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주민 Aug 31. 2021

하동이 서교동에... 일상 속 '팝업'

귀갓길에 맞이한 이벤트, 의외성의 순간

그날도 울림두레생협 성산점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성서초교입구 교차로에서 잔다리로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언제나와 같이 성산동에서 서교동으로 경계 없이 바뀌는 거리를 태연하게 지나가는 순간이다. 얼마 안 가서 투명 녹색 아크릴판에 ‘HADONG WILD, 야생을 담아가세요’라고 적힌 채 세워진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동(경상남도)과 녹차가 서울로 상경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중식당 ‘진진’의 건너편에서 가까운 곳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누추하고 허름한 상가 건물이었다. 지금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엇비슷하지만, 변한 듯 변하지 않은 듯 고치고 재생한 곳 앞이었다.


원래 1층에 (브랜드 매장은 아닌)슈퍼마켓이 있던, 거리에서 가장 오래된 축에 속한 낡고 쇠퇴한 상가 건물이었다. 어느 날 ‘로컬스티치’라고 하는, 오래된 건물을 한 땀 한 땀 개량하여 근사하게 되살려 운영한다는 곳에서 여기에 ‘서교 2호점’을 낸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곳저곳 손상되고 닳고 뜯겨나간 세월의 흔적이 묻은 외관은 거의 그대로다. 그러나 분명 어딘가 변했다. 슬쩍 손을 본 거 같은데, 하다 만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이런 게 실력일 것이다. 복고풍 감성과 모던함이 동시에 흠뻑 묻은 허름하지만 근사한 건물로 재탄생했다.


그곳에 녹색 빛깔 하동 녹차 표지판이 놓였다. 건물 뒤편으로 오라는 문구와 함께. 따라 걸어 들어갔다. 거의 사용하지 않았을 법한, 어둡고 우중충했을 건물 뒤 잉여 공간도 안뜰처럼 펼쳐졌다. 거기도 세월이 흘러 낡고 해어진 작은 단층집이 있었다. 이곳 역시 손댄 듯 대지 않은 듯 바뀌었다. 붉은 벽돌로 층층이 쌓아 올린, 때 묻고 깨져서 덧댄 흔적을 그대로 남긴 채, 자연스레 고치고 슬쩍 단장한 집이었다.


여기서 서울로 온 하동 녹차가 ‘팝업 매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터에 머뭇거리고 서있자, 상냥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에서 전시와 체험도 하고 있어요. 들어와서 편히 둘러보세요!” 동네에서도 후미진 곳이다. 이런 끌어당김이 없었다면 평소에는 들여다보지도, 들어와 있지도 않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히 그냥 지나쳐버리는 곳, 외지고 어둡고 갈 일이 없는 뒷공간이라 전혀 거들떠보지 않던 곳이다. 


슬리퍼 신고 장바구니에 식재료를 바리바리 싸들고 걷다가 새로운 이정표에 이끌려 모르던 곳에 흘러들어왔다. 동네를 걷다가 우연찮게 맞이한 숨겨 놓은 이벤트처럼 다가왔다. 순간 기분을 들뜨게 했다.


전시 겸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곳은 ‘올어바웃’이라는 사회적기업 창업팀이었다. ‘슬로시티 하동을 서울 팝업스토어에 통째로’ 담아왔다고 소개했다. 더 자세히는 하동이 서교동으로 온 것이다. 좁고 누추했을 공간인데, 입구부터 큰 변화 없이 그러나 멋지게 꾸며놓았다. 새로운 감각으로 시골마을 하동을 담고 해석한 영상물은 센스가 넘쳤다. 차나무와 열매, 심지어 흙도 가지고 올라왔다. 자투리 공간 곳곳에 아기자기하게 배치해놓으며 현지를 전했다. 지역사회의 역사와 스토리를 활용한 작은 전시도 즐거웠다. 옅고 짙은 녹색을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페인팅한 컵들과, 창밖으로 유유하게 놓인 푸른 풀잎을 담은 화분도 운치를 더했다.


일상을 새롭게 하는 우연, 이벤트


나는 하동을 종종 가곤 했다. 구례, 남원, 하동 등 지리산을 두르고 있는 아랫동네를 좋아했다. 남쪽으로 여행 가면 자주 들르는 단골 코스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동네에서 맞이하는 하동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특히 도시인의 감성에 가닿게끔 하고 있었다. 야생, 시골, 지역을 재해석하고 표출한 전시, 홍보, 상품에 담긴 신식 감각은 ‘청년’이 왜 필요한지, 적극 유입시켜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는 듯했다. 우리만 보고 있기 아쉬울 정도로 센스 있고 새롭고 수준급이었다.


녹차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니지만, 시음용으로 다기를 통해 내려준 차는 깔끔하면서도 깊은 맛을 주었다. 커피는 강한 자극으로 도시의 삶을 끌어올린다. 그거에 비하면 차는 옅으면서도 깊고 은은했다. 차분히, 느리게 앉아서 먹어야 맛을 음미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왜 커피가 온통 이 빠른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다면, 차의 매력을 잠시나마 감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한 달여 동안 팝업 매장을 운영한다고 했는데, 아는 친구나 지인이 동네에 놀러 오면 꼭 다시 들르겠다고 말했다. 그들은 활짝 웃으며 주변에 많이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인스타그램에 인증을 올렸다.


낡고 스러져가는, 후미지고 어둡게 방치된, 저 이용 공간의 정돈과 재생은 건물의 이해관계자는 물론 골목과 동네에 활력을 주기도 한다. 시민들에게 열린 전시나 팝업 행사를 하는 곳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과거의 것을 완전히 허무는 형태가 아닌, 이렇게 보존한 채 다시 생기를 불어넣은 공간은 더 특별하게 자리 잡는다. 벽돌마다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잃지 않고 더하면서 재탄생하였기에, 단순한 새것과는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늘, 언제나와 같이, 별다를 거 없이 건조로울 수 있는 귀갓길에 맞이한 의외성의 순간, 우연한 이벤트였다. 그저 흘러가는 매일의 삶만으로는 힘이 없다. 익숙하고 자동적인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일상을 변화시키고 재발견하고 새롭게 하는 적극적인 기획과 예상치 못한 행위 또한 동네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다음 편에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