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혁신 영국기행 9] 정부가 발 뺀 유적공간, 지역공동체가 인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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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벤트리편 전편이 이어 계속]
수도사(Monk) 폴의 초대, 도심에 펼쳐진 수도원으로의 여정: Priory Visitor Centre
수도원은 도심 한가운데의 코벤트리 대성당과 인접해있었다. 이끼 묻은 옛 벽돌들과 현대적으로 재생한 세련된 담벼락이 나름 근사하게 어우러진 채 이방인을 맞이하고 있었다. 코벤트리에 세워진 첫번째 성당이자 수도원 자리를 폭격의 폐허 속에서도 지키고 있는 곳, 1천년이 넘는 시간을 간직하고 있는 Priory Visitor Centre는 정말로 오리지널 수도원이자 계속해서 옛 모습을 지키고 발굴해내려 애쓰고 있는 곳이었다.
물론 종교적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회는 이제 여기에선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폴은 실제 그시절 검정색의 수수한 수도복을 입은 수도사의 풍모로 나를 맞이했다. 그는 마을의 역사 자체인 이 공간을 원래 그대로 보존하고 유지해나가기 위한 해설사이자 지킴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 역사적 공간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 데에는 사실 아픈 사연이 있었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속된 영국정부의 긴축재정(Austerity) 정책으로 인해 많은 지방정부 예산 등이 삭감되었고, 그 타격은 이러한 역사문화자원을 관리하는 영역에까지 퍼졌다. 지난 2016년 코벤트리 시정부(Council)는 예산 삭감으로 인해 이 공간의 운영중단과 폐쇄를 결정했다. 당시 전문가들은 “비극이고 대단한 불명예”, “문화예술에 대한 시정부의 삭감은 장기적으로 오싹한(appalling) 효과를 낳을 것”이라며 지역사회의 역사적 보고이자 문화적 자산이 계속 유지되지 못하는 데 대해 개탄을 금지 못했다.
결국 정부가 뒤로 빠져버린 공간을 살린 것은 지역공동체였다. 주민과 사회적기업, 자원봉사 그룹 등이 힘을 합쳐 이 공간을 살리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SaveThePriory’ 캠페인 등을 벌인 끝에 지역공동체가 주도하는 공동체이익회사(Community interest company)를 결성해 이 비어버린 공간을 도맡아 운영하기로 뜻을 모았다. 문을 닫은지 정확히 1년 후인 2017년 5월, 익숙한 공간에 다시모여 새롭게 재오픈 세레모니를 진행했다. 지방정부 역시 연간 약 10만파운드(약1억5천만원)에 달하는, 최고 책임자(council chief executive) 연봉의 약 절반에 해당한다는 예산을 줄이는 효과를 거두는 이 안을 마다할리 있겠는가.
정부가 발 뺀 역사문화 공간,
마을기반 사회적기업이 인수하다
“우리는 이제 커뮤니티에 의해, 커뮤니티를 위해 운영하는 커뮤니티 뮤지엄이 되었다.”
함께 활동해온 한 자원봉사자 매니저(Alan Jephcott)가 지역언론에 했던 말이다. 그는 재오픈 이후 진행되었던 크라우드펀딩에 동참을 촉구하며 “이 아름다운 공간이 다시는 문을 닫지 않고 지역 주민들과 여행객들을 맞이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또한 “지역 주민들을 고용하고 지역의 청년들에게는 문화, 레저, 관광 등과 관련한 견습(Apprenticeship)을 제공하는 공간으로서 만들어가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Priory는 정부의 보조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하는 공간으로의 유지보존을 추진 중이다. 지역주민들의 기부와 자원봉사는 물론, 다양한 지역사회 이벤트 공간(미팅, 세레모니, 파티, 교육 등을 위해 도심에서 이만한 특별한 곳이 없다며!), 역사문화와 관광 컨텐츠사업, 로컬 문화예술인들의 창작물 판매 공간 등으로 활용하며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통해 단절을 넘어 과거와 손잡고 미래로 나아가기를 꿈꾸고 있다.
코벤트리대학과 CUSE도 이 과정에서 톡톡한 지원자 역할을 했다. 캐롤(Carole Donnelly)은 CUSE의 중견 스텝이면서 커뮤니티 활성화와 특히 오래된 건축물들을 유지보존하는 일에 관심이 많은 활동가였다. 그녀는 이 되살리기 프로젝트에 적극 결합하여 자원을 연계하고 활동을 조직하는데 줄곧 함께했다. 예컨대 1만파운드(약 1500만원)를 CUSE로부터 지원받아 재오픈 활동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녀는 지금도 수시로 이곳을 오가며, 역사적 자산의 지역공동체 주도 운영의 성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가 도심의 유서 깊은 공간을 구하고 그곳의 스토리가 계속 이어지며 다음 세대에게도 영감을 줄 수 있게끔 나서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그녀는 열정적인 커뮤니티 활동가였다. 그녀에게 이 일은 단순히 ‘업무’가 아니었다. 주말에도 나를 이곳으로 오라고 독려했다. “흥미로운 장터가 열리니 꼭 놀러오세요!”. 소박한 창작물들이 고풍스런 터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머무는 동안 CUSE 엔터프라이즈 허브에서 늘상 만나던 그녀를 토요일에도 다시 만났다.
