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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웃주민 Apr 10. 2021

연희, 추억과 유행이 뒤섞인 동네

[옆 동네로의 야행] 20년 전 등굣길, 오늘의 퇴근길 in 연희동

#1 약간씩 배회하며 겉돌았던 동네

 

20년도 넘었다. 연희동에 있는 서연중학교를 졸업한 나에겐 이 거리와 골목은 등하굣길이다. 그러나 이곳은 고향과 같은, 묵직한 추억이 깃든 장소는 아니다. 나는 전학생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할머니 집이 있던 북가좌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학교 배정이 연희동으로 되었다. 남녀공학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당시 우리 학교의 남녀 비율은 남자가 3~4배나 많을 정도로 지극히 불균형했다. 아마 공대를 가면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버스를 타고 북가좌동과 연희동을 오가며 학교를 다녔다. 중학생이던 1990년대 후반만 해도 종이로 된 버스 탑승권인 회수권을 사용했다. 버스표를 몇 묶음 사다가 한 장씩 찢어내며, 가좌역, 모래내, 사천교를 지나 연희동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나의 등굣길은 버스정류장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나의 청소년기는 북가좌동과 연희동, 신촌 언저리에서 펼쳐졌다. 20대 넘어서 서교동에 이사 왔는데, 요즘에는 홍대 생활권이 확장되어 망원, 성산, 상수, 연남동을 넘어 연희동까지 홍대권역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성산회관은 유명하고 잘 알려진, 많은 버스들이 교차하는 정류장이다. 지금은 ‘연희104고지 앞(구 성산회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아직 명기를 하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산회관은 이미 중학교 때 사라졌는데, 그 자리에 ‘놀부집’이라는 대형 한식당이 들어섰다. 커다란 놀부 얼굴을 한 간판이 성산회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정류장에서 길을 건넌 후 연희로(11가길)를 지나 학교로 향했다. 주위로 어떤 가게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가게가 별로 없었다. 주택가, 그것도 커다란 집들이 여기저기 솟아있는 넉넉한 주거지 동네였다. 


20년 전 나의 등굣길은 음울했다. 어려워진 집안 환경은 사춘기의 나를 침참시켰다. 어린 시절 추억이 쌓인 동네에서 이사와, 아는 친구 하나 없는 외지로 와서 걸어가는 등굣길은 그저 해맑을 수 없었다. 비가 엄청 쏟아지는 어느 날, 손에 쥔 우산도 쓰지 않고 굵게 떨어지는 장대비를 맞으며 걸었다. 연희로를 지나 학교 근처의 파출소를 거쳐 정문, 교실로 들어가기까지 비를 홀딱 맞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아침부터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자리에 앉는 나를 친구들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우산도 있는데 왜 비를 쫄딱 맞고 그러냐, 안 찝찝하니?” 아니, 괜찮아. 나는 그냥 “시원해서 빗속을 걸었다”고 했다. 무언가 씻어내려 보내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연희동은 낯선 동네였다. 시간이 갈수록 익숙해졌지만 약간씩은 겉돌며 배회했던 공간으로 기억된다.


확실히 연희동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살던 방화동(당시에는 서울 변두리의 시골 같은 동네였다)에 비하면 잘 사는 친구들이 많았다. 학교 정문에서 직진하여 약간의 언덕을 오르면 친구 A의 집이다. 고급스러운 빌라였는데, 마치 운동장에 들어온 듯 드넓었다. 나와 같이 북가좌동에 살았던 친구 B는 이곳에 올 때마다 “여기가 천국이로세”를 외쳤다. A는, 당시만 해도 중학생들에게 흔치 않게, 개인 방과 PC가 있었다. 천리안이었는지 프리챌이었는지, 무슨 채팅 사이트에 접속하더니 자신이 대학생 인양 행세하며 장난스럽게 타자기를 눌러댔다.


또 녀석의 집에는 수입과자와 간식이 많았다. 이곳에 놀러 오면, 컴퓨터를 하며 동네 슈퍼에는 보이지 않는 고급 과자를 음미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렇다고 연희동에, 우리 학교에 부자 친구들만 있었던 건 전혀 아니다. 정문을 나와 왼쪽 언덕을 오른 후, 궁동 공원을 넘어가면 그야말로 서민들의 주거지가 옹기종기 펼쳐졌다. 친구 어머니는 그 동네에서 소박한 미장원을 했다. 그때만 해도 집이 부자든 가난하든 그다지 개의치 않고 잘 어울려 놀았다.


