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나갈 때, 동네로 들어올 때
2020년부터 근 2년여 시간 동안, 정체불명의 코로나19가 기세등등하던 글로벌 세상을 멈춰 세웠다. 중국어, 영어, 잘 모르는 억양,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한산한 홍대입구역 앞을 지나갈 때면 격세지감을 느꼈다.
지하철역으로 들어가 공항철도를 타는 통로로 가면 더욱 명징하게 세상이 한번 뒤집혔음이 느껴진다. 벽면에 연달아 붙어있던 들뜨는 이미지로 가득한 해외 도시, 여행 명소, 낙원처럼 표현된 관광지, 어디든 하늘길로 실어 나를 태세였던 항공사 광고물이 모조리 낙엽 떨어지듯 사라졌다.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은 채. 대신 ‘공무원 시험, 최단기 합격 1위!’ 커다랗고 명료하게 정자로 쓴 메시지로 내걸린 학원 광고물로 줄줄이 도배가 되었다.
코로나가 장악했던 일상, 여기는 세계로 나가는 길이 아니다. 세상은 멈췄고 여행자는 사라졌다.
돌이켜보면, 코로나 이전 10년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해외여행이 빈번하고 붐이었던 시기였다. 들어오기도 많이 들어왔지만 나가기도 많이 나갔다. 경계 없이 무한대로 뻗을 거 같은 위아더월드. 여행이 좋아서든 이국땅을 동경하고 궁금해해서든 소설 제목처럼 한국이 싫어서든, 너도나도 열풍이었다. 일 년에도 몇 번씩, 휴가나 연휴 때마다 동해, 남해를 뒤로하고 경계 너머 세상으로 날아가기 위해 항공권 앱을 켰다. 클릭, 클릭, 터치를 무한 반복한 끝에 불과 몇십만 원, 아시아권 가격으로 유럽행 비행기표를 싸게 끊었을 때 내지르던 복권 당첨된 듯한 환호성, 어떻게 보면 과잉이었지만,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마니아틱 할 정도로 여행에 빠져 살았다. 다른 세상과 사회를 보고 느끼고 싶었다. 끈 풀린 개처럼 자유롭고 정처 없이 지구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철도로 향하는 길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OUT
홍대입구역 2호선 개찰구로 들어가서 공항철도로 갈아타는 제법 긴 지하통로를 걸어간다. 자기 몸집보다 큰 커다란 배낭을 짊어맨 하얗거나 노랗거나 검은 청년들이 도처에서 지나친다. 쉴 새 없이 들어가고 나가는 바퀴 소리가 사방팔방 여기저기서 난다. 반대쪽에서 걸어오는 외국인들은 캐리어를 끌며 거대하고 꽉 찬 배낭을 짊어지고 맨 채 방금 내가 지나쳐온 동네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들과 바통 터치 중이다. 잘 지키고 계세요. 저는 여기를 떠납니다! 이어폰을 꼽고 여행의 감성을 담은 에피톤 프로젝트의 ‘떠나자’를 들으며 성큼 걷는다. “이 시간이 마지막이야, 다정했던 이 도시를, 안녕....”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나처럼 인천으로 향하는 사람들 표정도 환하다. 하고 많이 봐왔던, 아침 출근 시간 ‘지옥철’에서의 건조하고 퀭한 얼굴과는 정반대다. 여기는 권태로웠던 일상을 벗어던지는 채비를 하는 곳, 저 머나먼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는 익스프레스 통로인 것이다.
공항철도로 향하는 발걸음은 무거운 짐을 들고 끌고 가면서도 솜털처럼 가벼웠다.
집에서 캐리어를 들고 나와 덜컹거리며 서교동 골목길을 걸어갔다. 이어서 찻길가에 당도해 마을버스 6번을 탈 때, 홍대입구역 2번 출구 앞에 내린 뒤 펑키한 젊은 인파와 뒤섞여 지하로 내려갈 때, 공항철도를 타러 지하로를 걸어가며 마주하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 저마다의 사연, 기대, 희로애락을 품은 채 스치고 또 스쳐 지나가는 이름 모를 사람들과 섞일 때, 통로를 지나가며 파리, 방콕, 제주도, 타이페이, 로마 등 여행지 사진을 커다랗게 내건 광고판을 바라볼 때, 이 모든 거쳐가는 찰나의 순간마저 들뜨고 설렜다.
IN
연수와 여행을 겸해 석 달가량 영국에 있다 돌아오는 길이다. 인천공항에서 홍대입구행 공항철도를 탔다. 한 달은 머물 준비를 하고 온듯한 초대형 캐리어를 세워두고, 재잘재잘 수다 떨고 있는 중국인 청년 무리의 설레는 얼굴이 보인다. 아마 반대편 인천공항행 열차를 탔을 때 나의 표정이 저와 비슷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피로하다. 어딘가 처연하고 멍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본다. 가로수 사이로 오랜만에 보는 익숙한 한글 표시들이 낯설게 다가온다. 현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 건너편 땅에 머물던 날이 꿈을 꾼 듯 흐릿하게 뇌리를 스친다. 공항철도는 이젠 춘몽과도 같은 경계 너머 세상과 결국 다시 도래하는 현실에의 복귀를 빠르게 이으며 달린다.
홍대입구역에 내려서 이제는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석 달 전 나의 표정을 한 생기 넘치는 사람들이 맞은편에서 캐리어를 가볍게 끌며 경쾌하게 걸어온다. 공항철도와 2호선을 연결하는 통로(길고 복잡해서 '막장환승'으로 악명이 높은 곳)와 개찰구는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다. 드나듦, 만남, 기다림, 헤어짐이 거리낌 없이 교차한다. 동네로 들어가는 길인데, 여행지로 다시 온 듯하다. 시끄럽고 설레고 부산한 인파와 스치고 닿고 뒤섞인다.
집으로 향하는 나는 홍대에 도착한 여행자들과 한 무리를 이룬 채 2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간다. 바로 앞에 대기하고 있던 마을버스 6번을 탄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정거장에 내린다. 이제야 조용하다. 피로한 데 집에서 밥을 해서 먹기도 힘이 없고 귀찮다. 오랜만에 한국적인 무언가를 먹어야겠다. 내린 정류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은희네 해장국집에 들어간다. 마늘과 고춧가루를 듬뿍 넣고 얼큰하게 시원하게 먹고 들이킨다.
한국에, 집에 온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