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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X세기소년 Mar 26. 2020

아메리칸 캐주얼, 어떻게 일본 패션이 되었을까. (1)

이태리 타월은 사실 한국의 김필곤씨가 처음 만들었다.

#아메카지




1. 아메카지,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성




2010년대 이후 한국 패션의 큰 입김을

불어넣은 아메리칸 캐주얼 패션!



일명 ‘아메카지’


아메카지 패션. 구글 이미지


이 아메카지는 마니아층이 두터울 뿐만 아니라 워크웨어부터 밀리터리, 캐주얼 등등 워낙 다양한 스타일을 포함해서 크게 유행을 타지도 않지.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 스타일이야.  


아메카지 스타일의 유럽인들. 구글 이미지


하지만 아메카지 패션은 일본에서 건너온 스타일이야. 아메리칸 캐주얼의 일본식 발음이 바로 '아메카지'거든.


미국을 동경한 일본 사람들이 1950년대 미국의 명문대 아이비리그 학생들의 룩을 보고 일본 사람들에 맞게 재해석해 입었다, 미국 광부나 트럭 기사의 패션 등을 따라 입었다 등 수많은 설을 들어 보았을 수도 있을 거야. 아니면 말고. 사실 어느 정도 맞아. 근데 굳이? 왜일까? 어쩌다가 그랬을까? 왜 많고 많은 패션 중에 아메리칸 캐주얼을 좋아하게 되었을까?


이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성을 조금만 알면 돼. 아니 사실 조금만 더 깊게 알면 참 재미있어.


우선 일본이라는 나라는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 낮은 인구밀도, 사무라이의 칼과 피로 얼룩진 전국시대, 에도시대 등등을 겪으면서 굉장히 폐쇄적인 나라가 .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일본은 외부로부터 문화를 수입하는 데에 굉장히 목말라했어. 국토의 사면이 바다로 덮혀있어 문화를 정기적으로 수급할 곳이 이웃나라 조선 외에는 딱히 없었거든.


그러니까 문화 하나하나가 매우 소중했던 거지, 어쩌다 조선에서 물건을 들여오면 마르고 닳도록 우려먹고 소중히 여겼다고 . 문화를 조달해주는 조선 통신사들을 그렇게 극진히 모셨. 어쨌든, 문화를 소중히 여기는  일본인들의 정신이 후대 일본인들에게 ‘극도의 장인정신’ + ‘카피 능력’ + ‘뭐든지 자기식으로 해석해버리는 초월적 어레인지 능력등을 선사하지.  


자 그러면 일본의 에도시대가 막을 내리고 서양문물이 제대로 들어온 19세기 중반 일본의 메이지 유신 정부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2.(굳이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알아보는) 메이지 유신 때부터 시작된 일본 서구식 패션의 역사




1868, 일본은 200 년간 유지된 무인 중심시대(에도시대) 막을 내리고 국왕 중심의 ‘메이지 유신정권이 들어서. 이듬해 5 조의 어서 문이 발표되면서 개혁이 시작되는데, 이를 메이지 유신이라고  그런데 미안, 사실  이게 중요한  아니고 나도 여기까지 밖에 몰라.


근데 이 메이지 유신이랑 아메카지랑 무슨 관계가 있냐고? 그러니까 서양식의 양복 즉, 서구식, 옷들이 아시아 땅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착용되기 시작한 시기가 메이지 유신 때 부터고 곧 미국 때문이라는 거지.


사실 일본에게 서구권 국가들은 그렇게 낯선 존재는 아니었어. 일본은 1300년대부터 나가사키 지역을 통해 네덜란드와 300년 넘도록 교류를 하는 중이었거든. 더 신기한 건 당시 일본의 일부 지식계층들 사이에서는 네덜란드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들도 있었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양의 모든 나라와 교류하는 것은 아니었어. 서양문물을 규제하고 차단했던 에도시대 덕분에 비교적 폐쇄적인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지. 에도시대가 끝날 무렵 서구권의 국가들은 이미 산업혁명을 통해 빠른 공업화와 함께 각 국가들 간의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어.


그러던 1853년 어느 날, 검은 연기를 내뿜는 어마 무시한 크기의 증기 기관선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굉음의 대포를 연거푸 쏘며 일본 앞바다에 쳐 들어와. 그들이 원하는 건 다름 아닌 “문호 개방”. 그러니까 문호 개방만 하면 된다는 조건이었어. 즉 서로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가 너희의 땅에 발을 디딜 수 있게 해 달라는 말이었지. 그리고 그 나라의 이름은 ‘아메리카’ 미국이었어.


