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주민 Aug 19. 2021

레트로-ing: 과거는 흐르고 머문다

동네의 여전한 붉은 벽돌집을 보며

#1.

동네를 걸어 다니면, 붉은 벽돌로 된 집과 담벼락을 심심치 않게 마주하게 된다.


지금 사는 여기에도,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서도 어김없이 있었다. 여전하게 골목의 풍경에 남아 지키고 있는 저층 동네의 주요 상징과도 같다. 튀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가장 보통의 질감과 재료. 누군가는 오래되고 낡고 평범하면서 서민적인 집을 연상하는 표현으로 ‘나 붉은색 벽돌로 지은 집에 살아!’란 말을 쓰곤 하더라.


그러나 동네를 돌면서 자세히 살펴보면, 흘러간 시절부터 있던 붉고 때 묻은 벽돌이 더 튼실하고 정겹게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요즘 지은 신축 건물일수록 오히려 무르고 저렴해 보이는 가공 자제와 무늬만 폼을 낸 재료를 쓰며 비용 대비 효율을 극도로 뽑아낸 경향이 두드러지기도 한다. 다소 헤지고 매끈함이 사라졌더라도, 오래전 벽돌이 손수 단단하게 쌓아 올린 수제의 정성과 땀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경우도 꽤 있다.


붉은 다세대 집을 슬쩍 손질하고 개조해서 요즘 말하는 ‘레트로, 뉴트로 감성’으로 되살린 집도, 단지 새롭고 연식만 짧은 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세월과 흔적의 매력을 품고 있다. 집 근처 작은 공원 앞, 1층에 좋아라 하는 책방 ‘번역가의 서재’가 있는 벽돌집도 그러하다. 구관이 이어서 명관인 자리에 서재로 향하는 발길이 놓인다. 사람들이 다세대 계단을 돌고 돌아 오르는 풍경은 옛날 동네 그대로인 거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새롭다.

여기는 망원역 근처의 지금은 '당인리 책 발전소'가 자리한 공간이다


#2.

과거에 남아 머무르고 매달리는 삶은 대체로 퇴행인 경우가 많다. 왕년에~ 레퍼토리, 미화인지 향수인지 불분명한 그땐 그랬지, 좋았지, 하는 한탄과 비슷한 추억팔이, 반복 재생, 되새김.... 정체와 권태의 오늘이 한스럽다. 흘러간 한철, 아련하고 꾸며진 지난날의 감흥을 메마른 현실 위로 덧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날은 철 지난 노래와 선율에 진지하게 매료된다. 바라 왔던 갈망의 대상과 취향이 과거에 존재한다. 지금의 세상에서, 바뀌어버린 현실에서는 고대하고 찾아 헤맸으나 결국은 소멸한 것. 꼭 자연의 섭리나 정도의 흐름으로 퇴화했다기보다는, 온갖 욕망과 인위에 따른 대세와 쓰나미에 휩쓸려가 잊힌 알짜배기 혹은 정수들.


고전과 옛 문헌을 읽으며, 오늘의 현실이 각박하고 뭔가 돌파구를 찾기 어려워 보일 때, 지금과는 다른 본연의 생활태와 생각, 사고, 체화된 휴머니즘이 없었나, 생각을 해보곤 한다. 그래서 결국 복고가 나오고, 다시 읽기, 재발견, 재해석이 나오고, 부활 혹은 리메이크의 움직임이 출몰하는 면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어느 날 불현듯 기억에서 사라진(줄 알았던) 흘러간 노랫말에, 책 속 문장에, 영화 장면에 아주 진한 감흥을 느낀다. 그것은 향수이면서도 향수 이상일 수 있는 것이다. 잃어버리고 놓치고 부수고 비정하게 지나쳐버린 것. 혹은 세상이 정방향이 아니라 거꾸로 흐르고 있음을 직면하는 어떠한 단초의 포착.


코로나19로 ‘집콕’이 대세인 날, 집에 누워 <EBS> 세계의 명화에서 틀어주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채널 돌리다 우연찮게 보았다. 어릴 적 가끔 접했던 흑백 영화를 바라볼 때 느낀 클래식한 분위기처럼, 이 도시적인 제목과 감성으로 보이는 작품도 요즘 세대에게는 고전과도 같은 옛 영화가 되어버렸다.


