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의 사연과 관점에서... 홍대앞 동네사(史)
머나먼 남쪽 땅의 시골 출신인 할아버지는 서교동, 그리고 동교, 연남, 연희동… 일대에서 집 짓는 일을 했다.
촌에서 농사짓다가 올라온 할아버지는 팽창하는 도시 서울에 어떻게 녹아들었을까. 그 시절 많은 사람이 그랬겠지만, 현대 문물과는 거리가 먼 농경사회를 살다가 돌연 상경해 급속도로 진행된 도시화의 한복판에 자리했을 것이다(그는 1930년대생이고 1950년대 한국전쟁 후 처음 서울에 왔다). 백지 같았을 터에서 사회 기반을 수놓고 건설하는 일꾼으로 살았을 것이다.
집 짓는 일을 한 건 당시 필요와 분위기에 딱 맡게 몸을 실은 것일 수 있다. 1960~70년대 산업화 시기 서교동과 동교동 일대는 넓은 규모로 주거지 조성이 시작되었고, 할아버지는 크고 작은 집을 지어서 공급하는 일을 꽤 수완 좋게 맡아서 했다. 이 지역의 많은 단독, 다세대 주택이 그가 지어다가 판 것이라고 했다. 나의 동생과 친구 여럿이 다녔던, 연남동에 있는 경성중고등학교도 직접 핵심 인력으로 땀을 보태 지어 올렸다며 자랑스럽게 해주는 말도 자주 들었다.
먼저 고향을 떠난 할아버지를 이어, 서울로 합류한 할머니(자유당 시절에 올라왔다고 말해주었다)와 아버지를 포함한 식구들도 신촌 어딘가 ‘하꼬방’(판잣집)에 터를 잡은 것을 시작으로, 집 짓는 일을 하는 남편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마포, 서대문 지역에 둥지를 트고 자리를 잡았다.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하고 일이 잘되지 않아 사정이 힘들 적에도, 이 일대를 벗어나지 않는 허름한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어린 시절 넓은 정원에 연못까지 있는 커다란 고급 주택에서 살아본 경험을 자랑하듯 말해주었다. 친구를 데리고 대문을 넘으면 와우, 대단, 이거 실화?…. 탄성과 함께 대저택에 들어온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한다. 물론 계속 지낸 것은 아니고 집을 지어다가 팔리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살았던 것이었다지만, 저런 집에 살아본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일까. 여하튼 1970년대 무렵의 서교동 일대는 쾌적하고 인프라가 괜찮은 주거지 동네로 유명세를 얻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 시점을 전후로 이곳 일대에 주택 공급이 두드러지게 활발(토지구획정비사업 1967년 완료 후)해지기 시작했다. 도시가스나 상하수도 등 생활시설이 정비되면서, 안정되고 반듯하고 괜찮은 환경의 주거지로 인기를 끌었다.
빼곡하지는 않았을 시절이다. 지금의 홍대입구역 인근의 화려한 건물, 조명, 지칠 줄 모르고 이어진 인공 조형물에 주말이면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인파를 끌어들이는 동네를 생각하면 전혀 어울릴법하지 않지만, 이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고 한다. 없던 도시를 세우던 시절이다. 할아버지는 아직 듬성듬성했을 땅에 집을 새로 지어 올리는 현장으로 새벽 5시면 나갔다. 고모는 술을 좋아했던, 거하게 한잔 한 다음날 급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작별인사도 못한 그를 떠올리며, 그러나 잔뜩 마시고 온 날에도 어김없이 해뜨기 전부터 흙먼지 날리는 현장에 나가는 뒷모습을 묘사하는 회고를 전했다.
그렇게 성실하게 일을 해서, 남도 고향에는 그가 서울 가서 꽤나 성공했다는 말이 돌았다고(나중에 다른 분야의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해서 다시 어려움을 겪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아버지는 부자나 잘 사는 사람은 아니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친지들이 있으면 먼저 자리 잡은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찾아와서 머물며 신세를 지고 갔다는 말을 가족들로부터 자주 들었다. “새벽부터 밥 차리는 게 일이었지. 가정집에서 한 달에 쌀 두 가마니 넘게 먹었다고 하면 누가 그대로 믿겠나 몰라.” 할머니는 입버릇처럼, 당시 서울로 몰려들었던 시골의 친척들, 서울역 찍고 다음 코스가 바로 우리 가족의 집이었다는, 집으로 드나드는 고향 사람들로 항시 북적인 시절을 전했다. 바야흐로 지방에서 서울로 구름같이 몰려드는 이촌향도의 시절이었을 것이다. 쌀 한 가마니가 어느 정도인지 나는 말을 들으면서도 제대로 가늠이 가질 않았다. 세어보니 무려 80kg이다. 요즘 집에서 지어다가 먹는 양을 따져본다. 한 달이 아니라 1년을 다 합쳐도 반 가마니 먹을까 말까 하다.
인스타 인증하며 맛집 찾아다니는 인파들은 전혀 없었을 시절이겠지만, 집밥만으로도 달그락달그락 소란스럽고 시끄러웠을 동네와 집이다. 고모는 어릴 적 제발 조용한 집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고 했다. 찾아오는 친지와 손님은 당연히 받아줘야 하는 거였고, 너나 할 거 없이 밥을 해 대접하고 먹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렇게들 살았다고 한다. 간혹 나는 잘 모르는 촌수 차이가 꽤 나는 친지 분이 할아버지나 할머니를 얘기하며 고마움을 표시했는데, 본인에게는 부모와 같이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고 했다는 것이다.