좌측 일본에게 돌격한 미국의 용맹한 '페리'선장님, 우측 페리 선장의 우렁찬 배 '페리호' 구글 이미지.


사실 그쯤 근처 이웃 나라 중국이 아편전쟁으로 영국한테 영혼부터 황혼까지 털렸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라 일본도 바들바들 떨고 있었거든?  와중에 신세계 중구형 마냥 “ 살려는 드릴게 아니고 이건  문호만 개방하면 살려도 드리고 문화도 공유해준다는데? 일본은 결국 미드 오픈 문호를 개방하지.


아마  메이지 유신 때부터 일본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일종의 동경이 생겼을 수도 있어. 이전까지 일본에게 문화의 중심은 중국 청나라였거든.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동아시아의 영원한  이었던 중국도 탈탈 털리더니 오지게 막강한 새로운 강자 등장이었. 전국 체전에 우사인 볼트가 참가한 격이랄까.


이건 여담인데 사실  동아시아권 나라들 중에 서구와의 문화 교류는 우리나라만 빼고 다했어. 참고로 중국도 마카오랑 꾸준히 해외 무역을 했어. 우리나라는 아직  갈고 곰방대 물던 시절이었어. 우리의 조선은 아직은 소가 최고이었거든. 씁쓸하구먼.

조선시대의 흔한 '소'. 구글 이미지




1870년대 일본 메이지 유신 때 촬영한 사진 (참고로 오른쪽 두 번째 끝에 있는 사람이 우리 안중근 의사님께서 직접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 구글 이미지

 1870년대 일본 메이지 유신 때 촬영한 사진이야. 서양 캐주얼 슈트룩 + 일본 사람들 무사 룩들이 묘하게 섞여있지. 이미 사진 자체도 서양화되지 않았어? 포즈라는 것을 취하고 있잖아. (참고로 오른쪽 두 번째 끝에 있는 사람이 우리 안중근 의사님께서 직접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임.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일제시대에 조선을 억압하고 탄압한 가해자지만 일본에서는 일본 근대화에 큰 공헌을 내세운 인물이지. TMI인데 이토 히로부미는 영어를 상당히 잘했데.)


 좌우간, 이렇게 일본은 봉건적 농경사회에서 근대적 산업국가로 빠르게 바뀌기 시작해. 물론 일본의 패션도 이때부터 급격하게 바뀌게 되지.

1880 년대 일본 패션. 구글 이미지




일본은 메이지 유신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영향을 받고 국가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틀이 만들어져. 인간 계급사회는 없어지고 만인이 평등해지며 상업이 발달하고 동 서양의 다양한 문화가 교류돼. 패션적인 관점에서 역시 새로운 양식의 옷으로 그 누구나 멋을 낼 수 있는 시기가 온 거야. 베스트, 재킷, 정장, 구두 등을 접하게 되지.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당시에 “이와쿠라 사절단”이라는 걸 만들어서 서양 국가들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체험학습을 떠나. 그리고 눈부신 서양 국가들의 발전을 보고는 1년 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어. 일본 견학생 형들은 돌아오자마자 그중 눈부신 발전을 자랑했던 독일을 롤 모델로 삼고 서둘러 자국의 근대화를 진행시켜. (TMI: 독일을 롤모델로 삼았으니… 훗날 세계 2차 대전의 전범국가들이...) 



3. 일본의 군국주의가 패션에 미친 영향

 



일본은 근대화를 통해 전 국민에게 균등한 기회를 주고 신분제를 폐지시켜. 또한 의무 교육과 기본 권리 등이 시행되면서 국민들의 수준이 올라가게 되지. 그러자 국민들은 시민운동이나 각종의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해. 달리 말해 정부와 관리들 입장에서는 국민들의 “머리가 커진 거지” 또한 당시 일본인들은 서양문화를 무조건적으로 찬양하고 세련됐다 여겼는데, 일본 정부는 점점 자국의 문화를 잃어버릴까 경각심을 느끼지. 문화를 잃은 민족의 미래는 없거든. (일제시대 일본은 우리나라 국민들을 상대로 한글을 쓰지 못하도록 ‘문화말살정책’을 시행했지.)


