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똑 까똑'
주말 이른 아침 남편의 휴대폰에 울리는 소리. 계속되는 알림 신호에 신경이 쓰여 내용을 묻자 남편이 대답한다.
"지인이 보내는 좋은 글이야, 거의 매일 보내주는데 오늘은 더 일찍 보냈네"
헐!! 그걸 왜 주말 아침까지. 대단한 정성이다.
젊은이들 표현으로 '어르신 짤'인가 싶어 한 마디 하려다 참았다.
내가 속한 단체 톡에도 비슷한 분이 있기 때문에 경험상 이해했다.
그분도 시도 때도 없이 넘겨도 넘겨도 끝나지 않을 듯한 장~문의 좋은 말씀을 자주 올린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반응하지 않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왜 그분은 '좋은 말씀'으로 누군가에게 무한 친절을 베푸는 걸까. 그것도 쉬지 않고!
호의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가치로 상대방이 원한다는 전제가 기본이어야 한다. 연륜이 인생의 경험으로 좋은 가치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살아온 세월만큼 지혜를 얻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좋은 말씀'은 요즘 세상 SNS에 차고 넘치는 무료정보이지 않은가.
함께 만나 밥 한 끼 차 한잔 할 때마다 사진 찍기가 먼저인 지인이 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받고 한 수저 국물을 맛보려는 순간 사진이 먼저라며 멈추게 하는 행동에 울컥하는 내가 꼰대인 걸까.
그윽한 커피와 함께 주문한 달콤한 티라미수를 한 조각 자른 순간 카메라를 들이밀며 "안돼"라는 소리와 함께 포크를 치운다. 이런 모습의 지인이 이해 안 되는 시대가 어려운 숙제처럼 버겁다.
차 마시고 밥 먹는 자신의 일상을 일면식 없는 세상사람에게 알리는 삶이 재미와 행복인 젊은 세대, 내 동생이고 후배일 수 있다.
자신이 공감하고 감동하는 글을 스스로의 삶에 적용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지식의 수준인 것처럼 확인하려는 어르신세대, 내 이웃이며 존경하는 선배이기도 하다.
그 사이의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있는 나는 소위 '낀세대'이다.
성향의 차이고 생각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30여 년동안 가르치는 일이 직업인 나에게도 누군가를 가르치려는 본능이 있다. 가끔은 그냥 넘길 수 없을 때가 있다. 잘못된 교육기준과 직업에 대한 편향된 고정관념에 한 마디 하고 싶은 '지적' 충동을 참기도 한다.
서로의 기준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 내 의견을 원한다면 기꺼이 알려주면 될 터이니.
거침없는 표현이 개성이 되고 성공이 되는 시대다. 스스로 특별하다고 믿는 사람들로 넘치는 세상이기도 하다.
그 세상 속에서 평범한 사람으로 수많은 브런치 작가들과 글을 공유하는 즐거움이 일상이 되었다. 내 글을 읽고 라이킷을 주는 그 누군가와 인연이 되는 영광까지 누리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세상인가.
관심받기 위해 보여주는 일탈에 대박이란 행운이 놀랍기도 하지만 달라지는 변화가 순리라면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 안 되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 나도 함께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틀림이 아닌 다름을 받아들이는 지혜를 주시라고 기도하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