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여행] '플랑테 산책로', 고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전편에 이어 계속 https://brunch.co.kr/@jmseria/24
#3 플랑테 산책로에서 바게트 샌드위치를
다음 여정지인 플랑테 산책로(Promenade Plantee)는 걸어갈 수 있는 곳(이전 편에 나온 여주인공 셀린의 집에서). 지도를 펴 들고 얼기설기 이어진 골목길을 따랐다. 파리지엔들이 길게 줄지어 선 빵집(boulangerie)이 보였다. 관광지와 동떨어진 파리의 일상을 간직한 동네 빵집을 가고프기도 했고 마침 배고플 점심시간. 머리보다 몸이 더 앞서서 줄을 섰다. 자그마한 가게였다. 바게트의 나라, 샌드위치도 바게트다. 이것저것 속을 많이 채운 것 말고 깔끔한 걸 먹고 싶었다. 두터운 치즈에 야채만 든 걸 택했다. 4.2유로(약 6000원). 길고 큰 양에 비하면 아주 비싼 편은 아니구나. 에펠탑 앞에선 이거보다 훨씬 못한 게 5유로 던데, 어디든 관광지가 비싸구나. 오늘 점심은 이걸로, 산책로에서 먹어야지.
다시 남쪽으로 걸어, 목적지 도착! 상쾌한 새로운 세상이다.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른 고가에 펼쳐진 기다란 녹지. 단지 몇 계단 올라왔을 뿐인데, 산림에 들어온 기분. 플랑테 산책로는 제시와 셀린이 카페에서 나와 산책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곳이다. 원래 철도로 이용되던 고가를 푸른 산책로로 조성하면서 탄생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인상적인 도시재생 사례로도 자주 언급되는 곳이다(연남동의 경의선 숲길이나 서울역 앞 서울로 7017도 이러한 콘셉트로 과거의 철길, 고가도로를 녹지, 공원으로 탈바꿈시킨 사례다). 바스티유 광장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 갈라져 나오는 거리(Avenue Daumesnill)를 따라 펼쳐져 있다. 약 1.75km. 푸른 수풀과 나무, 라벤더, 양귀비 등의 다채로운 식물들이 도시인들의 어지러운 일상을 정화시킨다.
조깅하며 체력을 다지는 사람, 아이들과 걸으며 즐거운 듯 깔깔대는 사람들, 점심시간에 들러 햇볕 쬐며 쉬는 직장인들, 천천히 걸으며 사색하는 사람 등. 초록빛 수풀과 뒤섞인 이들 틈에서, 나 역시 여유가 철철철 밀려들어온다. 숲길을 걷다가, 셀린과 제시는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눈다. 그 의자와 닮은 곳에 나도 앉는다. 바게트 샌드위치를 꺼낸다. 기분을 들뜨게 하는 오후의 햇살을 음미하며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다. 기대했던 바대로 맛이 좋다. 오늘 아침 구웠을 빵도 입에 착 달라붙고 치즈도 신선하다. 부담스럽지 않은 담백한 맛이 내 취향이다. 여기, 도심 속 푸르른 오솔길 플랑테 산책로 역시도. 단 하나, 셀린을 닮은 연인이 없구나.
#4 재회의 공간, 안식의 공간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
재회의 장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Shakespeare & Company)를 찾는 건 쉽다. 파리의 중심 시테섬, 그 유명한 노트르담 성당 바로 건너편에 있으니. 어렵지 않은 발걸음으로, 그러나 내내 걸어 지친 다리를 이끌고 초록색 간판으로 향한다. 세월의 향기를 뭉근하게 내뿜는 파리를 닮은 고서점. 셀린 왈 “편한 분위기라 자주 와. 벼룩이 많긴 하지만". 그리고 벽면에 또렷이 적힌 문구.
BE NOT INHOSPITABLE TO STRANGERS LEST THEY BE ANGELS IN DISGUISE (낯선 이방인을 냉대하지 말라. 그들은 위장한 천사일 수도 있으니)
디지털 세상 밖으로 떨어져 나와 시간이 멈춰버린 공간을 우직하게 가꿔온 이는 누구일까? 역시 평범하진 않다. 평생 "완전한 공산주의자, 즉 커뮤니스트(communist)”였다는 사람, 조지 휘트먼(2011년 98세로 타계, 그의 딸 실비아가 이어 운영 중). 서점 역시 책을 매개로 한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열망이 담긴 터였다. 서점을 열기 전, 미국에서 파리로 건너와 소르본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값싼 호텔방에서 많은 책들을 쌓아놓고 지내던 때. 그리고 어느 날.
“강의를 듣고 돌아와 보니 모르는 사람 둘이 조지의 방에서 그의 책을 읽고 있었다. 공유 재산과 공동체 생활에 대한 그의 믿음을 생각하면, 가슴 벅찬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커피 말고 대접할 것이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 그때부터 집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 항상 수프와 빵을 준비해두었다. 책과 정신없이 쌓여 있고 다 함께 먹는 스튜 냄비가 있는 비좁은 호텔방, 이것이 조지의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가느다란 뿌리였다.”
