여준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는가?”조력자들과 함께 결정한 선택지는 단순했다. 시타델로 향한 것은 자신으로의 회귀와도 맥락을 같이 한다. 도피는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없다는 서사적 맥락은 주제의식을 한 층 더 부각시킨다. 임모탄의 죽음, 그리고 여성의 의한 혁명 코드가 대입된 뒤의 맥스의 눈빛에는 양성의 연대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음을 시사한다.  전체적인 구조로 보았을 때, 맹목적인 구원, 쾌락을 상징하는 임모탄 체제는 가부장적 남성주의를 대표한다. 혁명 뒤의 여성세력, 특히 물을 하사하는 여인은 다름이 아니라 도구화되어 모유를 착취당하던 여성이었다. 이는 여성성의 회복, 인간 주체로서의 회복이 퓨리오사에서 다섯 부인들로, 이제는 착취당하던 여성에게 까지 점진적으로 퍼져나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액션, 미장센 _ 비하인드 스토리에 의하면 매드맥스의 대본은 시나리오보다 스토리 보드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영화적 내러티브보다는 액션에 치중했다고 한다. 관객에게 뤼미에르와 같은 초기 영화의 극사실주의에 버금가는 영화적 경험을 달성시켜준다. 장대에 매달려 적에게 달려들기도 하며 시도 때도 없이 터지는 전통적이며 마초적인 액션은 세부적인 디테일과 결합되어 더 만족스러운 그리고 완벽한 액션을 조성한다. 특히 영화의 BGM과 연결되는 음악을 연주할 때마다 불을 내뿜는 더블넥 기타를 치는 장님 기타리스트, 그리고 그가 타는 두프 웨건(doof wagon)은 기괴하리만큼 세련되어 이 영화의 마스코트로 불리기도 했다. 액션과 음악이 함께 호흡하는 방식으로 더 생동감을 주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투에 있어서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북을 치는 등 연주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일종의 군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이고 또 다른 면에서는 세련된 독특한 미장센은 관객들을 더 깊숙이 전투에 참여시키게 한다. 액션에 쓰이는 차들은 모두 제작하여 촬영에 사용되었으며 각기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할 정도로 디테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사막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카체이싱 액션은 크게 보아 한 장면이라 볼 수 있다. 도무지 정점에서 내려오지 않는 액션은 제목에 걸맞게 “분노의 도로”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각각 쫒기고 쫒는 목표가 뚜렷한 캐릭터들 사이의 추격전은 마치 서부극의 그것을 떠올리게도 한다.           

  페미니즘 : 영상텍스트는 내러티브와 스타일 혹은 미장센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분석해보았을 때,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모순적인 특성을 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스타일은 거칠고 강한 마초적 이미지 및 소구들로 이뤄졌지만 막상 영화의 주제의식은 여성을 향하고 있다. 영화에 사용되는 소구들은 하나같이 남성성이 짙다. 해골문양이 새겨진 바이크와 8기통 엔진, 그리고 계속해서 액션 신에 변주되어 나타나는 헤비메탈 음악은 여성들이 질색할 요소로 꼽힐만도 하다. 하지만 뛰어난 운전실력으로 기지를 발휘하는 여전사 퓨리오사의 모-습은 존재 자체로도 양성의 평등을 이미 자연스럽게 관객에서 시사한다. 또한 이 내러티브는 하나의 혁명 이데올로기이다. 체제를 전복시키는 사회적 약자(영화 맥락상 여성)들은 결코 도구적이지 않다. 스스로 정조대를 끊는 장면은 도구화된 자신을 극복하고 개별적 인간 주체로 변모하였음을 암시한다. 오른쪽 사진 중 가장 앞에 있는 여성은 임모탄의 아이를 임신한 ‘스플랜디드’이다.  임모탄이 ‘아이가 자신의 소유’임을 외치자, ‘우리는 도구가 아니다(We are not things)’라고 외치는 장면은 페미니즘 코드의 정점을 찍는다. 임모탄 세력과의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감독은 부인들의 신체적 열등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스스로 할 일을 찾아나서는 주체적인 여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는 달리는 차에서 밖으로 나가 정찰을 하는가 하면 누구는 남은 무기들의 숫자를 헤아린다. 스플랜디드는 여성 반란세력의 실질적 리더에 해당한다. 포스터에는 여전사로써 퓨리오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모든 행동은 그녀에게서 결정되어진다. ‘임신’이라는 극 중 설정은 도구화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몸부림을 극대화시켜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퓨리오사는 여성이지만 모유를 생산하는 수단이 아닌 사령관이라는 위치까지 올라간 강인한 캐릭터이다. 기계로 대체된 한쪽 팔은 영화 상에서 주목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얼마나 많은 시련을 겪었을지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그녀가 왔던 녹색의 땅, 여성사회에서 모든 여성은 바이크를 타고 스스로를 지킨다.  시타델으로의 회귀, 즉 체제의 전복은 두 명의 남성 조력자에 의해 제안된다. ‘맥스’는 성적 도구화가 되어 정조대를 차고 있던 부인들처럼 피주머니로 도구화되어 한동안 마스크를 차고 나온다. 하지만 영상 맥락은 둘 중 어느 하날 더 부각시켜서 나타내지는 않는다. 이는 페미니즘의 본질적 내용, ‘남성과 여성, 여성과 남성은 평등한 존재’임을 문맥적으로 강력히 전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맥스는 초반부에 자신이 지키지 못한 사람들의 환영에 시달리지만, 여성 집단을 도와가면서 환영은 더 이상 자취를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혁명을 돕는 일이 많은 사람들의  맥스가 마스크와 동일시되는 도구화의 대상에서 벗어나려 노력하는 반면, 병약한 워보이인 ‘눅스’는 임모탄을 신적으로 받들며 워보이들의 천국 ‘발할라’로 인도할 임모탄을 위해 자신의 도구화에 기꺼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전투 중 죽음에 가까워지면 그들은 ‘Witness me!’(기억해줘!)라고 외치며 불멸성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크롬 스프레이를 입에 뿌리는 행위는 영화 내에서 디테일하게 재현된다. ‘발할라’와 임모탄을 향한 종교적 수준의 맹신은 시타델의 남성주의와 도구화 사회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여성을 착취하는 구조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던 눅스는 아이러니하게도 여성에게 받은 위로를 계기로 체제를 붕괴시키는 일에 동참한다. 영화 속 두 캐릭터를 통해 도구적인 삶에 전염되어있던 체제의 전복은 완성된다.


