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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Sep 23. 2021

홍대 밤거리 뒤로하고 도서관행

걸어서 도서관에 갈 수 있는 동네가 좋다

그 도서관에 가면 추리닝 바람으로 가볍게 온 사람이 있다.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묶은 채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을 한 여성, 널널한 후드티에 야구모자 쿡 눌러쓰고 부스스한 머리를 감춘 채 책을 보는 청년 남성도 보인다. 점잖은 모자를 쓰고 돋보기안경으로 조간 종이신문을 유심히 훑어보고 있는 어르신도 있다. 무거운 수험서를 잔뜩 책상에 올려놓고 씨름하듯 문제를 풀고 있는 시험 준비생도 여럿 있다. 불혹을 훌쩍 넘겨 보이는, 아마도 다른 일을 하다가 뒤늦게 경로를 바꿔 도전하는 것으로 보이는 늦깎이 수험생 중년 여성, 남성도 있다.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은 서로 작게 소곤대면서 책을 고르고 있고, 아이들은 엄마, 아빠 손잡고 어린이실로 향한다. 


나는 별다른 목적 없이 들렀다. 열람실을 흘깃 들여다본 뒤 자료실로 들어와서 서고를 살펴보며 두리번거리고 있다.


홍대 심장부의 조용한 도서관


여기는 홍대의 심장부다. 한껏 치장한 유행과 밤의 향락을 가득 품은 지역 한복판에 도서관이 있다. 홍대가 지금처럼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핫’한 지역이 되기 이전부터(1995년) 있었다. 마포평생학습관. 이곳이 공공도서관이 아니었다면, 근처의 하고많은 술집이나 밥집 거리 비슷하게 되었을 것이다. 서교동에 들어와 산 후 이곳을 몇 번이나 드나들었을까. 홍대 앞은 급격하게 변했고 올 때마다 간판이 바뀌는 곳도 셀 수 없이 여럿이었지만, 도서관은 터를 잡고 그대로 남아 있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도서관이 있는 동네가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꽤 규모 있는 공공도서관이 근처에 있다는 건 주민으로서는 복이다. 차려입지 않아도 홍대에 갈 수 있다. 돈이 없어도 들를 수 있다. 약속시간이 늦어져서 시간이 가운데 붕 뜬 경우에도 경계 없이 활짝 문을 열어둔 도서관에 가 있으면 된다. 특별한 건수 없는 날에도 집에 있기 답답하면 나와서 혼자서도 들어가 있을 곳이 있다. 책뿐 아니라 신문, 잡지, 컴퓨터, DVD/영상물 시청 등 다양한 거리들이 비치되어 있다.


건물에 들어서면 입구에 보이는 카페로 향한다. 시각장애인과 함께 일하고 있는 사회적기업이 운영하는 곳이다. 텀블러를 들고 가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주문한다. 1,500원, 저렴한데 맛도 괜찮은 편이다. 오전에 가서 한잔 들고 나와 책을 보면서 마시고, 오후에 부족하다 싶으면 한잔 더 리필해서 먹는다. 1,000원이면 다시 가득 채워준다.


로비로 가면 수영장 냄새가 난다. 지하에 실내 수영장이 있는데 여태까지 한 번도 이용해본 적은 없다. 시민들에 열어놓은 평생학습과 관련한 다양한 교육, 문화강좌나 체험 프로그램도 있다. 관심이 있는 내용이 있는지 슬쩍 홍보물을 살펴보고는 옆에 있는 좌석 예약 기계로 가서 오늘은 노트북 석을 하나 고른다. 4층 노트북(휴대용학습기기) 자율학습실로 올라가서 좌석에 앉아 콘센트를 꼽는다. 굳이 고정 자리가 필요 없을 때는 그냥 3층 문헌정보실이나 4층 디지털/간행물실로 가곤 한다. 거기도 자율 좌석이 많이 있다.