분명 서울은 유랑의 공간이다. 정착과 뿌리내림보다는 떠도는 삶이 빈번하다. 자발적인 경우도 있고 전월세 계약 기간 탓도 있다. 직장 위치 때문이기도 하며 동네 전체가 철거되고 재개발되는 통에 살던 곳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익숙함을 편하게 느낀다. 살아본 경험은 몸에 각인된다. 아무래도 살던 곳이 추억이 깃들어 있고 정감이 간다. 나도 몇 차례의 자발, 비자발적인 이사를 하며 살았지만, 몇몇 동네를 제외하고 서울은 여전히 낯설다. 특히 동쪽과 한강 이남 지역은 더 그러하다. 살거나 일하거나 놀러 가거나 몸과 발을 담가본 경험을 한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주위를 보면 메가시티, 노마드의 도시 서울에서도 특정 동네 언저리에서 오랫동안 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살았던, 사는 동네가 주는 중력이 분명 있다.
나는 이 글을 ‘플랫랜드’란 이름을 한 서교동의 카페에서 쓰고 있다. 과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단독주택이었을 터에 새로 지은 곳, 흰색과 은색톤이 지배적인 모던한 분위기의 공간이다. 1층에는 널찍하게 ‘스페이스소’라는 전시 공간도 별도로 두었다. 주기적으로 전시 주제를 바꾸며, 주민과 찾는 이에게 문턱 없이 무료이면서 수준급인 아방가르드의 예술을 선보인다. 넓게 낸 창밖으로, 흐릿한 하늘 아래의 골목 분위기가 감상적인 날, 늘 주문하던 아메리카노가 아닌 아인슈페너를 고른다. 하얗고 달콤한 크림을 작은 티스푼으로 음미하며, 우드톤의 제네바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있다.
할아버지가 흙과 벽돌을 나르며 지었을 집들은 이제 상당수 사라졌다. 이곳 언저리에 기존 집들을 대체하며 들어선 신식 빌라, 주택을 개조해 만든 카페, 출판사 사무실, 디자인 회사, 헬스장…. 내가 지금 앉아 있는 바로 이곳도 그러하다. 이전에 할아버지나 동료들이 지어 올린 집이 있던 자리였을지 모른다. 그냥 사라지고 변한 것만도 아니다. 이토록 첨단의 트렌드와 민감함을 새기며 변했다. 홍대를 근처에 둔 동네. 언제부턴가 홍대는 서울을 대표하는 대명사 중 하나로 꼽힌다. 꼭 가봐야 할 젊음의 명소이자 유행을 잔뜩 품은 번화가. 홍익대학교(Hongik University)를 줄인 홍대는 이제 ‘Hongdae’라고 표기되어 언급하는, 국내를 넘어 외국인들까지도 자연스레 발음하고 호명하는 글로벌한 고유명사로 통한다.
그 시절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터를 잡고 일을 할 무렵의 이 동네는 ‘홍대’라기보다는 완연한 주거지였다. 내가 머리가 굵어진 무렵부터 뇌리에 자리하는 서교동과 일대는 문화, 예술, 젊음, 상권의 키워드로 인지된다. 쭉 고정된, 하나의 얼굴을 한 동네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러함에도 또 아주 생경함이나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는 건 왜일까. 곳곳에 하나하나 옛 주택들이 사라지고 바뀌긴 했지만, 과격한 철거나 전체 블록, 가로 단위의 개발이 많지는 않았던 탓일까. 골목과 거리는 상당수 그대로 남아 있고 홀로 높다랗게 지어 올린 건물도 역세권 번화가를 제외하면 국지적으로만 존재한다.
그보다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붉은 벽돌을 겹겹이 쌓아 올린 오래된 집과 살짝 수선하여 옛 모습을 오늘에 적응시킨 잔류의 풍경이 여전히 시간을 이으며 묻어있다. 세월에 따라 집의 모습은 변했고 공간을 채우는 사람도 바뀌어왔지만, 그래도 이 동네는 완전히 철거되고 사라진 다른 서울의 동네와 비교하면 아직 걷던 길의 흔적과 시간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주민의 히스토리를 변화한 터전에서 회상할 수 있는!
PS: 내가 지금 쓰고 있는 '홍대앞 동네'가 곧 서교동은 아니다. 홍대앞 범위에 대해 각자 인지하고 정의하는 상이 다르다. 고정된 영역이라기보다 시기에 따라 고무줄처럼 변하기도 한다. 홍대입구역, 대학가와 인접한 서교동 일대부터 근처의 동교동, 연남동, 나중에는 합정, 상수, 망원동, 다른 구역처럼 느껴졌던 연희동까지 확장세가 뻗어나갔다는 인식도 있다. 그렇게 단지 서교동만은 아니다. 동은 행정구역일 뿐이다. 홍대를 그린 지도의 경계가 모호하듯, 주민으로서의 생활권도 경계선 없이 자연스럽게 옆 동네와 연결된다. 나는 서교동 주민이지만 나의 생활 영역은 인근 동을 넘나든다. 이 글은 그런 '주민'의 기록이다.
(이어 '붉은 벽돌’집을 다룬, 다음 편으로~) https://brunch.co.kr/@jmseria/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