이 과정에 중심에 섰던 인물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야. 일본 군국주의의 씨앗이 될 만한 헌법을 제정하지. 뭐 처음 의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어 “무조건 서구식만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의 전통도 헌법에 반영하자!”라는 의도였는데… 즉, 민권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래 천황의 절대적 권력을 이용한 거지. 일본인들에게 천황은 곧 신이고 절대적인 존재 그 자체거든. 그러니까 나라의 틀은 근대적 산업국 가도 맞고 만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은 똑같지. 단, 천. 황. 아. 래. 즉, 천황의 절대적인 힘을 뻗치게 한다는 명목 하에 어마 무시한 군대를 양성해.



이토 히로부미. 구글 이미지




 이토 히로부미 TMI (믿거나 말거나, 하지만 거의 안믿는 편.)

1. 사실 이토 히로부미는 ‘림춘모’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었다는 설도 있어.

2. 사실 이토 히로부미는 한일합방을 반대했던

사람이었. 하지만 이유는 단순히 '수지타산' 맞지 않아서 반대했던 거라고



달리 말하면 일본 패션 스타일의 특징이나 감성이 이런 사상에서 묻어 나왔을 수 있을 것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야. 서구의 자본주의 시스템을 따르되, 저만의 방식으로 각색된 일본의 군국주의처럼. 아메카지 스타일이 탄생하게 된 수많은 이유 중에도 뭐 이러한 감성과 비슷한 점이 있지 않겠어?


즉, 이러한 일본은 지 나름대로 군국주의를 통해 본인들의 것을 지키며 근대화를 이루려고 했던 거야. 이러한 노력?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19세기가 들어사자 일본은 서양의 모든 문화 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메이지 유신 초기 시기와는 다르게 20세기부터는 서양문화를 조금씩 일본 스타일에 맞게 어레인지 하기 시작해. (물론 이게 의도된 건지는 모르겠어. 아마 그들도 받아들인다고 받아들였지만 그들도 모르게 본인들의 입맛에 맞추어 재해석되었을 수도)


덕분에 당시 일본 사회는 서양복이 예복으로 자리잡음과 동시에 기모노 역시 사람들에게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예복으로 자리 잡아 남겨지게 돼. 또한 서양식 술집과 일본식 선술집이 동시에 유행하고 팝송과 재즈 그리고 가부키 역시 동시에 대중의 사랑을 받아. 일본의 전통문화와 서양문물이 동등한 위치에서 발전해 나간 거지.


그러니까 내 말은 일본 근대화의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 어느 한 문화에 완전히 흡수되지 않았다는 말이지. ‘아메카지’ 같은 스타일 또한 이러한 문화 발전 형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을까 싶어. 미국의 포크 커틀렛이 일본에서 돈카츠라는 음식으로 재탄생되는 거랑 비슷한 경우 아니겠어?


일본은 이 군국주의를 기반으로 점점 나라의 발전을 이뤄. 급기야 본색을 드러낸 일본은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지. 우리나라도 잠깐 일제시대의 희생양이 되었지.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을 일으켜. 하지만 알다시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폐허가 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외치지. 그렇게 전쟁은 종결이나. 단숨에 패전 국가가 된 일본은 오랜 기간 동안 일으킨 전쟁과 원자폭탄 피해 등에 의해 폐허가 돼버리고, 전반적으로 회복 불능 상태가 되어있었지.


이건 또 여담인데, 뭐 역사가 항상 아이러니하겠지만 생각해보면 일본은 미국에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했고 또 미국에 의해 크게 멸망할 뻔하기도 했던 나라야. 그래도 현재 경제 대국의 반열을 유지하며 1위 미국을 언제라도 재껴낼 반등을 꾀하고 있지. 사실 이미 중국이 이러한 정황을 살펴보면 일본이라는 나라에 있어서 “북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대륙은 아마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거야. 일종의 걸림돌, 분노, 시기, 자격지심, 그리고 동시에 이상향의 대상일 수도 있다는 개인적인 생각이야.


실제로 일본은 세계 2차 대전 패전 이후 문화, 패션의 부분에서 미국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아. 그건 다음 화인 '아메리칸 캐주얼 어떻게 일본 패션이 되었을까(2)'에서 지켜봐 줘. 긴 글 읽어줘서 고마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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