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병으로 떠나보내다. 돌봄지원 사회적기업을 만들다

[사회혁신 영국기행 10] 절절한 사연으로 출발한 사회적기업가를 만나다

by 이웃주민

https://brunch.co.kr/@jmseria/9

[코벤트리편 전편에 이어 계속]


소중한 사람이 떠나며 남긴 유산, 돌봄지원 사회적기업 Nic’s Legacy


코벤트리에 머무는 2주 동안, 코벤트리대학 사회적기업(CUSE) 스텝들은 친절하게도 나를 위한 일정표를 꼼꼼하게 만들어줬다. 일정 중에는 대학 안팎의 ‘사회적 가치 불어넣기’ 교육, 스텝들의 일하는 현장 쫓아다니기, 개별 면담, 각종 네트워크 회의와 행사 참여, 크고작은 비공식 모임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코벤트리에서 활동하는 사회적기업가 등 사회혁신 실천가들과의 만남도 곳곳에서 주선해주었다. 엔터프라이즈 허브에서 자주 마주치며 눈인사만 주고받고 있었던 수더분한 인상의 중년 여성, 헬렌(Helen Brewster)은 사회적기업이자 공동체이익회사(Community Interest Company, CIC)인 Nic’s Legacy(이하 ‘닉스’)의 공동창업자이자 상무이사로 일하고 있었다.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허브에 있는 자그마한 2인용 회의실에서 그녀와 마주보고 앉았다. 회사의 이름이 독특해서 사연을 물었다. 닉이란 사람이 남긴 유물이라니 무슨 뜻일까.


“저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랑하는 닉을 떠나보내며, 아픈이를 돌보는 일에 대한 성찰의 결과로 만들었어요. 그녀는 폐와 머리에 암이 생겼고, 진단받은지 4개월만에 세상을 떠났어요. 겨우 35살 나이에 말이죠. 그녀의 남편이자 우리 회사의 공동창업자이기도 한 제이미(Jamie)는 그녀를 위해 하루 24시간, 한주에 7일을 꼬박 돌봐야 했죠. 제이미는 닉을 잃은 슬픔에 더해 혼자 감당해야했을 돌봄에 대한 무리한 부담으로 그 스스로의 심신 건강도 헤쳐야 했죠.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영향은 남아있어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친구가 남긴 유산, 아픈 그녀를 마주하며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겪었던 ‘돌봄’에 대한 구체적이고 절절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탄생한 사회적기업이 ‘닉스’인 셈이다. 아픈 그녀와 마지막 순간이라도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싶었던 애잔한 바람이 이제 기업가가 된 친구와 남편의 말속에 그대로 녹아있는 듯했다. 사실 이런 돌봄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한 식구가, 친구가 아프면 주변 사람도 아프다. 누군가는 챙기고 돌봐야 한다. 자기자신도 추스르기 힘든 점점 팍팍해지는 현실에서, 아무리 사랑하는 가족이라 할지라도 타인을, 그것도 병든 사람을 돌봐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간병살인’이라는 책도 일본에서 발매돼 큰 반향을 주지 않았던가. 계속 고령화되고 병을 ‘달고’ 살아가야 할 현대사회 일수록 이런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IMG_7392.jpg 엔터프라이즈 허브에서 회의 중인 헬렌의 모습


결국 누가 돌보는가? 어떻게 돌볼 것인가?


영국은 이런 문제가 덜할 줄 알았다. ‘무상의료’로 잘 알려진 나라, NHS(국민건강서비스)에서 의료복지체계를 통해 사회적으로 부담을 덜어주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헬렌은 고개를 저었다.


“(앞서 계속적으로 제기된)정부의 긴축재정(Austerity) 기조로 인해, NHS와 사회적 돌봄에 대한 예산 및 서비스 삭감의 압력이 지속되어 왔어요. 단순히 병원가는 건 무료일지 모르지만, 결국 돌봄의 영역은 주변 가족들이 주요하게 떠맡게(primary carer)되는 경우가 많아요.”


사실 제아무리 병원이 있고 케어센터가 있어도 돌봄의 영역에는 ‘비는’ 부분들이 많다. 아픈 사람의 일상을 챙기는 일은 시도때도 없다. 입원 혹은 입소해 지내는 것이 아닌 이상, 직업적 전문인들이 다 맡아줄 수 없다. 나 개인적으로도, 동네병원과 큰병원, 주민센터와 관련 보건센터 등을 오가며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을 챙겨야 했던 날들이 떠올랐다. 제아무리 전문적인 기관, 의료인, 사회복지사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 주요한(primary)한 돌봄 종사자는 가까운 가족이 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었다.


‘닉스’에 따르면, 영국에는 약 7백만명이 이런 돌봄 노동을 떠앉으며 살고 있다. 이를 경제적 가치로 환산하면 연간 약 1320억 파운드(약 190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아픈 이의 일상을 챙기는 사람들이 정작 자신 스스로를 챙기기는 매우 어렵다. 많은 일들을 동시에 허덕이듯 처리해야함은 물론 엄청난 재정적, 육체적, 정신적 압박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게 ‘닉스’의 문제의식이었다.