#2 추억그 너머


20년이 훌쩍 넘었다. <2020 원더키디> 만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2020도 훌쩍 넘긴 오늘이다. 퇴근길에 들른 성산회관 정류장 주변은 크게 변한 건 없다. 놀부집은 사라지고 몇몇 새 건물이 올라오긴 했지만, 상전벽해처럼 모든 것이 지워진 서울의 다른 동네에 비하면 완벽하게 그대로 남아있는 풍경이다. 


길을 건너니 ‘곳간’이라는 간판의 빵집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은 없는데 불은 켜져 있다. 자세히 보니 무인으로 판매를 하고 있다. “동네 가게로서 고객님들과 유대관계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스승님의 철학을 저희의 방식대로 실천하는 과정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영업시간 후 올 수밖에 없는 주민 고객을 위해 사람 없이 열어두었다는 안내 글이다. 빵들은 가득한데 ‘자율 결제’를 하라며 가게를 활짝 열어둔 것을 보면, 그래도 믿을 만한 사람이 세상에 많다는, 의심 없이 사람을 맞이할 줄 아는 분이 사장님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브리오쉬 식빵을 하나 집어 든 후, 제로페이로 결제를 하고 가게를 나왔다. 


연희로로 들어선다. 거리의 형태는 그대로인데, 가게와 상점들이 곳곳에 많이 들어서 있다. 주황빛의 가게 조명들이 저녁거리를 은은하게 비춘다. 확실히 세련되고 ‘힙’해진 분위기다. 전에는 커다란 단독주택이었을 곳이 이제 ‘연희대공원’ 간판이 붙은 복합 문화공간으로 바뀌었다. 그 시절 주거지 연희동을 연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모던함과 미니멀한 양식으로 하얗게 솟은 마고앤로렌 가구점 본사 건물도 거리에 들어서 있다. 골목으로 들어가, 학교를 가는 길에 있던 파출소는 그대로다. 이름이 ‘유실물 보관센터’로 바뀌었는데, 옛날에는 전경들로 북적이던 곳이다. 종종 학교 운동장으로 올라와 축구를 했는데, 어떤 친구는 괜히 까불다가 머리를 짧게 깎은 무서운 형님들께 혼쭐이 날 뻔했던 생각도 어렴풋이 난다.



정문 앞에 다다른다. 여기도 그대로다. 그리고 변했다. 옛날 문구점이 있던, 등굣길에 들러 노트, 필기구, 준비물, 혹은 불량식품을 사 먹고 하던 가게는 없다. 건물은 그대로 있다. 그 자리에 ‘라우터 커피’라는 카페가 들어섰다. 기억 속 공간이 철거되진 않았지만, 안에 들어있는 콘텐츠는 세월에 따라 바뀌었다. 


연희동에는 이러한 곳들이 많다. 정문 앞에서 조금 걸어가면 다섯 갈래로 골목길이 뻗어나가는 교차로가 나온다. 연희동 사진관과 스웨이(sway) 커피가 모퉁이에 자리한 널찍한 교차의 공간. 있고 없는 곳. 동네 하드웨어의 정취는 그대로다. 형태도 변하지 않았고 높이도 거의 같다. 그러나 전에 없던 카페와 상점, 공방들이 곰비임비 들어섰다. 스웨이 커피가 있는 이곳처럼 새롭게 지어 올린 건물도 곳곳에 흩뿌려져 있다. 그 옆에, 세탁소(금성 컴퓨터 크리닝)가 있는 건물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20년을 사이에 두고 시공간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감정에 휩싸인다. 연희동엔 세련미를 품은 아방가르드와 옛 기억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끼 묻은 골목길이 뒤섞여 있다. 보존과 혁신의 역동이 주는 매력이다. 반면 어릴 적 이사와 살던 북가좌동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뉴타운이 들어섰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 나의 삶터에 대한 기억은 사라졌다. 그러나 연희동은 남아 있다. 침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마저도 끌어안고 넉넉한 느티나무처럼 서있다. 시간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서 찾아와도 언제나처럼 나무 같이 남아 있는 동네. 그러면서도 정체해있지는 않은, 보존과 변화가 조화를 이루는 곳, 추억과 유행이 뒤섞여 있는 로맨틱 야행을 할 수 있는 우리 동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아는동네x스토리디킹클럽에서 기획한 '도시의 기록러' 워크숍으로 함께 만든 '연희, 연남으로 퇴근합니다' 동네잡지에도 실렸습니다. 다양한 삶을 살고 있는 주민, 대학생, 직장인, 집순/집돌이들이 연희, 연남동에 모여서 돌아다니며 정음철물, 기록상점의 '이끔이'님들과 같이한 소박특별한 작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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