  도구화 사회, 혁명 코드 _ 이제 사회상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이다. 이는 페미니즘 시각과 종합하여 현대사회에도 던지는 시사점이 유의미하기 때문에 중요한 목차일 것이다. 철저히 모든 사람을 도구화하여 시타델을 지배하는 임모탄 조는 영리한 방식으로 국가 체계를 만들어 냈다. 일반인들에게는 주기적으로 물을 제공하며 ‘물에 중독되지 말라’고 외친다. 복종의 이유는 다름 아닌 ‘생존’이다. 잠시 비추는 풍족한 임모탄의 생활공간에 비해 잠깐동안 뿌린 물 세례를 은혜로 받들고 추앙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하다. 또, 앞서 말했듯이 워보이들에게는 ‘발할라’라는 구원의 징표를 제시한다. 이는 종교적으로도 해석이 가능한데, 내세적 금욕주의와 긴밀한 연관성을 지닌다. 임모탄에게 충성을 다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는 달콤한 말을 던진다. 워보이들이 죽을 때 외치는 Witness란 단어에는 ‘기억하다’ 외에 뜻이 있다. 바로 ‘지켜보다’라는 뜻이다. 자신이 체제에 얼마나 헌신적이었으며, 이는 발할라의 문턱에 있다는 상징임을 지켜봐 달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장면을 수천 번 지켜볼 다른 워보이들에게는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임모탄에 의해 ‘구원’ 코드가 쓰여지는 견고한 체제는 퓨리오사에 의해 무너지는 와중에도 그 무서움을 보여준다. ‘출산의 도구화’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부인들 중 한 명인 프레자일이 상황이 여의치 않자 임모탄에게 돌아가려 하는 장면은 체제의 달콤함이 인간의 사고를 무기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바를 시사한다. 상대적인 특혜를 받는 여성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체제를 정상이라 여기고 그 사회에 자신을 일원으로 세우고 싶은 욕구가 만연할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중세 교회가 큰 영향력을 부수던 계몽주의 시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시타델이 종교적 맹신을 강요하던 전근대적 교회라고 한다면 반란을 일으키는 퓨리오사는 ‘개인’이다. 그리고 영화 상에서 이 혁명은 성공한다. 하지만 완벽한 혁명이라 하기에는 부족한 점들이 있다. 혁명의 진행에 있어서 대중, 사람들의 역할은 전무하다. 그저 생존이 목적인 사람들에게 지배체계가 바뀌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것이며 실제로 지배자만 바뀌어질 가능성도 공존한다. 녹색의 땅을 찾아 헤매는 여성 집단은 결국 기존 사회집단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닌 혁명을 선택했다. 기약 없는 여정 대신 체제의 전복을 위해 돌아온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간 맥스와 눅스가 보여주었던 연대 정신이다. 앞서 말했듯, 양성의 상호 연대야 말로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가 제시하는 페미니즘의 한 해결책이며, 단순한 지지로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또한, 혁명의 완벽한 완성을 위해서는 체제가 사람들을 속이던 방식들에서 탈피해야 한다. 퓨리오사 일행은 시타델 속 도구화, 남성주의의 잔재에서 끄집어 낸 대중들, 워보이들과 함께 평등한 사회를 향한 발전을 기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 텍스트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한다. 이미 인간의 도구화는 현대 사회에 만연하게 퍼져있는 풍조이고(영화처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부의 불평등한 분배는 어느새 정치적인 화두가 되었다. 페미니즘은 혐오를 동반해 무엇이 옳은지 헷갈릴 정도로 많은 분쟁들을 낳아버렸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사회적 현실을 목도함에도, 생존에 급급한 우리는 참여의지를 잃어버리고 만다. 참여의지를 망각한 대중의 존재는 언제든 우리 사회에 임모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기폭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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