오늘은 그동안 미뤄두고 못 썼던 글을 써보려고 한다. 주위에는 컴퓨터나 스마트폰, 태블릿을 이용해 온라인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그냥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는 사람도, 워드 프로그램을 띄워서 과제 같은 걸 열심히 하고 있는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도 있다. 여하튼 주위에 사람이 있다는 건 왠지 모를 동기부여를 준다. 집에서 혼자 책상에 앉으면 몸이 쉽게 나른해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TV를 보고 있어서 일이 잘 진행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도 여기 오면 딴짓은 조금씩 해도 좌우지간 진도가 나간다.


얼마 전 다녀온 영국 해외연수에서 겪은 사연과 현지 경험에 대한 글을 정리하고 있다. 쓰다가 막혀서 정보가 필요한 순간. 한층 내려가서 문헌정보실에 들어가 ‘영국, 도시’ 등등의 키워드를 넣고 검색한다. 그래도 꽤 많은 자료가 있는 도서관이다. 관련된 책을 몇 개 집어 들고 근처 자리에 앉아 훑어본다. 이 내용은 참고해서 쓸 만하겠군. 눈에 들어온 내용과 출처를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해둔다. 자세히 보면 좋음 직한 책은 데스크로 가서 대출을 신청한다. 다시 노트북 석으로 돌아와 폼나게(?) 책을 옆에 쌓아두고 쓰는 작업을 잇는다. 


오늘은 원고 글을 몇 장 썼다. 뿌듯함을 안고 도서관 밖으로 향한다. 떠들썩한 홍대의 주말 저녁이다. 제각각 멋스럽게 꾸미고 개성 있게 입은 청춘들이 환하게 들썩이는 거리를 채웠다. 나는 조용한 도서관에서 나와 곧바로 마주하는 요란한 인파를 가르며 홍대 거리를 걷는다. 신나게 웃고 떠들고 초저녁부터 거하게 취해서 흔들흔들하는 사람들과 스친다. 그리고 건너편 한적한 동네로 걸어 들어간다. 


성산동으로 분산되는 발걸음


이 도서관이 생기고 나서는 홍대가 아닌 성산동으로 가는 경우가 늘었다. 집에서 걸어서 20분 조금 넘게 걸리는 거리지만, 성미산을 둘러서 운동 삼아 걸어가면 다닐만했다. 자전거를 타고 오가기도 했다. 그러면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마포중앙도서관은 웅장했다. 2017년 말 개관한 이 구립도서관은 마포구에서 야심 차게 준비해서 내놓은 공공 인프라 문화시설이다. 신식 건물인 만큼 쾌적한 시설에 내부 공간의 디자인과 분위기도 수려하다. 그러면서도 심플하고 이용하기 좋게 배치해놓았다. 도서관 안으로 종일 은은하게 작은 볼륨으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도 평안함과 집중력을 고취했다. 서가 옆에 자유로이 놓인 쿠션 의자들은 푹신한 쉼의 장소를 선사했다. 책을 보다가 몸을 뉘이고 잠시 눈을 붙이는 느긋함을 즐길 수 있다. 요즘에는 잘 보이지 않는 지난날의 유품과도 같은 CD나 LP판을 골라서 헤드폰을 끼고 음악 감상을 하는 곳도 있고, DVD/영상자료를 빌려다가 커다란 화면 앞에서 영상물을 시청할 수도 있다.


홍대의 마포평생학습관은 구도심이 된듯했다. 성산동에 신시가지가 생기자 그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현저하게 늘었다. 물론 두 도서관은 위치 차이가 있어서, 두 곳 모두 계속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사는 곳은 두 도서관 사이 어디쯤이다. 홍대의 도서관도 중간중간 리모델링과 페인트칠을 다시 하며 산뜻한 분위기를 불어넣는 모습이었다. 과거에 공공도서관/시설은 어딘가 후줄근하고 관공서 같은 밋밋한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오늘날 시민들의 취향과 수준은 확실히 격이 높아졌다. 단순하게 열람실 열어두고 서가, 책상, 의자 배치해둔다고 해서 찾아오지는 않는다. 공공시설도 그럴듯하게 신경 써서 조성해놓지 않으면 외면받는다. 다들 스타벅스나 카페에 가서 공부하고 책을 읽고 시간을 보낼 것이다. 


