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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Jul 26. 2020

파리 산책의 '레퍼런스', 영화 비포선셋 따라 걷기 1

[파리 여행] 재회의 설렘... 르푸어 카페에서 여주인공 셀린의 집까지

프롤로그

(대략)"2010년경부터 2020년 전까지 약 10년간은 해외여행, 탐방의 ‘붐’이 일었던 시기였다. 반도를 훌쩍 떠난 글로벌 노마드들은 전 세계를 누볐다. 2020년을 강타한 코로나19 사태로 세계가 멈춰 서고 국경이 막힌 작금의 상황에서 보면 드라마틱한 역사의 변곡점 하나를 지나고 있는 느낌이다. 지난 10년 간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다른 사회가 궁금했고 보고 느끼고 싶었다." <모던 대학 코번트리, 도시를 바꾸다> 서문 중

강제로 해외여행이 막힌 휴가철, 시간 나면 국경 너머로의 일탈을 꿈꿨던 지난날을 떠올리고 성찰하며 숨겨둔 여행기를 전합니다. 갈 수 없는 이국땅의 정취를 나누길 고대하면서. 'solitude 파리'편은 감상적이고 주로 우울했던 젊은 날 훌쩍 떠나 홀로 걸었던 파리의 풍경들, 추억의 서랍에 수북이 간직해둔 이야기.
출처: <비포선셋> 영화 포스터 이미지


무엇이 나를 파리로 이끌었을까. 살아가며 맞닥뜨린 우연이었을까. 예술과 혁명의 기운에 대한 무의식적인 동경이었을까. 아니, 그저 영화 한 편이었을 수도 있다. <비포선셋>(Before Sunset)이라면 충분히 그렇다. 줄리 델피와 에단 호크와 파리가 만나 어느 특별한 하루의 발걸음을 따른 작품. 설렘으로 가득했던 스무 살의 만남을 기억의 저편으로 남긴 채, 서른이 넘은 두 주인공의 삶의 무게가 더해진 사랑의 대화. 배경으로 흐르는 파리의 골목길, 고서점, 카페, 센 강... 비포선셋을 보며, 나는 파리에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파리에 왔다. 오늘, 드디어 비포선셋 속으로 여정을 떠난다.


#1 르푸어 카페… '왜 한국에는 이런 데가 없는지 몰라'


바스티유역에서부터 출발. 첫째 목적지 르푸어 카페(Le Pure Cafe)로 향하는 길. 셀린(줄리 델피)과 제시(에단 호크)가 서점에서 9년 만에 만나 조금 걷다가 들어간 곳. 실제로는 서점(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걷기엔 먼 장소더라. 76번 버스를 타고 샤혼느 거리(Rue de charonne)에서 하차. 이리저리 찾다가 눈에 띄는 빨간 카페 발견! 관광지도, 번화한 곳도 아니다. 일상의 거리를 걷다 마주한 동네 카페 분위기. 점원에게 “봉주르” 어색한 불어 인사를 하며 빈자리에 앉는다. 진한 커피를 잘 못 마시는지라, 우유를 섞은 카페오레를 주문한다.

주위를 둘러본다. 제시는 "왜 미국에는 이런 데가 없는지 몰라"라고 했는데, 나 역시도. 자존도 개성도 정감도 없는 그저 그런, 세련됐으나 획일적인 모조품, ‘프랜차이즈 카페’는 취향이 아니다. 스타벅스의 나라에서 온 제시의 감탄 섞인 물음을 전방위적인 프랜차이즈의 나라에서 온 나도 되뇌고 있다. 오래된 넉넉함이 느껴지는 탁자와 연한 붉은빛의 의자, 언제라도 익숙한 매무새로 맞이할 것 같은, 기억의 습작과 흔적을 고스란히 품음직한 곳. 여기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게 아닐까.


주변을 오가던 사람들은 잠시 들러 점원과 농치듯 대화를 나눈다. 연인은 활짝 웃으며 수다 중. 노트북을 펴 든 남성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다. 옆자리의 청년은 빛바랜 누런 종이에 작은 글씨로 빼곡한, 세월을 간직한 책을 펴고 앉아 있다. 이어서 글을 써내려 간다. 그는 작가일까? 그러고 보니 제시도 작가다.


카페에서 제시는 말한다. "나이 먹는 것이 좋아, 즐기게 됐달까." 셀린도 끄덕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20대가 지나버린 것이 슬프기만 했다. 이제는 "나이 먹는 게 좋다"고 한 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채워지지 않은 갈증과 욕망으로 항시 불안정했던 나날들. 점차 나이 먹어감에 따라 초연 해지는 마음가짐이 뭔지 어렴풋이 느껴진다. 상당히 중후해 보이는 카페에서, 이제 막 나이 먹는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 내가, 스무 살의 풋풋함을 가슴에 담은 채 서른이 넘어 만난 그들의 말을 떠올리며 앉아 있다.


