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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춤판 생존기

춤신춤왕

by 가히

춤은 영혼의 숨겨진 언어이다.

ㅡ 마사 그래이엄 ㅡ


우리 민족 유전자엔 분명 춤과음악의 DNA가 무한 존재하나 보다. K문화가 전 세계를 뒤 흔드는 사실이 아니라도 내 주변에는 노래와 춤으로 가수와 댄서 뺨치는 지인들이 넘치니 말이다. 부러워만 하기엔 언제나 자신감 충만인, 춤에는 영 소질이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할까 한다.


연말이 되면 각종 모임이 줄줄이 이어지고, 그 끝에는 어김없이 가무가 따라온다. 노래야 반주도 있고, 주변의 도움도 받아 어찌어찌 넘길 수 있다 하나 문제는 비트가 점점 빨라지고 관객의 함성까지 더해지는 춤판이다. 그곳은 내게 늘 재난지역이다.


스스로를 잘 알기에 나는 보통 자리에 앉아 박수 장단으로 흥을 돋우는 ‘후방 지원’ 역할에 충실한다. 그런데 이 전략이 통하지 않았던 지난 주말의 기억이 아직도 흉몽처럼 생생하다.


연말 동문회 자리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 회장의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였기에 모두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행사 진행자는 능숙하게 분위기를 주도했고 동문들은 그의 진행에 박장대소하며 흥이 올랐다. 모두의 기분이 오르자 몇몇 동문들은 앞으로 나가 신명 난 듯 춤을 추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잡은 동문의 노래가 절정에 달한 듯할 때였다. 임원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무대 쪽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가. 다른 사람들도 음악에 몸을 맡긴 듯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갔지만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온몸으로 거부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무대 위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어떻게라도 리듬에 맞춰 흔들어야 하건만 쭈뼛거리며 선 나는 음악에 맞춰 신나게 즐기는 동문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팔은 어떻게 하지? 발은? 몸통은 왜 이렇게 뻣뻣한 거지?’


그 순간 깨달았다. 내게 춤은 ‘영혼의 숨겨진 언어’가 아니라 ‘영혼이 잠시 외출한 상태’라는 것을. 영혼 가출!


‘아.. 진짜, 춤 좀 진작 배워둘 것을.

유튜브 보면 도움이 될까?

왜 다들 저렇게 잘 추는 걸까…’


음악에 취해 무아지경인 동문들 틈에서 혼잣말을 되뇌며 뻘쭘하게 서 있다가, 슬그머니 자리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친한 후배가 얼른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언니, 이렇게 흔들면서 돌아요!”


후배는 내 손을 잡고 휘적휘적 나름의 댄스를 선보였다. 엉거주춤한 내 옆의 또 다른 후배와 함께 우리 셋은 손을 잡고 원을 그리듯 빙글빙글 돌며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다. 춤이라기보다는 매스게임 같은 동작으로 그 상황을 모면한 것이다.

그리고 겨우 자리에 돌아왔을 때. 다리는 후들후들, 심장은 두근두근. 잠깐의 몸놀림에도 숨이 차는 저질 체력까지 더해져 어느 하나 멀쩡한 데 없는 신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즐겁고 유쾌해야 할 연말 모임에서 이게 무슨 우세인가 싶었다. 운동신경이 그리 둔한 것도, 박자 감각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춤만 추면 몸이 통나무처럼 굳어버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답은 간단했다. 나는 ‘흥’은 충분한데, 그 흥을 몸으로 표출할 운동신경의 연습이 전무했던 것이다. 남들은 신나게 모든 것을 비워낸 송년회를 머릿속이 하얗게 복잡한 생각으로 보낸 시간이 아쉽기만 했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춤 대신 박수로, 몸짓 대신 웃음으로, 무대 대신 객석에서 최선을 다해 흥을 나누는 걸로 하자 마음먹는다.

그리고 언젠가 정말 큰맘 먹고 춤을 배우게 된다면 그날의 목표는 단 하나 무대 위에서 영혼을 찾는 것이 아닐까.(가능할지 모르겠지만)

그전까지는 당분간 박수 담당으로 내 자리 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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