시간이 날 때면 마포중앙도서관으로 갔다. 조금씩 정리하던 영국 코번트리 연수 경험을 형식적인 보고서 이상으로 체계적으로 써서 온라인 연재든 출판이든 해볼 마음을 먹은 터였다. 특히 현지에서 직접 겪고 체험한 사례들, 대학이라는 공공성을 지닌 앵커 기관이 상아탑처럼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의 활력과 재생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사회적 대학(Social Univerity)이라는 우리에게는 생소한 개념과 실천도 잘 정리해 소개하면 의미가 있겠다 싶었다. 3층 열람실에 있는 좌석을 주로 이용했는데, 디지털 자료실 쪽 햇살이 온화하게 비춰 들어오는 자리를 좋아했다. 노트북을 들고 와서 꺼내놓고 차분하게 앉아서 쓸 채비를 했다. 여기도 시각장애인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카페가 있다. 이곳 역시 착한 가격에 맛도 괜찮다. 자리를 잡아놓고 곧바로 텀블러를 들고 한층 내려와서 주문해 마셨다. 


노트북을 열고 연수에서 수집한 페이퍼를 살펴보며 글을 쓴다. 배경 정보가 필요하면 쓰고 있는 주제인 영국, 도시(재생), 사회적기업, 대학 등 키워드를 입력해서 자료를 찾았다. 다큐멘터리도 몇 개 있었다. 영상 시청 자리에 앉아 재생해서 보았다. 허리가 아프거나 집중이 안 되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구에 테마에 맞춰 전시한 책과 소품이 있는데, 이달에는 독립출판을 주제로 큐레이션을 해놓았다. 기성 책과 달리 형식이 제멋대로(?)인 책을 보고 있자니 흥미롭다. 이어서 널찍하게 배치되어있는 서가를 걸어 다닌다. 4층 하고도 개방형으로 복층처럼 연결되어 있다. 곳곳에 의자가 있고 한쪽에는 쿠션 의자도 있다. 편히 앉아서 ‘멍 때리기’도 한다.


쉬는 날이면 아침부터 내내 도서관에 ‘콕 박혀서’ 있기도 했다. 종일 있어도 그다지 따분하지 않다. 내가 정기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마포지역화폐 모아를 받는 구내식당 밥 역시 사회적기업 카페처럼 가격도 착하고 맛있었다. 식후에는 푸른 잔디가 깔린 도서관 앞 야외 벤치에 앉아 일광욕을 했다. 독서는 물론 멀티미디어 감상, 카페와 밥집, 멍 때릴 수 있는 여유 공간까지…. 한 곳에서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복합문화 몰이나 다름없다. 게다가 누구나 프리패스, 문턱 없이 드나들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그래서 항상 사람이 많기도 했다. 


그렇게 초고를 도서관에서 마무리했다. 공간이 주는 힘이 분명 있다. 


집에 있었으면 아마도 주로 누워서 스마트폰을 두드리거나 TV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옛날 독서실처럼 책걸상만 있고 딱딱한 분위기였으면, 나는 고시생은 아니었던지라, 매번 그렇게 찾지 않았을 것이다. 언제든 필요하면 오갈 수 있고 쾌적하고 여유 있는 분위기, 그리고 함께 앉아 있는 이름 모를 낯익은 타인들과 더불어 몰입의 환경을 조성해주는 곳. 또 너무 멀리 있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집에서 걸어서 혹은 자전거를 타고 부담 없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기에 자주 오갔다. 그렇게 나의 졸고, 아무튼 세상에 펼쳐놓은 첫 출판물 <모던대학 코번트리, 도시를 바꾸다>가 잉태되었다. 


자유로이 자리와 자료를 내어준 지역 도서관에서부터.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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