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장면은 중국보다 한국이 더 맛있지.
안녕! 지난 <아메리칸 캐주얼, 어떻게 일본 패션이 되었을까.(1)> 에서는 일본이라는 나라의 특수성과 근대화 배경에 대해 살펴보았지? 이번 글에서는 일본이 어떻게 문화와 패션을 발전시켰는지에 대해 써볼까 해.
전쟁이 끝나고 패전 국가에게 따라오는 것은 항상 마찬가지로 끔찍한 빈곤생활이었어. 이 시기의 일본은 문화니 패션이니 할 것 없이 일단은 생존이 우선이었지.
따라서 당시 남성은 국민복과 복원복(復員服), 여성은 부인 표준복과 몸빼(もんぺ, 여성의 노동복 바지, 우리나라 할머니 들의 ‘몸빼바지’의 유래) 등 전시 중에 유용했던 획일화된 의류만을 입을 수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패션이고 나발이고 실용성만 고집했겠지.
하지만 인류는 말이야, 이 '멋'이라는 것을 내지 않고서는 좀처럼 살 수가 없는 종족들이거든. 일본의 패전 1년 뒤인 1946년, 가지고 있던 기모노나 기본 옷들을 활용해 아메리카 패션을 만든 각종 『스타일』북이 폭발적으로 팔리기 시작해, 남성들 사이에서는 *양재 붐이 일어나. 또 전쟁에 의해 자활이 끊긴 젊은 여성들은 신부수업 등을 이유로 양재 학교에 몰리고, 일본의 양재 문화는 본격적인 부흥기에 돌입해. (*양재는 참고로 양복 정장이라고 생각하면 될 거야.)
애초에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었던 상태이기도 했고 전쟁 전부터 기술력이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이 산업군들의 발전은 비교적 빨리 이루어졌지. 하드웨어는 잃었지만 소프트웨어는 남아 있었거든. 이렇게 산업의 부흥과 더불어 1948년에는 디자이너즈 클럽이 결성돼, 그다음 해에는 패션쇼가 개최되기도 했지.
사실 일본에는 전쟁으로 황폐화된 경제와 국토를 재건하는데 초석을 다지며 공을 세운 사람들이 숱하게 있지만 그중에서 상당한 공을 세웠던 사람들은 다름 아닌 ‘팡팡 걸’이라고 불리는 일본의 매춘부들이었어. 일본 경제를 재건하겠다는 대의를 품었으며 일본 정부 주도하에 만들어진 단체였지.
그 이름은 “팡팡 걸". 그들은 주로 미군들을 상대하는 매춘부들이었는데, 암시장에서 거래된 아메리카제의 화려한 원색 옷을 걸치고, 머리는 펌을 했으며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아메리카 병사들의 이목을 끌어모았지. (참고로 팡팡 걸은 ‘팡팡 눌랑’이라는 매춘부를 의미하는 중국어와 영어의 Girl을 합친 단어야.)
그리고 이 팡팡 걸은 미군들을 상대로 달러를 벌어들였어. 패전으로 기울어진 일본을 재건하는데 일조를 했던 거야.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일본의 양재 열풍과 더불어 스트리트 패션의 초석이 되는 역할도 했어. 예를 들어 밀리터리 스트리트 룩에도 영향을 미쳤지. 미군으로부터 옷을 물려받는 팡팡 걸들 덕분이었지. 그리고 그 밀리터리룩이 일반인들을 에게 유입된 거지.
이 시대의 일본 근대 패션은 크게 두 가지 성격이 있었는데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과 동시에 전쟁이 남긴 ‘반 사회성’이었어. 양재(양복) 스타일이 크게 유행했어. 폐허가된 일본의 영토에서 넘어다 본 풍요로운 승전국 아메리카의 이미지는 동경 그 자체였지. 반면에 ‘반 사회성’은 당시 ‘태양족’이라고 불리는 일본 젊은이 들로 예를 들 수 있는데, 사실 이 족속들 역시 미국의 패션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는 할 수 없었지. 태양족은 '태양의 계절'이라는 일본의 50년대 소설을 통해 나온 용어야.
'태양의 계절’은 1956년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미친 화실>이라는 영화의 원작 소설이야.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었으며 원제를 따서 당시 향락적인 젊은이들을 비판해 태양족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해. 인생의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전쟁 직후의 젊은 세대를 다루는 내용이었대. 일명 ‘타이 요조 쿠’(태양족) 사실 요즘 모든 청년들이 전쟁 직후 같긴 하지
‘태양족’은 패전국이 된 일본에서 자란 젊은 세대들로 나태하고 비도덕적이며 폭력과 무절제한 섹스를 즐기면서 이유 없는 분노와 좌절에 시달리는 잃어버린 세대들이었어. 위에서 언급했듯이 인생의 목표 의식은 없고 반항심만 있을 뿐이지. 굳이 비유하자면 “이유 없는 반항”의 일본판 및 하드 코어 버전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이 일본 50-60년대 태양족들의 패션은 심플하고 자유분방하며 또 반항아적인 이미지가 강해.
