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허무하게 사라지는 단골집을 보며
주말이면 집에서 축구를 본다. 토요일 밤, 동네 맥주 집에서 한잔 하고 느지막이 들어온 날에도 졸린 눈 비벼가며 시청한다. 요즘은 인기가 많이 시든 이탈리아 세리에A 경기를 자주 본다.
살면서 계기는 필연과 철저한 계획이라기보다 뜬금없는 우연과 아무런 의미 없는 선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코 흘리게 시절, 동네 형 집에서 친구와 둘러앉아 흑백 컴퓨터 앞에서 올림픽 게임을 했는데, 나라를 고를 때 아무 뜻 없이 가위바위보 해서 선택하는 식으로 이탈리아를 택했다. 말총머리 축구스타 로베르토 바조가 뛰던 1994년 미국 월드컵이 개최했고, 게임에서 골랐던 나라라는 이유로 이탈리아를 응원했고, 이후 점점 축구를 좋아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축구 리그까지 즐겨 보게 되었다. 인터넷이 상용화되고, 온라인 속 나의 이름인 아이디는 이름 이니셜과+SERIA(세리에)를 합친 걸 채택해 지금까지 쭉 이용하고 있다.
축구는 전후반 90분이다. 농구나 야구, 배구와 비교해 득점이 많이 나오는 경기가 아니다. 그밖에 요즘 게임들은 얼마나 시종일관 스펙터클 한가. 어쩔 때는 1골도 없는 밋밋한 경기를 보고 있다. 경기 흐름 전개가 막히면 결정적인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 지루한 공방만 반복이다. 즉각적인 이벤트 전개와 수시로 튀어나오는 단발 자극이 추앙받는 게 요즘 추세다. 게임, SNS, 유튜브, 팟캐스트, 포털, 카카오톡, 넷플릭스, OTT 서비스.... 손가락 하나를 가지고도 만끽할 수 있는 무한한 콘텐츠의 향연에 지루할 틈이 없는 세상이다. 90분 공차는 장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축구 팬들은 진득하고 엉덩이가 무거운 높은 수준의 집중력 소유자일 수 있다.
근사했던 가게가 어느 날...
순간 눈길을 확 사로잡은 콘텐츠와 이미지는 금세 또 다른 멋지고 괴짜 같은 이미지로 대체된다. 동네도, 골목도 엇비슷하게 검색되고 눈에 띄며 소비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동네를 생동감 있게 채우는 상점은 지역 분위기를 띄우고 걷는 길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주민과 찾는 이에게 활력을 준다. 그러나 근사했던 가게가 어느 날 허무하게 사라지고 지워진다. 2017년 이래, 두 번째 주민으로 돌아와 살던 때부터 떠올려본다.
미셰린 가이드에 소개되었던 순대 요릿집 OO고메가 어느 날 문을 닫았다(개인적으로 정말 아쉽다). ‘서교동 작은 골목 안 소박하고 정직한 맛의 이태리 식당’ OO펠리체가 문을 닫았다. OO정미소가 문을 닫았다. 카페 O몽, 그리고 OO나무 커피가 문을 닫았다. 카페 OO리원이 문을 닫았다. 재활용 매장 OO인유가 문을 닫았다. OO중식당이 문을 닫았다. 맥주집 O묘가 문을 닫았다. 와인집 OO새나가 문을 닫았다. 초밥집 O스가 문을 닫았다. 반미 맛집 OOO바게트가 아쉽게 이전했다.
단지 없어진 곳은 아니다. 로컬 주민이 추천하는 맛집, 멋집, 누가 동네에 놀러 오면 강추하며 데려가고 싶은, 여러 번 데리고 간 ‘서교동 주민 pick’ 가게였다(물론 개인 취향의 반영이다). 이제는 갈 수 없고 새 곳을 물색해야 한다. 가기 전에 남아있는지, 그새 없어졌는지, 꼭 검색하고 확인하고 가야 허탕 치지 않는다.
인스타 맛집은 물론 그래도 유행 덜 탈 거 같은 주민 픽 가게도 순식간에 어느 날 찾아가면 간판을 내리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시간과 세월의 덧없음을 음미하기도 전에 스크롤 문지르면 화면이 휙휙 지나가버리는 맛집 포스팅을 연상한다. 좋아요 누르고 지루하면 다른 화들짝 한 이미지로 옮겨가듯, 핫한 가게와 플레이스는 거창하게 역사 속으로가 아닌, 바로 내일이면 기억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페이지 뒤로 밀려난다. 다른 독특하고 관심을 끄는 스타일리시한 가게로, 골목으로 옮겨 붙어 뜨거워진다. 물론 내가 좋아해 마지않던 가게들의 문 닫은, 이주한 사정은 제각각 다를 것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은 이제 한가한 소리이지 않나 싶다. 한 달, 두 달, 하루, 이틀, 갈수록 주기가 빨라지고 있음이 느껴진다. 초단위로 쓰고 잊어버리는, 금세 다른 새로운 자극을 검색창에 입력하는 패턴이 매일의 삶에 침투한다. 취향저격 골목은 매력 있게 치장되어 소비와 인증의 명소로 자리한다. 동네는 트렌드 곡선에 휘둘리는 소비의 장이 된다. 그렇게 골목 가게도 동네 공간도 철 따라 변덕스럽게 포착되고 소비된다.