PS. 프랑스의 카페는 커피와 차만 파는 공간이 아니라, (간단한)음식도 먹을 수 있는 형태가 많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테이블에 컵, 포크, 나이프 등을 세팅하는 모습이 보였다.


#2 겨우 찾은 셀린의 집, 원석 보물을 찾은 기분

단언컨대, 여기 가본 사람은 드물 거다. 나도 겨우 찾았다. 영화 막바지에 나오는 장소. 제시가 비행기 시간이 다됐는데도 셀린과 헤어지기 싫어 끝까지 따라온 곳. 셀린의 집.


정오에 다다를 무렵, 카페를 나선다. 샤혼느 거리를 따라 쭉 걷는다. 이어서 마주한 거리(Rue du Faub. Saint-Antoine)로 들어선다. 지도에 표시된 곳까지 왔는데, 찾기가 어렵다. 주택가로 들어가는 문(대문 같은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시 공동주택이 나오는 모습)이 곳곳에 있는데, 하나하나 다 들어가 보는 중. 제시와 셀린이 차를 세워두고 들어간 문은 대체 어디일까? 계속 엉뚱한 곳만 나온다. 목적지는 아니지만 매우 끌리는, 수수한 벽돌집과 수풀이 어우러진 소박한 주택가에 들어가, 우연한 발견이 주는 매력에 젖어들기도 한다.


한참을 들락날락해도 못 찾겠다. 포기하고 떠나려던 찰나, 느낌이 오는 문 발견. 오, 저기가 아닐까? 발걸음을 옮겼는데 아뿔싸, 대문이 잠겨 버린다. 절망하고 서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나온다. 냉큼 안으로 들어간다(계속 대문 안을 들락날락했지만, 저지하는 사람은 없더라).

느낌이 맞았다. 익숙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다. 제시가 "여기가 너희 집? 근사하다"라며 걸어가던 골목길. 셀린이 사랑하는 고양이 '체(Che)'가 등장해 가슴에 품던 곳. 숲으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골목 풍경이 바로 눈앞에, 가슴으로, 감촉으로, 내음새로 들어오는 순간이다. 고생 끝에 보물을 찾은 기분. 설렘을 안고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윽고 매우, 정말 오래돼 보이는 연립주택, 저기가 셀린의 집! 앞뜰에는 그녀가 저녁을 준비하는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던 곳. "우린 가끔 함께 파티를 열곤 해"라며 걸어가던 그 정다운 삶터.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영화 속 시끌벅적 대화 소리를 상상한다.


집으로 들어간다. 무척 오래된 나무 계단.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끼익 끼익. 제시는 "고풍스럽다 “고 했었지. 살며시 3층 셀린의 집 문 앞까지 오른다. 차마 두드리진 못하고, 계단에 걸터앉는다. 정말 낡은 집인데, 푸근하다. 나에게 집이 생긴다면, 새로 지은 고층 아파트보다는 이런 곳을 잘 꾸며서 이웃들과 저녁 파티를 즐기며 살고 싶다.


이곳에서 떠날 생각을 않는 제시를 보며, 셀린은 "그러다가 비행기 놓치겠다". 제시는 "나도 알아". 이후 상황을 보여주지 않은 채, 여운을 남기고 막을 내린다. 당연히 제시는 비행기를 놓쳤을 것이다(후속 편 '비포 미드나잇'이 말해준다). 나 역시 시간을 잃어버린다. 9년 전 첫 만남의 설렘을 그대로 담은 채 부르는 셀린의 노래, 기타 소리와 어우러진 그녀의 목소리, '왈츠'가 들려오는 상상과 더불어.


[다음 편에 계속] 플랑테 산책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로 이어집니다

영화 속 산책 동선과 실제 장소들의 거리와는 차이가 있어, 제가 걸었던 순서대로 정리했습니다

에필로그: '여행지에서 쓴 수첩 들여다보기'
"오늘은 파리의 '일상 공간'을 돌아봤다. 동네 카페부터 산책로, 서민 주거지까지. 샹젤리제 거리 등 유명 공간은 물론 '명불허전'이었다. 오늘 둘러본 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일상의 공간들은 세련미는 옅었지만 삶의 흔적들이 뿜어내는 포근함이 그득했다. 현지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하고 지리한 시공간이었겠지만, 영화 속 산책 장면들과 맞물려 나에겐 너무도 특별한 감성의 충만을 준 여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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