60년대에는 롯폰기족, 미유키족, 하라주쿠족 등이 출현하게 돼. 이중 댄디 룩의 아버지 격 정도 되는 미유키족과 같은 부류들 역시 미국 패션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지나지 않았어. 미유키족은 체크 재킷, 반바지, 치노 팬츠, 로퍼 등 아이비 패션 (댄디룩)이 유행을 하는데 지금 들으면 상당히 댄디하고 깔끔한 인상이지? 하지만 그 당시에는 ‘양아치’의 상징이었어. 일본 정부와 어른들에게 있어 이런 패션들은 눈엣가시였다고 해. 특히 미유키 족은 상인들이 주 적이었지. 도쿄의 비싼 긴자 거리를 한껏 꾸며 입고 하루 종일 활보하지만 정작 물건은 하나도 사지를 않았거든.
당시 일본의 60년대 기성복을 주도하는 브랜드는 'VAN'이라는 브랜드였는데 VAN의 오너인 '이시즈 겐스케'라는 양반은 이러한 이미지를 어떻게든 탈피해보려고 일본의 달러 외부 반출까지 어겨가며 미국의 아이비리그를 방문하기도 했대. 결코 '양아치’ 패션이 아닌, 미국의 명문 대학생들이 즐겨 입는 ‘엘리트 패션’ 임을 입증해보겠다고 말이야.
일본은 1960년대가 지나면서 현란한 모즈, 미니스커트 그리고 불량스러운 히피 패션 등 각종 스타일이 등장하기 시작해. 패전 국가의 아픔을 딛고 서서히 경기를 회복하며 문화와 패션산업도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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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는 흔히들 말하는 일본의 버블경제가 시작되는 시점인데, 버블경제는 쉽게 말해서 경기 호황 속에 주식과 부동산 가격 등이 급등해서 자산의 가치가 엄청나게 불어나는 경제 상태를 말하는 거야. 1970년대 일본의 경제성장은 오일쇼크로 인해 침체기를 맞긴 했지만 우리에게 익숙한 JVC, 소니, 파나소닉, 도요타, 혼다, 캐논 등과 같은 일본의 전자기업들은 이를 극복해내.
1950, 60년대를 통해 차근차근 쌓아 올린 기술력을 바탕으로 그간의 싸구려 이미지를 완전히 탈피하고 미국, 유럽 등의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겨 세계시장을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해. 또한 도요타, 혼다와 같은 자동차 회사들은 오일쇼크를 역이용해서 기존 서구권의 외제차보다 기름을 덜먹는다는 점을 널리 홍보하고 일본 차만의 세밀한 내구성으로 잔고장도 덜하다는 인식이 각인시켜 전 세계 시장을 장악해. 당시 일본의 버블경제를 반증할만한 것이 1980년대 후반쯤에는 전 세계 기업 시가 총액 50위 가운데 무려 33개가 일본 기업이라는 기염을 토해.(심지어 세계 상위 20개 기업 중 16개가 일본 기업이었어)
이건 여담의 여담인데 일본 버블경제의 궁극점이자 말기인 1987-1988년쯤에는 ’ 프리터’라는 말도 생겨. 들어봤을지 모르겠지만 ‘프리 + 아르바이터’가 합쳐진 일본의 사회 용어야. 경기가 좋아 언제든 취업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미래를 계획하지 않고 당장을 즐기는 낭만적인 라이프 스타일쯤으로 취급받았데. 면접만 보러 가도, 교통비로 3~5만 엔을 꽂아 주는 시대였으니 당시 우리나라 돈으로 35~50만 원 정도를 줬던 거지.
덕분에 면접만 보러 다니는 사람까지 생겨날 정도였어. 심지어 일각에서는 이 시기에 일본 기업들 간에 돈이 하도 남아돌다 보니 그 잉여의 돈으로 괴짜 제품을 만들거나 골 때리는 아이디어를 실행하는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하더라. 그래서 일본 기업의 광고나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독창적이라는 이미지가 나온 거라는 설도 있어. (이를테면 일본의 약 빤 환타 광고 시리즈…?)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왜 이렇게 버블경제에 대해서 많이 떠드냐고? 왜냐하면 난 이런 당대 일본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일본 패션 분야에 아주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일본은 완전히 재기에 성공한 수준을 넘어서 세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지. 인간은 풍요로워질수록 멋을 많이 내 거든? 그건 지구인의 진리라고 생각해. (뭐 가끔 멋을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여하튼 풍요롭다 못해 모든 게 넘쳐났던 일본은 독자적인 패션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해.