그러나 터치 한 번에 곧바로 시선 꽂히는 이미지, ‘좋아요’와 더불어 스위치 켜지는 주기 빠른 도파민 자극에 둘러싸인 삶이 반드시 바람직한 건 아니다. 기분 따라 오르내리며 고르고 즉흥적으로 행하는 게 꼭 좋은 건 아니다. (정신)건강에도, 동네에서의 삶에서도. 힙하거나 대안의 기운이 주위를 세련되고 보기 좋게 가꾸며 활력을 주었다면, 순간의 변화로 끝나지 않게 이용하고 정착하게끔 할 필요도 있지 않을까. 마음과 발길을 붙잡는, 머물렀으면 하는 존재가 곳곳에 나무처럼 잔류해야 동네 정서가 유지되고 개성과 역사가 쌓인다.
수양 삼아서라도 축구는 계속 끝까지 보려고 한다. 90분 동안은 다른 행동 웬만해선 안 하고 그것만 바라보는 집중과 몰입의 자세로.
카페 jamong
없어진 가게가 아쉬운 곳을 꼽자면, 먼저 뇌리에 지나가는 건 카페 jamong이다. 2017년, 6년 만에 다시 서교동으로 이사 들어오던 날이 떠오른다. 낑낑대고 땀 흘리며 이삿짐 나르다가,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연립주택 계단을 내려갔다. 3~4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집에서 가까운 카페가 jamong.
만화 캐릭터 같은 귀여운 글씨로 이름이 적힌 간판이었다. 주택가 옆에 붙은 작은 상가의 1층 자리, 크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좁거나 답답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널찍하게 의자와 테이블을 배치해두었고, 북유럽 감성 비슷한 심플한 공간 구성은 복잡한 잡동사니로 한가득 이었던 이삿짐 꾸러미와 대비되어 쾌적함과 편안함을 주었다. 엉망인 방을 치우다가 깔끔하게 정돈된, 거기에 맑은 소리를 내는 스피커를 놓아둔 거실에 나와 클래식을 들으며 쉼을 청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여기, 앞으로 우리 거실 삼자.
이렇게 쾌적한 공간인데, 커피 값은 단돈 2천원. 맛도 좋았다. 테이블이 다 찬다고 해도 몇 개 되진 않을 텐데, 그렇다고 테이크아웃 해가는 손님이 많은 역세권이나 번화한 곳도 아니고, 하루 몇 잔을 팔아야 운영이 될까, 이런 생각을 물론 처음 갔을 당시에는 하지 않았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수지타산과 이익에 대한 계산 머리를 빠삭하게 쓰며 장사하는 분들 같지는 않았다. 동물권이나 여성주의 관련된 책이나 잡지가 여럿 놓여 있기도 했다.
그 후로도 자주 들렀다. 노트북 들고 가서 작업을 했다. 책 한 권 들고 가거나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않은 채, 거기 놓여있는 책을 보면서 커피 한잔 마시고는 했다. 벽면을 활용해 작은 갤러리 전시도 주기적으로 했다. 관계 맺은 예술가로 보이는 분들이 그린 작품을 자연스레 걸어놓으며 주민과 손님에게 선보였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봄날을 주제로 그렸던 마을의 풍경화였는데,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과 함께 책을 펴고 씁쓸하고 부드러운 커피를 곁들이니, 편안하고 격 있는 문화 공간에 앉은 격조 있는 교양 시민 인양 차분하고 충만한 기분이 들었다. 부담 없는 가격이라, 외출 길에 들러 텀블러에 테이크아웃을 해간 적도 많다.
그러던 어느 날, 이제 문을 닫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니, 왜요? 그거야 임대료 때문이죠. 사장님은 그렇게 커피보다 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동네에 카페는 점점 더 아직도 많아지고 있었다. 자몽은 과잉 한가운데에서 균형을 맞추기 위한 뺄셈의 희생양이 된 것 마냥 숫자 하나를 줄이며 사라졌다.
문자가 왔다. 카페 문 앞에도 쓰여 있었다. 영업을 종료합니다. 쿠폰에 도장을 찍은 분이 있으면 카페에 들러 주세요. 이용하며 찍었던 쿠폰을 들고 오면 커피나 음료 한잔을 주겠다는 메시지였다. 10개 도장 찍으면 한잔 서비스로 주는 종이 쿠폰. 2천원 커피에 또 뺄셈을 할 게 어디 있다고, 그래도 꾸역꾸역 도장을 찍어서 받아갔다. 몇 잔 서비스로 먹고, 지갑에는 하나인가 두 갠가 찍힌 쿠폰이 있었다. 8~9잔 더 마셔야 한잔을 얻어먹을 수 있건만, 사장님은 도장 숫자에 상관없이 똑같이 한잔씩 내주었다. 그동안 감사했다는 말과 더불어서.
서비스는커녕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찍어두었던 쿠폰을 소멸하더라도 사실 크게 원망은 안는다. 큰맘 먹고 청운의 꿈을 안고 홍대 근처에 가게 문을 열었을 텐데, 오죽하면 문을 닫았겠나. 생각하면서 아주 약간의 아까운 마음만 품은 채 넘어가고는 한다. jamong은 쿠폰 도장 하나까지, 떠나는 마무리 날까지 그냥 사라지지 않고 사소한 챙김까지 남겼다. 처음과 끝이 좋은 사람에게 더 할 말이 있을까? 처음과 끝까지 좋았던 jamong이 사라져서 매우 안타깝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