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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Jul 22. 2021

이방이 일상에 침투하다

주민만이 아닌 동네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2010년 말 홍대입구는 공항철도가 다니는 지하철역으로 확장했다.


인천국제공항에 내려서 지하철 한번 타면 1시간도 채 걸리지 않고 편하게 홍대까지 올 수 있었다. 반대로 동네에서 공항으로 나가는 교통도 매우 편리해졌다. 공항철도는 김포공항과 인천공항 모두를 거치고 오갔다. 하늘 길과 손쉽게 연결되면서 세계가 지천으로 펼쳐진듯 가까워졌다.


초등학생 때까지 강서구 방화동에 살았다. 김포공항을 지근에 둔 그 동네(당시에는 인천공항이 없었다. 공항하면 김포였다)에서 매일같이 비행기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으며, 저것을 타면 어디로 데리고 갈까, 구름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까, 이런 상상을 하면서 자랐다. 서른이 훌쩍 넘어서 강서구에 다시 간 적이 있다. 신방화역에서 내려 출구로 올라가자마자 그 시절과 비슷한 비행기 뜨는 소리가 들렸다. 당시 나는 마을미디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강서구 주민들이 운영하는 마을라디오 스튜디오에 가는 길이었다. 그날 만난 사람은 여행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남자 승무원(스튜어드, 여성은 스튜어디스) 주민이다. 그는 자신을 ‘생활 여행자’, ‘유목민’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동네를 말했다. 강서구와 방화동은 떠남과 돌아옴, 드나드는 감성을 지닌 동네다. 떠나는 설렘과 떠나보내는 아쉬움, 기약 없는 보냄과 눈물 겨운 상봉이 매일처럼 교차하는 감수성을 품은 공간에서의 삶이라는 말. 홍대에 비행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항과 바로 연결되는 지하로 뚫린 철도는, 여행자와 노마드의 감수성을 그대로 실어 날랐다. 


#조짐

대학교 3학년 무렵이다. 캠퍼스에 중국인 유학생이 눈에 띄게 많아졌다고 체감한 것은. 2008년이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성화가 서울 올림픽 공원으로 온 날이었다. 중국은 한창 경제성장에 가속을 붙이며 위세를 떨쳐나가는 시기였다. 세계적인 행사를 개최하는 순간을 앞두고 한국에 있는 중국인 친구들도 들떠 있었다.


수많은 중국인 유학생이 성화를 맞이하기 위해 잠실 올림픽 공원으로 향했다. 수천 명이 운집해 붉은 물결을 자아냈다. 나는 당시 한 언론사에서 대학생 기자를 하며 현장을 취재했다. 기사 후기 글에 이렇게 적었다.

"바다 건너 모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의 전초전 격 행사인 '성화 봉송'은 타향살이 동포들에겐 일종의 성대한 축제였다. 삼삼오오 모인 중국 젊은이들은 울려 퍼지는 중국 국가 '의용군 행진곡'과 함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래서일까. 중국 젊은이들의 모국에 대한 환호성은 잊고 살았던 민족성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문득 '대~한민국'을 외치며 광화문 한가운데 서 있었던 지난 2002년이 떠올랐다. '붉은 악마' 복장과 유사한 중국의 붉은 물결에 휩쓸려 있으니 덩달아 나도 웃음이 났다.”(오마이뉴스 기사 중)


붉게 치장한 중국 젊은이들이 광장을 빽빽하게 채웠다. 거대한 오성홍기를 흔들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풍경은 중화민족의 단결과 그들이 떨치고 싶어 하는 대국의 자부심을 한눈에 보여줬다. 현장에서는 그 자존을 건드린 사건(몇몇 국내 단체에서 중국의 인권탄압과 티베트 문제를 규탄하는 반대시위를 벌였다)으로 인해 말다툼, 충돌을 넘어 거리를 점거하는 폭력시위로까지 이어졌다. 


왜 이처럼 격앙된 사태가 일어났는지 궁금했다. 나는 학교 같은 과에 다니던 한 중국에서 온 후배를 만나서 대화를 나눴다. 그 친구도 그날 그곳에 있었다. 그는 억눌린 감정이 폭발한 거 같다고 했다. (그들 입장에서)경사스러운 자리를 방해하는 사회/정치적인 구호도 못마땅했지만, 무엇보다 중국도 이제 엄연히 성장하고 있는, 과거와 같은 중심국이 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못사는 나라' 등등으로 무시와 차별을 받은 감정들이 일거에 뒤섞여 표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중국은 기지개를 펴며 팽창하고 있었고 또 몰려오고 있었다. 


여하튼 그 해를 기점으로, 나의 인식에 중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의 존재가 유독 두드러졌다. 