다시 말하면 60년대가 미국의 패션을 따라한 시기였다면 70-80년대는 일본만의 독창적인 패션을 만들어진 시기야. 즉, 일본의 버블 경제와 함께 다양한 산업과 문화가 발달했어. 단순히 60년대와 같이 미국의 아이비리그 패션을 모방하는 획일화된 패션에 싫증이 난 디자이너들이 저마다 작은 사무소를 차리고 자신만의 스타일에 맞게 옷을 제작하기 시작해. 즉 ‘디자이너’와 ‘개성(Character)’ 을 중요시한 브랜드들의 등장하는 시기였지. 그래서 이 시기에 나온 브랜드들을 DC브랜드(Designer & Character) 라고해. 더 이상 유행이 아닌 자신만의 개성으로 옷을 입고 멋을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지.
특히 1970년대 이후부터는 다수의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이때는 거의 뭐 일본의 “패션 전국시대”였어. 타케오 키쿠치의 ‘BIGI’나 가와쿠보 레이의 ‘꼼 데 가르송’과 같은 디자이너 브랜드의 초창기 틀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야.
패션 잡지가 흥행하고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개성을 중시하며 옷들도 소량으로만 만들어 냈어. 이러한 디자이너들의 옷들이 잡지에 실리면 젊은이들은 미친 듯이 지갑을 열고 옷을 사기 시작했지. 거의 뭐 일단 사고 보자 식이 되었다고 해. 이때 일본의 패션은 점점 더 요란해지고 다양해져. 자칫 광기를 띈 듯한 스타일도 심심치 않게 나올 정도였지.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에는 패션뿐만 아니라 문화산업도 크게 발달했어. 일본의 아이돌 문화가 나오는 시기이기도 이때부터였지. 당시 아이돌을 보면 패션이나 외모가 진짜 출중하다고. 지금 일본 아이돌보다 훨씬 나은 것 같아.
초 호황 경기에 힘입어 일본 패션 산업의 발달은 세계로 뻗어나가기 시작해. 1981년, 요지 야마모토와 레이 가와쿠보는 파리 컬렉션에서 헐렁하고 다크 한 스타일의 옷들을 내놓는데 이 스타일은 세계 패션 산업에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켜. 기존의 유행했던 몸매가 드러나는 서구의 스타일과는 달리 불균형하고 미완 성적인 탈중심주의적 특성에 큰 찬사를 받았데. 그러니까 뭐 아방가르드니 포스트 모더니즘이니, 포스트 히로시마 스타일, 해체주의, 빈곤 룩 (poverty look), 안티 패션 등 뭐 그러니까 있어 보이고 어렵고 간지 나는 수식어 들은 다 가져다 쓰였어. 세계적으로 일본 패션 산업의 위상이 높아진 것도 이때부터지.
우리가 생각하는 일본 여성 스타일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섹시함과는 거리가 멀지? 나는 귀여움에 가깝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일본의 80년대 여성 패션을 보면 생각이 달라졌지.
80년대 일본 여성들의 일상적인 회사 출퇴근 복이었어. 80년대에 들어서자 그동안 비교적 폐쇄적인 상황 속에서 억압받고 힘들게 살아왔던 일본 여성들이 저런 과감한 패션을 통해 해방감과 같은 일종의 '표출'을 하기 시작해. 출퇴근을 하면 그대로 나이트클럽과 술집 등으로 향했고 향락을 즐겼지. 또한 80년대 일본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는 명품 브랜드, 아이돌 문화, 성형수술 그리고 노출패션 등이 성행했어. 젊은 남성들은 점점 행동과 언행이 거칠어지고 남녀노소 도덕적 관념이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었다고 해. 나라 경제는 급속도로 발전했지만 국민들의 도덕성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던 걸까?
그리고 재미있는 건 현대 일본 사람들에게 있어서 저렇게 타이트하고 과감한 원피스나 치마를 입으면 “버블경제 시대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무리하는 촌스럽고 부담스러운 아줌마” 정도로 인식한다고 해. 타이트한 원피스, 일명 '완렌보디콘'은 현재 일본에서 촌스럽다는 이미지가 박혀있대.
성별이 모호한 유니섹스, 펑퍼짐한 아방가르드 스타일, 과한 오버 숄더, 반대로 과하게 타이트한 원피스 혹은 검은색으로 도배한 스타일 등 많은 다양한 서로 다른 종류의 스타일이 일본의 80년대 버블경제와 함께 쏟아져 나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