“우리는 이렇게 돌보는 일을 무겁게 떠안아야 하는 사람들의 부담과 압박을 경감시켜주기 위한 일을 하고 있어요. 특히 테크놀로지를 활용하여 돌봄 영역을 바람직하게 혁신해나가고자 합니다.”


‘닉스’에서 주력하고 있는 사업은 ‘Carenet365’라고 하는 온라인 툴을 개발하고 보급하는 일이었다. 환자를 둘러싼 주변 사람들이 함께 일정, 역할을 조정하는 것은 물론 소소한 일상의 생각, 메모 등을 간편하게 공유할 수 있는 온라인 플랫폼과 어플리케이션을 제공하는 것이다. 일종의 ‘맞춤형 소셜플랫폼’인 셈.


Carenet365 홈페이지 캡쳐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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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의 분산, 돌보는 이의 '자기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는 툴 Carenet365


가령 이렇다. 환자의 주변 사람 중 가끔씩은 도와줄 수 있는 여력들은 있지만(예: 주1회 함께 1시간 정도 공원 산책, 월1회 병원 데리고 가기 등), 이런 ‘지원’을 조정하고 스케쥴링 하는 것이 오히려 더 복잡하고 어려워 그냥 한 사람이 모든 사소한 것까지 떠앉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 중 한 사람에게 돌봄의 부담이 집중되면 금세 그는 고립감에 짓눌리게 된다는 것이 헬렌의 설명이다. 따라서 주변 친지, 친구, 관련 종사자, 전문가 등과 함께 일정을 공유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일상적인 소통을 할 수 있는 창구가 필요하다고 이들은 봤다. 매우 손쉽게 이용 가능하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기술적인 도구 말이다.


“혼자 지치지 않게끔 지원을 연결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는 도구이죠. 돌보는 이들이 돌봄 노동을 관리하고 조정할 수 있게끔,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여유 시간을 만들어나갈 수 있게끔 말이죠.”


툴을 통해 일종의 ‘당번표’ 같은 것만 잘 조정해 만들어도 돌보는 이가 자기 시간을 곳곳에서 확보할 수 있다. 하다못해 환자와 함께 쇼핑을 가거나 여가를 즐기게끔 도와주는 역할도 온라인 상에서 쉽게 배분 및 취합할 수 있다. 부담 없는 빈도라면 불편을 겪고 있는 사람을 위한 크고 작은 선의들은 충분히 즐거운 마음으로 조직될 수 있지 않을까. 기술을 활용해 일목요연하게 관계망을 조직하는, 환자와 돌보는 이 모두를 위해 주변 관계를 손쉽게 활용하고 다져나가는, 그리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솔루션! 컴퓨터와 테블릿, 스마트폰 등 모든 기기에 최적화되어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었다.


헬렌이 보여준 설명 동영상(‘닉스’의 홈페이지에 가면 볼 수 있다)은 온라인 툴을 활용하여 ‘관계망’, ‘관련 정보’, ‘자원 연결’, ’스케쥴링’ 등을 집약해 환자를 둘러싼 사람들이 함께 공유함으로써 사회적인 고립감을 해소하게끔 돕는 내용이 담겨 있다. 크게 ‘Better Planning’(실시간으로 일정과 약속, 도움요청 등을 직접적으로 공유하며 부담을 나눠지는 일상을 계획 가능), ‘Care Network’(환자와 돌보는 이 주변의 가족, 친구 등 직업적 관계가 아닌 ’비공식 관계 네트워크’를 원할하게 다지게끔 지원하여 손쉬운 계획과 조정이 가능한 관계망 형성), ‘Device Optimized’(각종 기기에 최적화되어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손쉽게 이용가능하고 동기화되는) 등 3가지 기능을 강조하여 탑재해넣고 있었다.


현재 시범운영 중인 ‘Carenet365’는 돌보는 이들과 단체는 물론 지방정부, 병원, 호스피스, 돌봄기관 등과 연계하여 이 사업을 확대해나갈 예정이다. 연간 툴 사용료는 75파운드( 악 11만원) 정도로 책정하고 있는데, 이는 지방정부 및 호스피스 단체와의 협력과 보조금 연계 등을 통해 개인 부담은 최소화해 운영하는 모델을 만들 계획. ‘닉스’는 사회적기업이자 공동체이익회사다. 그들의 비즈니스와 사용료 수익은 모두 ‘아픈 이들을 돌보는 사람들’과 지역사회의 관련 활동을 위해 재투자 된다.


‘닉스’에 이익이 생기면 ‘돌보는 이들’에게 이익이 생긴다. 이는 곧 사회를 이롭게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음 편에 계속]


이 연재를 엮고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였습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3617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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