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 도시혁신 기행... 주민과 보행자가 우선권을 갖는 동네에 가다
이 글은 저도 참여해서 공저한 '빌바오, 몬드라곤, 바르셀로나. 도시, 혁신을 말하다'에 소개된 내용 일부입니다. 각자의 개성을 지닌 스페인의 세 도시를 방문(물론 코로나19 이전)해 현대사회의 복합문제(기후위기, 불평등, 도시쇠퇴와 재생 등)에 대응하는 도시/지역 현장의 사례를 답사하고 현지인들을 만나 취재했습니다. 전체 글은 아래 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412633220&start=pnaver_02
동네와 거리를 사람에게 돌려주다... '슈퍼블록' 프로젝트
익숙한 아스팔트 차도에 여유로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소란스럽게 달리는 자동차 대신 느긋하게 산책을 나왔다가 멈춰서 쉼을 청하고 있는 노신사가 눈에 들어왔다. 번잡한 교통량으로 드글거렸을 교차로에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뛰놀 수 있는 놀이터가 자리했다. 옆 길목으로 들어서니, 잿빛 아스팔트 위로 탁구대가 덩그러니 놓였다. 흡사 잠시 이벤트로 장식된 설치 예술물로 느껴지는 이러한 차도 모습은 기실 일상의 풍경이었다.
슈퍼블록(스페인어: Superilla, 영어:Superbloc), 바르셀로나 도시혁신의 야심찬 프로젝트는 이렇게 작고 소소한 동네 풍경의 변화로부터 명징하게 감지되고 있었다.
지금 이곳, 바르셀로나 동쪽 해변가와 인접해있는 포블레노(Poblenou) 지역은 1840년경부터 1970년대까지는 '카탈루니아의 맨체스터'(Catalan Manchester)라 불릴 정도로 제조업이 성했던 밀집 공업지대였다. 특히 섬유, 방직산업으로 융성했다. 그러나 이후 제조업의 쇠퇴와 공장들의 폐업은 도시 분위기를 어둡고 황폐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1998년부터 이 쇠락한 산업지대를 어떻게 탈바꿈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고, 이는 '22@바르셀로나'라는 도시혁신 전략으로 체계화되었다. 공업지구에서 지식기반경제, 교육, 주거, 문화, 환경 등 복합적인 도시기능을 수행하는 혁신지구(Innovation District)를 조성하는 계획과 실천으로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포블레노는 슈퍼블록 프로젝트의 첫 실험지(pilot testing site)다. 22@ 전략과 맞물려 도시와 주민들의 삶을 재구성하는 실천, 과거 바르셀로나의 산업혁명기를 이끌었던 지역은 다시 21세기형 도시혁신의 첨단 실험을 하는 터전으로 나서게 된 셈이다. 쇠퇴한 도시의 기능을 탈바꿈하는 여러 전략 중 슈퍼블록은 특히 주목해야할 지점이 많다. 거주민, 나아가 도시 전반의 이동권 혁신(차량제한과 보행자 우선), 환경위기 대응과 생명권 보장(대기오염 개선), 공공 공간(public spaces)의 확장 등 사회적, 생태적 전환을 향한 도시혁신의 구체적인 실천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과 보행자가 진정으로 우선권(real priority)을 갖는 도시"
슈퍼블록은 '세르다 계획'(Plan Cerda, 1860)으로 형성된 바르셀로나 도시구성의 기본 블록단위 만싸나(Manzana) 9개를 합해 재형성한 '묶음 불록단위'다. 가로세로 400m 길이에 약 5000~6000명 정도의 주민들이 거주하는 생활권이다. 슈퍼블록을 함께 거닐며 현장을 안내한 바르셀로나 엑티바(Activa)의 디렉터 프란세스크(Francesc Miron)는 "만싸나보다 크고 근린생활권보다는 작은 범위다. 보행자와 자전거 우선의 평화로운 내부 거리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슈퍼블록은 거주민과 보행자들이 진정으로 우선권(real priority)을 갖는 도시, 자전거, 대중교통이 개인차량에 우선하는 도시를 만들고 조직하는 모델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블록 내 거리들은 차량통행로를 넘어서는 다양한 기능을 재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슈퍼블록 프로젝트의 시행 자체가 바르셀로나 공공 공간을 근본부터 다시 생각하며 실질적으로 재생할 수 있는 획기적인 시도라고 강조했다. 슈퍼블록 걷기에 앞서 그가 프리젠테이션을 통해 소개한 옛 사진 속 거리는 자동차가 달리고 있을 뿐 아니라 양옆 갓길까지 온통 주차된 차로 가득했다. 빽빽한 차량중심 공간이었다. 지금은 자동차가 모조리 사라졌다. 담소를 나누는 벤치, 야외 탁구대, 녹지, 예술조형물 설치, 놀이터, 자전거 주차장 등으로 탈바꿈되었다. 아스팔트 도로를 갈아엎는 식의 공사는 없었지만, 도로 공간에 배치되는 사물들이 완전히 재구성되었다.