라디오 사연을 들으며 끌어당기는 인연을 직감한다. 우연한 편지 한 장을 손에 들고 시애틀에서 뉴욕까지, 아무런 기약 없는 만남의 장소로 향한다. 넷플릭스에서 뒤늦게 본 <유열의 음악앨범>도 엇비슷한 90년대 감성을 탑재하고 있었는데, 바로 확인하고 반응하는 SNS 시대 이전의 사랑과 만남, 우연처럼 가닿는 주파수와 한참 뒤 확인하는 이메일 한통.... 편지 한 장 남겨두고 하염없이 기다리던 날, 필연 같은 우연에, 거기에 열과 성을 실어, 운명을 걸고 미지의 가능성일지라도 달려가고 마주하고 도리 없이 엇갈리는 순간들.


오늘의 일상이 데이터에 붙잡히고 조종당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초단위로 검색하고 확인하고 거기에 의지해 길을 걸어가고 상당 부분 사전 조사와 견적을 낸 만남을 한다. 소위 ‘데이터 교’에 가까울 정도로 신봉하여 생각하고 행하고 그곳에 없으면 없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짜이고 계산된 알고리즘 안에서 움직이는, 우린 더 의존하게 되었고 얽매이게 되었다. 자유의 영역은 오히려 축소되어 가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


흘러간 영화를 보면서 느낀 감정은 단지 추억팔이나 퇴행은 아니다. 우연과 필연이 예측 불가하게 낭만처럼 조우하는 긴장, 역동, 이건 분명한 실체이자 유지가 필요한 그 어떤 감성의 결. 잃었거나 잃어가는 감각과 삶의 영역. 세월이 흐른다고 꼭 앞서의 것을 꼰대 취급할 건 없다. 오늘이 더 파리하게 야위어버린 것도 있기에.


#3.

내가 처음 서교동에 들어와 살았던 십수 년 전과 오늘의 동네는 사뭇 다르다. 속도를 좇을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변화의 시기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청기와 주유소와 예식장이 사라졌다. 두 곳 모두 거대한 호텔이 들어섰다. 공항철도가 개통되었다. 외국인 여행객을 태운 관광버스가 출몰하기 시작했고 계속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피부색의 이웃들 존재가 자연스러운 다문화, 글로벌 동네처럼 되어 있었다. 옆 동네 연남동에 철길이 걷히고 경의선숲길 공원이 개장했다. 반대편 옆 동네 망원동은 ‘망리단길’로 불리는 신흥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사방에서 단독, 다세대, 오래된 집들이 하나둘 새롭게 뚝딱뚝딱 치장하더니 카페, 음식점, 책방, 디자인숍 등 트렌디한 복합 상점 건물로 변해갔다.


역설적이지만 동시에 크게 변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서울의 많은 동네와 지역은 이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전벽해가 되었다. 살던 집과 골목, 상점가가 온통 전면적으로 철거되고 고층 아파트나 빌딩을 세웠다. 여기는 바뀌었더라도 국지적으로 새 건물이 들어섰다. 통째로 허물지 않고 세월의 흔적을 담아 리모델링 혹은 증축한 재생 공간도 상당수다. 내가 서교동(과 인근 지역)을 살기 좋은 동네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순전히 낮은 집들과 살아 있는 골목과 거리, 특색 있는 상점을 품은 저층 도시공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인턴> 속에도 빨간 벽돌로 지어 올린 오래되고 낡은 공장이 나온다. 이제는 트렌드와 신세대를 품고 유망하게 성장한 스타트업 회사 사무실로 쓰고 있다. 속을 채운 사람과 콘텐츠는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외관은 거의 그대로다. 화석처럼 쓸모를 잃은 '전화번호부' 인쇄 일을 이곳에서 했던 70살 노령의 인턴(로버트 드니로)은 과거 본인이 일한 공간과 자리를 가리키며 "리모델링을 하긴 했지만, 집 같아요"란 말을 한다. 그는 자유분방한 밀레니얼들 속에서 본인이 수십 년 해온 대로 빳빳하게 정장을 차려 입고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고 구식 서류가방을 든 채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며 '올드 패션'(old-fashion)한 면모 그대로 일한다. 그러나 젊은 사장(앤 해서웨이)의 표현대로라면 요즘 세상에선 '멸종 위기'에 처한, 그러나 노련한 스타일로 회사에 안정과 윤활 역할을 톡톡히 하는 단단하고 든든한 인재, 말단이지만 어른인 역할로 나온다.


다시, 동네를 걸으며 빨갛고 빛이 바래고 조금씩 헤진 벽돌을 본다. 남아 있을 건 여전히 남아있어야 한다. 변하더라도 어떤 것들은 버티고 묻어서 잔류해야 한다. 삶터라고 한다면, 무언가는 늘 그 자리에 있는 플라타너스나 느티나무처럼 뿌리내리며 맞이하고 있어야 한다.

[다음 편에 계속]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