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 대하여
귀신이나 도깨비처럼 세상엔 무서운 것이 많다지만 결국 제일 무서운 건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게는 그 어떤 존재보다 고양이가 가장 무서웠다. 이유를 곰곰이 떠올려봐도 딱히 정확한 이유는 없다.
수십 년 전 초등학생, 그러니까 국민학교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 승희의 집에는 고양이가 있었다. 승희는 집안의 한참 늦둥이였던 것 같다. 큰언니들은 모두 출가했고, 나이 드신 부모님은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다. 넓은 집엔 일 도와주는 아주머니와 가족처럼 지내던 고양이가 함께 있었다. 승희는 그 고양이를 ‘공주’라 부르며 끌어안고 애지중지했다. 태어나 처음 가까이서 본 고양이는 내겐 설명할 수 없이 무섭고 싫은 존재였다. 단짝이었던 나는 친구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도 끝내 고양이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승희와는 연락이 끊기고, 고양이는 내 기억 속에서 여전히 가장 무서운 존재로 남았다. 그런데 지금 내 곁에는 그 고양이를 승희보다 수백 배는 더 사랑하는 친구가 있다. 자칭 ‘캣맘’인 나의 절친이다.
우연히 길고양이를 데려오며 시작된 인연은 젖도 떼지 못한 어린 냥이를 정성으로 돌보면서부터란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집 주변은 물론 다른 동네의 수많은 길냥이들 보호자가 되었다. 친구의 하루는 집사의 삶 그 자체다. 새벽 다섯 시면 일어나 함께 사는 일곱 마리 고양이의 아침 간식을 챙긴 후 아파트 동산에 마련한 보호처를 돌본 뒤 도시 곳곳으로 아침 배식을 나선다. 돌아오는 길엔 도움을 받는 수의사 선생님의 병원을 들르는 것도 주말 아침의 일과다.
오전 열 시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주인을 눈 빠지게 기다렸을 일곱 냥이의 아침을 챙기고 나서야 자신의 식사를 한다. 오후가 되면 다시 집을 나서 또 다른 지역의 고양이들을 보살핀다. 내겐 전혀 이해되지 않던 이 생활을 그녀는 늘 즐겁게 이야기한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냥이들 생각하면 너무 행복해져. 하나하나 그렇게 예쁠 수가 없다니까.”
참 팔자도 가지가지라 생각하면서도 환하게 웃으며 이어지는 그녀 앞에서 이제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덕분에 세상에서 제일 무서웠던 고양이는 이제 공터나 공원에서 마주치면 암수를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친구 따라 강남은 못 가도 강남 가는 친구 덕은 본 셈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몸이 아파도 쉬지 못하고 새벽을 여는 친구가 안쓰러워 “그럴 땐 좀 쉬어”라고 말하는 내게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늘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나를 기다리는 애들 생각하면 누워 있을 수가 없어.”
‘어떻게 살 것인가’ 같은 거창한 질문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서성이는 내게 친구의 삶은 오히려 명확한 해답처럼 다가온다. 말 못 하는 생명들을 위해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내어주는 삶. 굳이 사는 이유나 행복이 무엇인지 묻지 않아도 되는 삶이 있다는 걸 나는 그 친구를 통해 배운다.
삶의 의미는 멀리 있지 않다. 누군가를 외면하지 않는 마음, 말 없는 생명을 향해 하루를 내어주는 선택. 그 단순한 반복이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고 또 다른 누군가의 세상을 조금 덜 춥게 만들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예전만큼 두렵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새벽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아직 살 만하다 싶은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