“다시 문을 연 이후에 우리는 코벤트리 주민과 국내는 물론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 비즈니스맨, 공연 감독들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반갑게 맞이해왔어요. 레이디 고디바(Lady Godiva), 중세의 종교적 중심지, 헨리 8세 등 이 공간과 관련된 다양한 역사적 사연과 문화적 이야기들을 공유하며 공간의 가치에 대해 알렸죠.”
그녀의 꿈은 지역공동체에 의한 지역자산의 운영, 즉 사회적기업이자 공동체이익회사로서 관계망, 기부, 비즈니스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이 유서 깊은 공간을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는 것이다. “정말 커다란 자부심을 느낍니다. 함께 만들어나갈 미래를 향해 돌하나를 얹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불사조’ 처럼 다시 살아난 수도원, 수도사, 그리고 코벤트리
나를 이곳으로 초대한 수도사 폴, 그는 “코벤트리대학 사회적기업에서 이 놀라운 공간을 지키는 데 함께해온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며 “코벤트리대학은 미래를 지원하며 과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말했다. 폴과 캐롤은 지역사회와 대학이 협력해 함께 이 공간을 살려나간 상징 인물들로서, 도시 곳곳에 캠패인 포스터의 등장인물로 환하게 내걸려있기도 했다.
폴의 배려로 나는 ‘개별 가이드’를 받으며 이 공간을 쭉 둘러보는 호사스런 시간을 가졌다. 수도사 복장을 정중하게 입은 그는 기실 쾌활한 이야기꾼이었다. 과거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듯, 수도원 공간들을 옛날 수도사들이 취했을 포즈를 재현까지 해가며 실감나는 안내를 해주었다. 옛날 수도원장이 1535년 오스버그 성인 축일에 남긴 글귀에는 많은 순례객들이 이곳을 찾은 날들을 보여주고 있었다.
“코벤트리 심장부에 위치한, 이 훌륭한 베네딕토 수도회에 방문한 순례자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여기서 우리 형제 수도사들과 나는 하느님을 섬기며 매일 8시간씩 기도와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코벤트리 대성당의 무너진 모습처럼, 이곳 역시 많은 부분 훼손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여전히 묵직한 터, 돌, 담벼락, 스테인글라스, 기둥, 장식물 등은 곳곳에 세월의 더께를 간직한 채, 후손들에 의해 발굴되고 재건되고 다시 현재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비주얼 컴퓨터 등 현대적인 기술을 활용해, 사라지거나 무너진 부분을 시각적으로 다시 재현하는 작업도 하고 있었다.
폴은 옛 수도원의 지하 공간(undercroft)으로도 안내했다. “이 중세의 돌들을 보세요” 성당의 주춧돌 등으로 사용했을 그러나 지금은 파편화된 유적들이 한가득 선반에 놓여 있었다. 슬쩍 들더니 내 가슴에 안겨주기도 했다. 황토색의 돌덩이는 그저 묵직했다. 이어 무너진 벽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헨리8세가 종교개혁(영국 성공회 창설) 한답시고 당시의 성당, 수도원들을 무참히 파괴했죠. 끔찍한 왕이었어요!”
수도사 폴은 코벤트리와 이 공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의 고향인 코벤트리에서 그의 전공이기도 한 역사를 품에 안고, 지역공동체와 함께 유산을 알리고 경영해나가는 일을 하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고 연신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소개처럼 코벤트리는 중세시대 잉글랜드의 가장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고 종교적으로도 그러했다. 그런 역사적 유산이 지금은 많이 소실되거나 현대사를 거치며 파괴되기도 했지만, 게다가 정부마저 손을 놓아버린 순간이었지만, 결국 폴과 같은 주민들이 나서서 지역을 되살리고 있다.
“코벤트리는 도시 자체가 ‘재창조(reinvent)’로 유명합니다. 도시(와 대학)의 엠블럼이 잿덩이에서 날아오르는 불사조(phoenix, 전후 망가진 도시를 재건하는 프로젝트명도 phoenix였다)죠. 많은 학생과 젊은이들도 여기서 이 지역적이고 역사적인 산물을 보고 배우고 영감을 얻는다면 얼마나 환상적인 일인가요?”
CUSE 소속으로 함께 이곳을 지원해온 마리아마의 말이다.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수도원의 복도(Cloister)로 나왔다. 지붕은 없어지고 없는 그러나 수없이 오갔을 수도사들의 발자국과 경건한 기도소리는 겹겹이 쌓여있을, 역사를 떠안고 세련한 모던미를 넣어 새단장한 공간을 지나 출구로 향했다. “과거에 생명을 불어넣어” 미래로 향하고 있는 코벤트리안들이 내뿜는 혁신의 기운을 한껏 흡입하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편에 계속]
이 연재를 엮고 보완하여 단행본으로 출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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