이는 곧 도로를 이용하는 주체들의 변화로 이어진다. 슈퍼블록 구역 내 거리는 차량통행이 엄격히 제한된다. 거주민, 지역 내 상공인 등이 아닌 일반적인 차량, 스쿠터, 트럭은 블록 내로 들어올 수 없다. 통행이 허가된 차량이라 하더라도 속도를 시속 10km로 늦춰야 한다. 통상 바르셀로나의 전반적인 거리는 시속 50km, 특정한 구역은 30km 제한 정도다. '진정한 우선권'을 보행자/자전거에 준다는 슈퍼블록의 설명은 구호가 아닌 일상에서 구현되는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
슈퍼블록 계획 자료와 입안자들의 표현에는 도시 공간의 '재탈환'(re-conquer spaces), 거리를 '되찾기'(to win the street back) 등의 지향을 나타내고 있다. 자넷 산즈(Janet Sanz) 바르셀로나 시의원은 2017년 <가디언>을 통해 "이 계획은 도시생태계가 가야할 본질을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주민들은 거리에서 인생의 아주 긴 시간을 보냅니다. 이 일상의 거리들은 제2의 집들(second homes)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지역 내)공공 공간은 주민들과 아이들의 놀이공간, 일상적으로 영위할 수 있는 녹지, 동네의 역사와 지역민들의 삶이 현존하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슈퍼블록을 걸으며 마주치는 다양한 풍경들
슈퍼블록은 또한 바르셀로나 근대 도시계획의 아버지 세르다(Cerda)의 철학을 되살리고 계승하여 다음단계로 도약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주요 추진자 중 한사람인 살바도르 루다(Salvador Rueda)는 <가디언>을 통해 "세르다의 당초 취지였던 녹지계획은 잠식당하고 이런저런 건물이 들어섰다. 자동차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자 점차적으로 차량에 공간을 내주게 되었다"며 "우리는 녹지 공간들을 되찾길 원하며 이는 오직 과감한 이동/교통수단의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포블레노의 슈퍼블록 프로젝트는 차 소유자 등에 의해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최근 반발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주민들이 점차 차 없는 동네(traffic-free neighbourhood)의 이점이 주는 편익을 즐기기 시작했으며, 우려와 달리 지역비즈니스 또한 이전보다 30% 가량 증가했다. 걷기와 자전거를 통해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은 자연스런 귀결로 나타나고 있다.
프란세스크의 안내가 끝나고 슈퍼블록을 천천히 걸었다. 자전거를 탄 주민들이 앞뒤로 스치며 계속해서 지나갔다. 아마도 거주민인일 운전자가 탄 승용차는 거북이 속도로 자전거보다 훨씬 느리게 뒤따라왔다. 삼삼오오 아스팔트 위 아늑한 벤치에 둘러앉아 스낵을 먹으며 쉬고 있는 노동자들 무리도 들어왔다. 블록 벽면에 근사한 형형색색의 그라피티 벽화를 그리고 있는 아티스트들의 작업도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역시 가장 많이 보인 건 느긋하고 넓게 도로를 향유하며 걷고 있는 보행자들, 즉 유모차를 끄는, 조깅하고 있는, 이어폰을 끼고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동네를 누비고 있는 남녀노소 주민이었다.
자동차가 사라지자, 거리가 맞닿는 사거리 교차로는 제법 넓은 공간이 생겼다. 둥그렇게 나무 울타리를 친 아이들의 놀이터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시소와 그네를 타는 아이들의 미소는 싱그러웠다. 그를 안심하며 지켜보는 부모의 표정도 여유로웠다. 블록 중간에 자리한 공공임대주택(Social housing)은 화려함은 없지만 누추함도 없었다. 소탈한 건축물 사이로 곳곳에 보이는 주민들이 재배 중인 푸른 식물들, 외벽에 색깔을 넣은 포인트들, 베란다에 내건 까탈루니아 깃발 등은 우리의 천편일률적인 임대아파트와 다른 개성과 정감을 주었다. 산뜻한 블루컬러로 치장한 또다른 주택은 젊음의 기운 또한 선사했다. 앞서 프란세스크가 안내할 때 "특히 사회주택 등으로 유입된 청년과 젊은 부부들에게 슈퍼블록은 매우 호응이 좋다"고 말한바 있다.
느리게 걷는 재미가 있는 슈퍼블록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