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에 있는 모르는 벗과 함께
앞서 글에서 나는 잘 겪어보진 않은 할아버지 시절까지 끌어들여, 마치 내가 이 동네에 뿌리가 있는 것처럼, 토박이 비슷한 것 마냥 글을 썼다. 나 동네 좀 알아요, 사연이 있어요, 이렇게 다루고 싶었던 건 맞다(^^). 그러나 나 개인으로서 보자면 붙박이 주민은 전혀 아니다. 우선 유년시절을 여기서 보내지 않았다. 대학교 다니던 시절 처음 들어와 살았고, 서른부터는 꽤 길게 다른 동네에 나가 이사 다니며 살기도 했다.
그러니 나에게는 유서 깊은 토박이의 정서, 어릴 적 뛰놀던 동네의 기억은 없다. 흔히 말하는 동네 친구도 드물다. 지인들은 조금씩 있지만 평범한 수준이다. 그래서 가족 이야기가 엉켜 있는, 오래 살아온 주민 느낌이 일부 있으면서도, 서교동에 새로이 진입한 1~2인 가구 주민의 감수성도 꽤 탑재해 있다고 느낀다.
나도 주변 이웃을 대부분 잘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익숙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주하고 스쳐 지나감, 확실히 기본은 걷기다. 알게 모르게 서로 인지하며 근방을 걸어 다니고 매일 같은 땅을 밟으면서 닿는 체감이다. 집에서 나와 골목을 걸어 다니며 동네에 나를 개방한다. 다세대 주택의 노출된 층계를 오르는 이웃을 모르지만, 자연히 시선은 향하고 부담스럽지는 않을 정도로 존재를 인지한다. 공원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 할머니, 아이도 아는 사이가 아니다. 골목상가 1층 떡볶이 집에 둘러앉은 커리어 우먼들도 나는 모른다. 집 근처 서교어린이집에 들어가는 고사리 손의 아이도, 줄 지은 아이들을 인솔하는 선생님도, 데리러 온 엄마, 아빠도 모른다. 골목을 따라 걸으며 근처 성서초등학교로 향하는 책가방 맨 키가 제법 큰 어린이도 모른다. 편안한 차림으로 보들보들한 털을 지닌 강아지를 데리고 나와, 공원 주위를 돌고 있는 여성 주민도 전혀 모르는 타인이다.
버리는 날, 정해진 요일, 쓰레기와 재활용 더미를 들고 아래로 내려간다. 옆 빌라에서 슬리퍼 끌며 똑같이 한가득 버릴 것을 들고 내려온, 아마도 엄마가 심부름을 시켜서 내려왔을 청소년도 모른다. 그러나 언제든 공기처럼 거리에서, 출근 시간에, 퇴근 무렵에, 편의점에 갈 때, 주말에 산책할 때, 골목을 돌며 스치고 지나치고 마주한다. 그들은 낯익은 타인이다. 아는 관계가 아닌 이름 모를 타자이지만 어쩐지 어딘가 익숙하고 낯이 익은 사람들이 많은 동네라고 한다면, 일말의 안정감이 내려앉고는 한다. 슬며시 경계심을 늦춘다. 눈을 감고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과 가방을 놓아두어도 훔쳐가지 않을 것을 안다. 잠시 편의점에 들어갈 때 묶어두지 않아도 자전거를 도난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물론 재수 없으면 뒤통수 맞듯 당할 것이다).
말을 트고 통성명을 하는 것만이 소통의 전부는 아니다. 아이를 등에 업고 다세대 계단을 오르는 푸른 눈을 지닌 앞집 사는 이웃을 난 모른다. 언젠가 말을 터보고 싶다는 마음만 가슴 한구석에 품고 있을 뿐. 모르지만 이방인처럼 생긴 주민을 경계하지 않는다. 집에서 내려와 골목을 걷기 시작할 때, 그가 빙글뱅글 그의 집으로 오르는 게 보인다. 아이를 데리고 서교마을마당 작은 공원에서 놀고 있으면 흐뭇하게 미소를 보낸다. 동네에 이런 공원이 없다면, 노출된 공간 없이 폐쇄적인 단지의 섬처럼 집과 건물이 있고 발걸음이 뒤섞이지 않았다면, 마주침은 줄고 익숙함도 사라지고 각각 낯선 타자로 경계하며 떨어져 있었을 것이다.
옆에 있는 모르는 벗과 함께
이름이 주민인데 어찌하다 보니 서울에서 커뮤니티와 관련해 지원하는 일을 해왔다. 도시의 삶에서도 관계는 중요하고 끈끈한 이웃, 말과 일상을 섞는 커뮤니티의 소중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이 소중하며 그런 관계망 안에 들어가 있다면 매우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종종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정도면, 우선 그것 정도 모색할 수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스트레인저들 속 일말의 친숙감부터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도시와 공동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개념처럼 다가올 때가 있다. 익명이 없고 이웃끼리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지내며 대소사를 챙기던 전통적인 커뮤니티, 주민공동체의 상은 이상과 낭만일 순 있어도 새로운 감각의 연대감과는 상충의 지점도 많다. 분명 지금 이곳의 현실과는 까마득하게 멀다.
더욱이 그런 결속과 관계는 정부의 인위적인 지원을 앞세워 될 일은 아니다. 사람을 묶는 관심사와 취향, 기제도 다양해서, 한 동네, 가까운 공간에 있는 요인으로 다수가 서로 밀접하게 알고 지내는 이웃이 될 수는 없다. 도시의 매력을 익명성으로 두는 사람에게, 훤히 아는 눈초리를 갖고 보는 눈은 제아무리 선의로 가득하다 해도 부담이다. 결혼해야지, 취업 어디 했니 등등 ‘명절 잔소리 메뉴판’ 물음은 듣는 이의 반응과 무관하게 관심과 선의를 내포한다. 사방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매일 가득한 동네는 도망치고 싶은 공간일 수 있다.
활짝 웃으며 전하는 인사와 예상치 못한 이사떡에 온기를 느끼지만, 서로 모르는 듯 스치고 적정선에서 지나쳐주는 일상을 동시에 꽤 자주 바란다. 도시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토박이와 노마드와 이방인, 그리고 취향과 관점과 출신이 다른 사람들이 생의 특정한 시점과 각자의 사연에 따라 만나고 교차하고 드나들며 뒤섞여있는 공간이다. 커뮤니티 카페를 만들어보겠다는 주민 모임을 지원한 적이 있다. 주변 이웃들이 찾아주면 운영은 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시작을 했다. 오래가지 못했다. 실패하는 원인을 알게 되었다. 바로 이런 것. “카페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그러기 위해 옆자리의 벗들이 있어야 하는 곳”(알프레드 폴가)
우선은 카페에서와 같이 옆에 앉아 있는 모르는 벗들을 만들어주는 것. 알지는 않지만 일말의 낯익음을 만드는 것. 같은 골목을 걷게 하는 것. 우연하게 스쳐 지나가고 마주치는 공간을 동네에 조성하는 것. 프라이버시를 해치지는 않는 수준에서 담장을 낮추고 서로의 시선을 자연스레 교차시키는 것. 발걸음과 시야에 닿지 않는 어둡고 후미진 공간을 사라지게 하는 것 등등.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