캠퍼스 곳곳에서 외국인 친구를 흔히 볼 수 있었다. 전에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중국인 후배가 과에 08학번으로 들어왔다. 수다스러운 중국인 친구도 종종 보였는데, 도서관에서도 거슬리게 이야기를 나누는 통에, 보다 못한 동기가 따끔하게 제지했던 일도 떠오른다. 부전공이었던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들을 땐, 미국에서 온 키가 크고 마른, 보헤미안적인 방랑의 분위기를 풍기는 서양인 친구가 있었다. 승현이라는 이름도 썼던 그는 독특하게도 미국식 제국주의가 싫고 자괴감이 들어 아시아로 왔다고 했다. 그는 용산 참사가 일어나자 현장에 직접 가서 철거민과 연대하는, 집회에 참여하고 영어로 소식을 번역해 알리는 푸른 눈의 확성기 역할까지 자임해서 했다.


학교에서 뿐만이 아니다. 동네에서도 그렇다.

어느 순간 외국인 관광객들을 잔뜩 실은 버스들이 인근 골목과 거리 곳곳을 점령했다. 일본, 중국인, 동남아, 그리고 서양인도 많이 보였다. 새천년이 시작되던 2000년 532만명 가량이던 방한 외국인 관광객은 2010년 880만명, 2019년에는 1750만명 정도로 몇 배가 급증한 통계를 보았다. 거리의 상점은 헬로우, 니하오, 곤니찌와....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를 새겨놓은 간판과 메뉴판, 안내글로 치장한 곳이 늘어갔다. 전혀 나와 같은 주민은 이용하지 않는, 모르는 ‘뜬금포’ 가게들이 관광 코스로 콕 찍혀서 도는 모습도 여럿 포착되었다. ‘거기 맛집 아니예요!’ 진심 말리고도 싶었으나 열심히 안내 중인 가이드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쳤다.(코로나19가 터진 2020년에는 관광객 수가 90년대 수준으로 거꾸로 흐르듯 줄었다고. 세상 돌아가는 일 정말 모르겠다)


홍대입구역(1번 혹은 2번출구)에서 집으로 걸어오며 거쳐가는 동교, 연남동의 주택가 곳곳에 곰비임비 게스트하우스가 들어섰다. 다세대, 단독주택 모습을 한 집의 형태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만 대문에 붙은 명패가 바뀌었다. 정자 한문으로 올곧게 이름이 적혀 있던 문패에 ‘000 게스트 하우스’ 글귀가 새겨졌다. 조금씩 개조하고 수선했을 뿐, 철거하고 재개발한 것도 아니고 높은 빌딩이나 대형 몰이 들어선 것도 아닌데, 동네는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듯 기존의 것이 썰물처럼 빠지고 새로이 채워졌다. 역세권 뒤편 동네. 홍대 중심가와는 커다란 양화로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위치하며 그래도 조용했던 동네다. 이제 골목 하나를 지날 때마다 영어와 캐리어 끄는 소리가 익숙하게 들렸다. 바다 건너 사람들이 찾는 여행의 허브, 글로벌 노마드를 품는 요지, 걸어서 세계 속으로, 골목을 어슬렁 돌다가 부지불식간에 각지에서 온 외국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났다.


역에서 집으로 오는 중간 지점쯤 되는 한적한 연남동 골목에 마카롱과 프랑스식 디저트를 파는 카페가 있다. 길모퉁이에 자리하여 2~3평정도 될까 하는 작은 곳인데, 그곳에 들렀다 가길 좋아했다. 아내는 수제로 만들어주는 아이스크림이 끝내주게 맛있다고 했다. 들어서면 프랑스인 청년이 짧은 한국말로 수줍은 표정으로 맞이하곤 했는데, 아마 그 잘생기고 훤칠한 청년이 내뿜는 이국의 분위기도 그곳을 찾게 하는데 한몫했을 것이다. 집 바로 앞에도 키가 큰 프랑스인이 이사 들어왔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분이었다. 셋이서 오래된 다세대 계단을 빙그르르 둘러서 올라가는 모습은 정감 있고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이국풍이었다. 아이를 좋아하는 아내는 다섯 살 쯤 되어 보이는 동서양 부부의 2세를 웃으면서 바라봤다. 그녀가 말하길, 그 귀여운 친구는 기분이 좋으면 한국어로 신나게 말하고 투정이 나면 불어를 쓰며 징징대는 모습이라고 했다(물론 항상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아직은 지나치며 눈인사만 주고받은 사이지만, 언젠가는 말을 터보리라.


이방이 동네에 거리낌없이 침투했다. 일상에서 이국의 말과 체취와 발걸음이 섞였다. 그렇게 서교동과 인근 지역은 대표적인 서울의 국제 동네가 되어갔다. 동네에서 세계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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