- 제레미 머서, <시간이 멈춰 선 파리의 고서점> 중 -
조지는 “길 잃은 영혼과 가난한 작가들을 환영”했다. 무려 4만여 명이 묵어갔단다. 사랑으로 길을 잃고 헤매던 제시와 셀린의 영혼도 여기서 재회한다. 나는 그런 헤아릴 수 없는 애잔한 영혼들의 사연과 땀이 깃든, 그 영원의 공간에 들어가고 있다. 어느새 고서적이 뿜어내는 그윽한 책 향기에 완연히 둘러싸인다. 불어는 모르고 책을 봐도 잘 모른다. 그래도 책은 정겹다. 까막눈이 되었어도, 이리저리 마음에 드는 책을 펼쳐 본다.
<비포선셋>의 도입부. 작가가 된 제시. 자신이 쓴 소설에 대해 인터뷰 중. “제가 살아온 삶은 평범했으나 모든 삶은 드라마예요. 전 삶 속의 만남에 관한 얘길 글로 써보고 싶었죠". 그의 소설은 9년 전 셀린과 비엔나에서 보낸 하루로 채워져 있다. 단 하루였지만 강렬히 뇌리에 박힌 추억. 시간은 동일하지만 기억은 같지 않다. 그는 30년 넘게 수많은 하루를 살았겠지만, 셀린과 함께 한 하루만큼 가슴 아리게 다가온 날은 없었나 보다. 그의 베스트셀러는 그 아련함에서 잉태됐다.
2층으로 오른다. 노트르담이 보이는 창가 쪽으로는 제시가 그랬듯, 인터뷰 중인 사람들이 있다. 안쪽에는 가난한 작가들이 몸을 뉘곤 했을 소박한 침대에서, 한 소녀가 몸을 기댄 채 책을 읽는다. 가운데로는 오래된 타자기와 함께 놓인, 한 사람 겨우 들어가 앉을 정도의 자그마한 집필 공간이 있다. 많은 여행객들이 남긴 메모지가 한가득 벽지를 이루며 붙어 있다. 나도 앉아 본다. 수많은 예술혼들의 손때 가득한 타자기를 앞에 두고, 셀 수 없는 다양한 언어로 적힌 손 글씨에 둘러싸인 채로.
어느새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바로 옆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역시나 책 향기가 그득한 방, 구석에 소박한 피아노가 놓여 있다. 이름 모를 누군가가 연주 중. 감미로운 선율이다. 가장자리 푹신한 의자에 앉는다. 왼쪽 자그마한 침대에는 회한의 미소를 머금은 노인이 피아노 건반을 처연히 응시하며 감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맞은편의 청년은 흔들의자에 앉아, 누름히 색이 바랜 두툼한 책을 읽고 있다. 우리 넷은 아무 말 없이, 그러나 함께 머물러 있다. 분위기도, 선율도, 의자도 안락하다. 종일 걷다 지친 육신이 느릿한 리듬 속에 머무는 순간, 잠시 들른 여행객에게도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곳.
파리에서 노숙자로 헤매다 이 서점을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작가 제레미 머서, 그는 여기서 지낸 경험이 인생을 바꿔놓았다고 했다. 떠나온 삶에 의문을 품었으며 살아갈 날을 새로이 꾸렸다고. 그는 “인생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이란다. 이 오래되고 낡은, 그러나 찬란히 빛나는 서점에 오면, 그동안 품고 있던 생각들이 조용히 전복되는 기운에 휩싸인다. 조지의 말 “여기는 저 건너 노트르담의 별관이라는 생각이 들곤 해. 저곳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별관”. 성스럽고 우아함과는 거리가 먼 가난한 영혼들의 성소. 자본의 논리가 탈각된 소탈한 정취에 끌리는 안식처. 그렇게 성스럽고 초라한 것들에 대한 인식이 뒤바뀌고, 수북이 쌓인 책과 함께 생각이 다시 채워지는 “변증법적 과정”을 체득하는 그런 곳.
서점을 나오니 해가 저물고 있다. 하루 종일 함께한 <비포선셋>의 발자취. 이젠 말 그대로, 해가 지기 전 파리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는 순간. 서점과 시테섬을 잇는 작은 다리에 서서 서쪽을 바라본다. 하늘 저편으로, 줄지은 고택들 너머로 주황 노을빛이 은은히 비춰온다. 왜 비포선셋을 파리에서 찍은 줄 알겠다.
해질녘 파리,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에필로그: 수북한 메모지들 사이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붙이고 온 메모글
"혼자 와선 이런 메모 안 하려 했는데, 너무 좋은 곳이라 남긴다. 이 곳은 가난한 작가 지망생들의 안식처라 들었는데, 나 같은 여행객에게도 하루 종일 걷다 지친 심신을 한 숨 돌리게 하는 정겨운 공간이다. 편히 앉아도 되고, 잠시 쉬었다가도 되고. 책과 함께... 아름다운 파리에서 발견한 또 다른 명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